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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8/42)

7장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수염을 말끔하게 깎은 팔란 왕국의 국왕 레이언 폰 크라우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 양쪽에 메리슨과 레토가 서 있는 가운데 방 안에는 단풍기사단의 기사들과 은빛 풀 플레이트를 걸친 왕국 수호기사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흑안의 다크로얀... 엘레나 공주의 호위기사를 자청했던 그.

그는 공주의 옷만을 가지고 찾아와 그것이 엘레나의 시체라고 했다. 국왕 레이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옷을 든 로얀의 눈동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엘레나가 머무는 궁에서 격렬한 전투의 흔적과 더불어 어쌔신의 시체도 찾아냈다.

국왕 레이언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지금처럼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그가 깨어나길 기다린 것이다.

레이언은 힘겹게 왕좌에 앉아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흑안의 다크로얀이라 불리는 검은 흑발에 흑안을 가진 소드 마스터, 그가 자신의 딸을 지켜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날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위의 기사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로얀의 처형을 외치고 있었다.

레이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왕국을 떠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어째서 나를 찾아왔나?”

로얀의 지금 행동은 죽여달라고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

로얀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당당하게 서서 한 나라의 국왕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강한 뭔가가 느껴졌다.

레이언은 처음 로얀을 봤을 때부터 그가 정말 마음에 들어 공주의 짝으로까지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죄인으로 서 있었다. 정말 비통한 심정이었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후우우... 난 그 아이의 아비이기에 앞서 한 나라의 국왕이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라네.”

레이언은 사랑하는 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론 제국 황제의 생각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에 로얀의 말라버린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이론 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술렁였다. 감히 배신하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레이언이 손을 들어 술렁거리는 기사들을 진정시켰다.

“레나의 복수를 하려 하는가?”

그는 엘레나 공주의 애칭을 부르며 복수를 거론했다.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만은 로얀의 눈동자에 담긴 복수심을 알아본 것이다.

로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로얀에게 분노를 표하던 기사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어렸다.

“이곳에 온 건 복수를 허락받기 위함입니다.”

로얀의 말에 국왕 레이언은 턱에 손을 괴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허! 허락이라.......”

“.......”

“군사를 내어주겠다.”

그 말에 다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레이언은 주위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건 로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 두 사람만의 독대를 하고 있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그의 굳은 의지가 눈동자를 통해 레이언에게 전달되었다.

“음...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군.”

“폐하는 성군이십니다.”

로얀은 등을 돌렸다. 레이언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레나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있었군요.”

“자네가 죽는다면 내가 일어설지도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한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뚜벅뚜벅.......

술렁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얀은 대전을 벗어나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그의 몸에서는 죽은 자의 냄새가 풍겨 나와 무척 섬뜩했던 것이다.

팔란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 * *

끼이이......!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로얀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떠남을 새들이 배웅해 주는 것만 같았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 사이를 걷던 로얀은 길가의 큼지막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신비한 소녀를 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길게 기른 그 아이는 로얀의 배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의 어린 소녀로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데 소녀의 피부는 정말 눈부시도록 맑고 투명했다.

아기자기한 이목구비, 초롱초롱한 초록색 눈동자... 소녀의 모든 외모는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보다 귀여움이 물씬 풍겨 나오는 꼬마 아가씨였다.

소녀는 로얀이 다가오자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박사박.......

“어?”

그러나 로얀은 소녀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윽!”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소녀는 입을 부풀리며 성큼성큼 걸어가 로얀의 앞길을 막았다.

“이렇게 깊은 숲 속에 어린 소녀가 혼자 있는데 어쩜 그렇게 지나갈 수 있죠?”

스윽.

로얀의 손이 검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분홍 머리카락의 소녀는 당황했는지 토끼 눈 같은 눈동자를 흐렸다.

“그 망토를 만든 사람이 제 할아버지예요!”

소녀는 급히 손을 들어 로얀의 등을 가리고 있는 갈색 망토를 가리켰다. 그가 정말 검을 뽑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대장간에서 땅의 정령왕과 얘기를 나누던 소녀였던 것이다.

로얀은 검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 정령 노인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너도 인간이 아니군.”

소녀는 얼마 전 대장간에서 들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싸늘한 로얀의 음성에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래요! 전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라고 해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힌 레아라는 소녀는 로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어떤 판정을 기다리는 죄인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얀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용건이 뭐지?”

“아... 그게.......”

“경고한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라.”

사박사박.......

로얀은 레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레아는 자신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로얀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 손길을 피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쳇! 쳇! 치사해서 안 따라간다. 흥!”

화악!

“베에.......”

레아는 빛에 휩싸이면서도 로얀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한데 그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현재 로얀의 상황을 모르는 레아는 너무도 냉정한 그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휘리릭......!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낙엽만 바람에 날렸다.

로얀이 향하는 곳은 이론 제국의 수도 이시스였다.

그곳으로 향하는 그의 영혼은 조용히 타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이론이라는 황제의 목을 베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해도 혼자 이론 제국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얀은 지금 그렇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론 제국의 황제는 팔란 왕국이 쳐들어올 거라 확신하고 전쟁에 앞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소에는 지방에서 잘 움직이지 않던 몇몇 귀족들까지 자신들의 병사들을 이끌고 모조리 수도로 올라와 있었다.

이론 제국에는 5서클의 마법사 두 명과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거기다 제국의 수백, 수천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아무리 로얀이 성검과 마검을 지닌 중급의 소드 마스터라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면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엘레나... 나의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 * *

이론 제국의 수도인 이시스는 비옥한 토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였다.

팔란 왕국과 이론 제국의 경계에 근접해 있는 이시스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로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데 지금은 특히 이론 제국의 황제인 이론에 의해 큰 파티가 열리고 있었기에 여기저기서 모여든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당연히 제국의 궁전이었다. 이시스의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백색의 아름다운 성.

제국의 궁전은 이시스의 거대한 대로 정면에서 보였는데, 대로 양옆은 커다란 상점들로 가득했다.

그 거대한 이시스의 대로 위를 묘한 느낌의 사내가 걷고 있었다. 흑발에 흑안, 양 허리에 차여 있는 두 개의 검... 흑안의 다크로얀이라 불리는 로얀이었다.

다른 도시라면 이렇게 깊은 밤에는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을 테지만 이시스는 지금처럼 두 개의 달이 동그랗게 뜬 밤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만큼 치안 유지가 잘 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로얀은 이시스로 들어온 직후 제국의 궁전을 향해 직선으로 뻗은 대로 위를 걷고 있었다.

이시스로 들어서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다크로얀이라는 B급 용병패 대신 과거 그가 쓰던 시엔이라는 이름으로 된 B급 용병패를 내밀자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로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길을 피해 주었다. 저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로얀은 그저 걷기만 했다.

로얀의 눈동자에 거대한 제국의 궁전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창......!

“멈춰라!”

제국의 궁전답게 정문은 몇 대의 마차가 동시에 지나가도 될 만큼 거대했다. 그 앞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로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문 양쪽에서 창을 들어 엑스 자로 그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병사들 중에서 대장 격으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러자 로얀의 두 손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향해 나아갔다.

“이론의 목을 가지러 왔다.”

번뜩!

순식간이었다. 섬광이 비치더니 거구의 사내 가슴이 엑스 자로 그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궁전 앞을 적셨다.

큰 대로와 연결되어 있는 제국의 궁전 앞에서 갑작스럽게 살인이 일어나자 즐겁게 시장을 보던 사람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꺄아아악......!”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이시스의 하늘로 울려 퍼짐과 동시에 겁 많은 사람들은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아 대피했다. 하지만 그 수는 극히 일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기만 했을 뿐, 피하기는커녕 궁을 지키고 있는 병사를 죽인 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제국을 상대할 순 없기 때문이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너무도 놀라 자신의 직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 그들의 혼은 세상과 하직했다.

푸화화확!

로얀은 병사들의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 때보다 빠르고 힘이 넘치는 그의 검은 튼튼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나뭇잎 베듯 베어버렸다.

삐이이익......!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를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뚜벅뚜벅.......

로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투영된 커다란 문뿐!

우웅! 우웅!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푸른 오러를 뿜어내었다. 그와 동시에 로얀의 눈동자가 성문을 향해 예리하게 빛났다.

콰가가각!

쾅......!

푸른 빛 오러 블레이드의 물결에 거대한 성문은 종이처럼 구겨지며 박살이 나버렸다.

“꺄아아악......!”

“으아아......!”

그 놀라운 장면에 대로에 서 있던 사람들은 조금 전과는 달리 일제히 숨을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대로에 남은 건 간 큰 남자들이나 여행자, 용병뿐이었다.

저벅! 저벅!

쿵쿵쿵......!

로얀이 부서진 성문을 밟고 들어서니 육중한 무게를 가진 뭔가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그것의 정체는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기사들이 로얀을 둘러쌌다.

“정체를 밝혀라!”

“이론은 어디에 있지?”

로얀의 음성은 메말라 있었다. 아니, 메마름을 초월해 서늘한 냉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로얀이 황제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자 분노했다. 기사로서 다른 이가 자신의 주군을 욕보인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투구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얼굴을 분노로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가, 감히... 저자를 체포하라!”

일단은 체포해서 일의 배후를 밝혀야 했다. 혼자서 제국에 검을 들이대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쿵쿵쿵......!

무거운 갑옷을 걸친 백여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대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괴물 같은 소드 마스터였다.

로얀은 두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스거걱!

부우욱!

그의 푸른 빛 오러에 잘리지 않는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검은 마검과 성검이었다.

푸화확!

“끄아악......!”

풀 플레이트 메일을 전신에 둘렀건만 기사들은 무참하게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아니, 단단한 검조차 로얀의 검에는 종이 잘리듯 잘려 나갔다.

투구 사이로 죽어가는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아무리 휘둘러도, 아무리 죽여도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분노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노는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부우욱.

“크아악......!”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기사들의 몸 속을 구경하고는 가늘게 검신을 떨었다. 마찬가지로 기사들의 피를 머금은 에리오네도 검신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오네가 검신을 떠는 이유는 다크리온처럼 피에 취해서가 아니라 로얀에게서 느껴지는 슬픔과 분노 때문이었다.

지금 로얀이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은 은빛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한데 로얀의 검에 죽은 기사들이 벌써 50명이 넘어 푸른 잔디를 깔아놓은 궁전 입구가 피로 물들었다.

저벅! 저벅!

쿵쿵쿵......!

로얀이 죽인 것보다 몇 배나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왔다.

은빛기사단의 단장인 크루도는 제국의 다섯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으로 궁전의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머지 은빛기사단 2백 명을 모두 이끌고 로얀의 앞에 나타났다.

챙......!

투구 속에 가려진 크루도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쥐고 있는 거구의 사내였다.

우우웅......!

크루도의 바스타드 소드가 푸른 오러를 머금었다.

로얀은 크루도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들은 무조건 베어 넘길 뿐이었다. 그의 검은 기사들의 육체 사이를 누비며 피를 뿌리고 있었다.

쿵쿵쿵......!

크루도는 엄청난 무게의 갑옷까지 입은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로얀을 향해 뛰어갔다.

“크와왁......!”

그의 입에서 몬스터의 괴성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지금 평소 한 손으로 휘두르는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쥐고 휘두를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것이다.

로얀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몽둥이 같은 거대한 대검을 다크리온을 들어 막았다.

쾅......!

온 힘을 다해 휘두른 크루도의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끼릭, 끼릭.......

그리고 오러끼리 부딪치며 굉음이 흘렀다.

“......!”

크루도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자신의 검을 믿어지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바스타드 소드에 비하면 훨씬 작은 흑색 검이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상대는 그것을 한 손으로 쥐고서 말이다.

상대의 힘이 자신을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하직했다.

콰직!

로얀의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가 날카롭게 날아가 크루도의 머리를 꿰뚫었다.

단단한 은빛 투구를 뚫고 나온 에리오네는 드래곤의 비늘도 뚫을 수 있다는 듯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끄르륵... 어, 어떻.......”

머리에 에리오네를 박고 있는 크루도의 입에서 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쿵......!

그의 바스타드 소드가 지면을 울렸다.

푸확!

로얀은 에리오네를 크루도의 머리에서 빼내었다.

뎅겅!

그는 이미 죽은 크루도의 머리를 다크리온으로 날려버렸다.

스윽.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러나 정령 노인에게서 받은 망토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유리에 핏방울이 흘러내리듯 바닥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터벅!

주춤주춤.......

로얀이 한 발짝을 떼자 기사들의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로얀에게 겁을 먹은 기사들은 한 기사가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치는 소리에 마음을 바로잡았다.

“우린 제국의 기사들이다! 제국을 위해 목숨을!”

“와아아아......!”

쿵쿵쿵......!

로얀의 귀에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내뱉든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기사들 뒤편에 있는 거대한 문. 저 문을 넘어 좀더 들어가면 파티가 열리는 거대한 연회장이 있을 것이다. 황혼의 궁이라 불리는 거대한 건물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로얀은 파티가 열리는 곳을 사람들에게 물어 미리 알아왔다. 그곳은 성에서 파티를 열면 항상 사용하는 궁이라 사람들에게는 유명했던 것이다.

터벅터벅.......

로얀은 천천히 걸었지만 기사들은 미친 듯이 달려왔다.

스걱!

“끄아악!”

부욱!

푸화확!

로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피가 길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의 육중한 시체들이 달빛에 반짝였다.

“와아아아......!”

푸걱!

푸화확!

“크아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빛을 뿌리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뚜벅!

로얀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 제국의 궁전에 들어왔을 때 부쉈던 문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콰가가각!

쾅......!

역시나 문을 박살내 버린 로얀은 그 문의 잔해를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앞에도 뒤에도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철걱, 철걱!

역시나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지만 커다란 망토를 두른 제국의 근위대가 나타났다. 모두 2백 명. 그들 하나하나가 상급 검사의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었다. 도열해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요새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근위대의 기사들은 모두 4백 명이었지만, 나머지 2백 명과 근위대의 대장과 부대장은 황혼의 궁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적의 침입은 궁 안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단 한 명뿐이었기에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을 황제와 귀족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포는 필요없다. 죽여라!”

창......!

다른 기사들이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데 반해 혼자 푸른색 망토를 두른 한 기사의 말에 2백 명의 근위대는 일제히 검을 뽑았다.

로얀은 여전히 황혼의 궁만을 생각했다. 엘레나의 죽음으로 벌이는 파티... 용서할 수 없었다!

타탓!

로얀이 처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와아아아......!”

그의 움직임에 따라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부웅, 부웅.......

콰가가각!

그의 검엔 눈이 없었다. 그러나 로얀의 전신은 엄청난 속도로 휘둘리는 검에 의해 푸른 빛 막이 형성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근위대의 빨간 망토가 펄럭이며 이리저리 춤추었다. 망토의 최후는 출렁이며 지면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푸화화확!

타타탓!

로얀은 달렸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기사들... 이대로라면 황혼의 궁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자신이 지칠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궁 안을 뛰어다녔다. 어서 이론을 찾아 죽여야 했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덩달아 기사들의 시체가 쌓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타타탁!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나 휘둘렀을까? 로얀은 드디어 황혼의 궁 정문에 도착했다.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특히 왼쪽 다리에 깊은 검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기사들의 피와 그가 흘리는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혼의 궁은 정말 컸다. 한데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로얀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빛났고,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로얀의 심장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뛰었다.

“와아아아아......!”

“절대로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막아라!”

푸우욱!

콰가각!

로얀의 오러가 더욱 강하게 날뛰었다. 두 개의 검이 마구 울어댔다. 흠 하나 없던 그의 얼굴에도 자잘한 검상이 가득했다. 로얀은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하악, 하악, 후우욱.......”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쿵쿵쿵......!

황혼의 궁을 지키는 근위대 2백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중에는 기사단의 단장인 샤엘과 부단장인 레온이 있었다. 그 두 사람 모두 초급의 소드 마스터였다.

철벽으로 된 단단한 성벽처럼 도열해 있는 그들을 보며 로얀은 입을 열었다.

“죽인다. 반드시 이론의 목숨만큼은 가져가겠다!”

움찔!

그는 이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섬뜩하고 두려웠다.

푸른 망토를 두른 샤엘은 자신이 다 죽어가는 검사에게 잠시나마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외쳤다.

“죽여라!”

“와아아......!”

쿵쿵쿵......!

로얀은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황혼의 궁으로 향하는 계단은 꽤나 높았다. 그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웅웅.......

주인을 걱정하는 것일까? 성검 에리오네가 울었고, 마검 다크리온마저도 슬프게 울었다.

스윽.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로얀의 시야를 가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에 늘어선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모든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타타타탁!

그 틈을 타 피로 물든 백색 계단을 로얀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그의 혼백 속에는 백만 대군의 검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로얀은 양손에 들린 검을 눕혀 잡았다. 그 상태 그대로 그가 앞으로 나아가 날카로운 날이 기사들의 몸을 베었다.

부우욱.

촤아아악......!

“크아아악......!”

“하악! 후욱, 후욱.......”

샤엘과 레온을 비롯한 기사들은 갑작스런 로얀의 움직임에 실수로 길을 내주고 말았다. 로얀의 눈앞에 황혼의 궁의 문이 다가왔다.

콰가가각!

콰쾅......!

금빛 거대한 문을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단숨에 부숴버렸다. 피로 물든 그의 혼이 무섭게 빛났다.

“크아악......!”

로얀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을 반기는지 화려한 불빛이 그의 전신을 비추었다. 그의 몸에 묻은 피가 붉게 빛났다.

“꺄아아악!”

“으아아악!”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던 귀족가의 여인들과 남자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호의호식하며 자란 귀족들은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벌벌 떨었다.

음악이 멈추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는 입을 쩍 벌렸고, 그런 그를 로얄 나이트들이 둘러쌌다.

“뭣들 하느냐!”

로얄 나이트들 속에서 겁에 질려 고래고래 고함치는 황제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을의 대륙을 통일이나 한 듯 큰소리치며 술을 마시고 즐기던 황제가 지금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뚜벅뚜벅.......

뚝, 뚝!

로얀은 피를 흘리며 걸어갔다.

타타탁!

우르르.......

로얀을 따라왔던 기사들이 황혼의 궁 안으로 들어섰고, 황혼의 궁전 안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몰려왔다.

5서클의 마법사 두 명과 샤엘, 레온을 포함한 제국의 네 소드 마스터가 모두 나타났다. 크루도는 로얀에게 이미 목숨을 잃었기에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네 명뿐이었다.

로얀의 주위에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기사들과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5서클의 두 마법사의 손이 화염으로 빛났다. 그들의 행동에 로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들이 이곳에서 마법을 쓴다는 것은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황제 이론이 얼마나 겁에 질렸으면 황혼의 궁이 부서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도 마법의 사용을 허락했을까?

두 마법사의 입에서 궁 안을 울리는 음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불꽃이여, 폭발을 불러라. 파이어 볼!”

화르륵!

로얀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붉은 구체가 담겼다.

로얀은 마검과 성검을 들었다.

“두 개의 검은 성질이 워낙에 상극이라 부딪치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네.”

정령 노인의 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챙!

콰하하항......!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가 서로 부딪치자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여파에 두 개의 파이어 볼이 휩싸였다.

쾅!

쿠구구궁......!

거대한 폭음이 들려오고 황혼의 궁이 크게 흔들렸다.

스윽.

폭발의 여운이 지나가고... 로얀의 괴이한 눈동자가 로얄 나이트들 틈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 이론을 바라보았다.

이론은 섬뜩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르륵.

“쿨럭!”

로얀이라고 폭발의 여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 모두 뒤집힌 것만 같았다.

“어, 어서! 어서 죽여라!”

타탓!

이번에는 네 명의 소드 마스터가 날아올랐다. 군부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중급의 소드 마스터 샤이니어스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는 이론의 정복전쟁의 핵심인물이자 선봉에 섰던 대장군이었다. 공작의 위치에 올라 있는 그도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까깡!

샤이니어스의 푸른 오러와 로얀의 오러가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로얀은 샤이니어스와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에리오네를 들어 왼쪽에서 날아오는 샤엘의 검을 막았다.

까까깡......!

로얀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그의 몸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느려지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힘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고, 오러의 빛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번뜩!

샤이니어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촤악!

훙......!

다크리온을 쥔 로얀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샤이니어스가 그의 오른팔을 베어버린 것이다. 어깨까지 깨끗하게 잘린 로얀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비틀.

“으드득!”

로얀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물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고통에 찬 음성을 막았다.

푸푹!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엔 샤엘과 레온의 검이 그의 복부와 가슴에 박혔다.

“쿨럭! 크으윽.......”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자신의 품에 들어와 검을 박고 있는 레온을 향해 내리찍었다.

퍽!

“끄르륵.......”

레온의 머리가 위에서 턱 밑으로 뚫려버렸다.

푸화확!

로얀은 레온의 머리에서 에리오네를 빼내고는 비틀거렸다. 그리고 레온을 발로 차 밀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레온의 검은 로얀의 복부에 여전히 꽂혀 있었다.

샤이니어스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죽어라!”

그는 자신의 검을 들고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부우욱!

로얀의 허리가 그대로 이등분되어 버렸다.

푸화확!

끔찍한 광경... 로얀은 쓰러지면서 죽음에 대한 역겨움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하악, 하악...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쿠쿵.

로얀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눈을 부릅뜬 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려들 것만 같았다.

샤이니어스는 이미 허리가 두 동강 난 로얀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보고서야 안심했다. 그는 로얀의 손에 아직도 쥐어 있는 에리오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다크리온을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빛났다. 검을 잡은 기사에겐 검이 곧 목숨이었고, 뛰어난 명검은 가장 탐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과연 샤이니어스 공작이로군.”

샤이니어스는 이론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황제에게 로얀의 검을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황혼의 궁이 다시 화기애애해지려 할 때!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뛰었다.

[첫 번째 목숨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첫 번째 사슬이 풀렸다. 너는 강한 힘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이며, 네가 잃은 것은 생명을 해할 때 느끼는 인정이다.]

로얀에게만 들리는 전대 다크로얀의 목소리.

[불은 갈라져도 다시 타오른다. 물은 갈라져도 다시 흐른다. 바람은 갈라져도 다시 불어온다. 그 누구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다. 너의 영혼이 순리다. 너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휘오오오......!

황혼의 궁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로얀의 심장은 더욱 급박하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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