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슬픈 운명 (7/42)

6장 슬픈 운명

슬픈 운명

엘레나를 등에 업은 로얀은 왕성 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정문으로 들어갔다가는 소란스러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큰 소란은 정신을 잃고 잠든 엘레나에게 해만 될 뿐이었다.

왕성으로 무사히 들어간 로얀은 그 길로 엘레나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그는 공주가 머무는 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왕성을 돌아다니는 시녀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로얀이 지나가는 시녀를 붙잡았다. 마침 그 시녀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시녀 중 한 사람이라 그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엘레나가 머무는 궁으로 갈 수 있었다. 당연히 시녀의 뒤에서는 로얀의 검이 번뜩이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의 궁이 보이면 시녀에게 궁을 가리키라고 말했다. 시녀는 그의 말을 충실히 지켜 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손가락으로 궁을 가리켰고, 더 이상 그녀가 필요 없어진 로얀은 그녀를 기절시켰다.

창문을 통해 무사히 엘레나의 방으로 들어간 로얀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놓은 뒤 조용히 왕성을 빠져나갔다.

* * *

끼루룩......!

아침을 반기는 새들이 재잘거리며 노래했다. 그 소리에 엘레나는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오, 오빠!”

엘레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의 작은 가슴이 들썩였다. 한데 그녀의 눈동자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소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희미하게 보이는 입술로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아주 작아진 엘레나는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 강한 빛과 함께 그 소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어째서 잠에서 깨면서 오빠라고 외쳤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조금 전 꾸었던 꿈을 생각하던 엘레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얀의 모습은 그녀의 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일까?’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같이 있으면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 함께 걸으면 즐거워지는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로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잔혹한 흑안의 검사라고 불렀지만 그녀에겐 그 어떠한 햇살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엘레나는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사랑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로얀의 옆에 있고 싶었고 지친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엘레나는 힘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시녀들이 다가왔다. 시녀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시녀는 바로 로얀이 지난밤 기절시킨 여인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사들에게 흑안의 다크로얀이 공주님을 들쳐 업고 왕성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기사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흑안의 다크로얀이 무엇 때문에 다시, 게다가 어떻게 공주를 들쳐 업고 왕성에 나타났단 말인가?

또한 확인해 본 결과 엘레나는 자신의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거짓을 고한 시녀는 그 죄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엘레나가 석방시켜 주었지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축 처진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다. 파티의 주인공이 자신인 이상 파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늘만큼은 꼭 참석해야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선 엘레나는 눈앞의 누군가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의 두 배는 되는 듯한 커다란 키의 청년.

“흑, 오빠.......”

로얀을 본 엘레나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에게 다가온 엘레나가 품에 안기자 로얀은 그녀의 여린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들은 그 모습에 몸이 굳었지만 그 누구도 로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엘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가 로얀 바로 그였다.

* * *

두 개의 달이 허공에 뜨고 어둠이 대기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팔란의 시장에는 여전히 마차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공주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 때문이었다.

성정이 곧고 어진 왕으로 이름 높은 레이언은 후실을 두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공처가였던 것이다.

엘레나를 낳으면서 숨을 거둔 왕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레이언에게 자식이라고는 엘레나 한 명뿐이었다. 그렇기에 팔란 왕국의 지방 귀족들까지도 엘레나 공주를 꼬드기기 위해 급히 수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엘레나 공주의 마음을 훔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얼굴 도장이라도 찍기 위해 급히 수도 팔란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엘레나의 호위기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연회장으로 가면서 한 마지막 말이 생각나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밤 엘레나를 방 안에 눕혀 놓고 왕성을 빠져나왔다가 아침 일찍 다시 왕성 안으로 들어가 국왕 레이언을 만났다.

국왕을 만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로얀이 자신의 이름을 대고 만나기를 청하자 기사는 놀란 얼굴로 국왕에게 그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자 국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당장 로얀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국왕 레이언이 있는 곳으로 간 로얀은 그에게 엘레나의 호위무사가 되길 청했고, 레이언은 그의 청을 수락했다. 천 명의 호위보다 로얀 한 명이 훨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얀은 일단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이상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고, 드래곤은 몇천 년을 사는 생물이라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백 년이니까.

“멈추시오.”

연회장 입구를 지키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기다란 창으로 로얀의 앞을 막았다. 누더기처럼 보이는 망토를 걸친 긴 흑발의 로얀은 상당히 수상해 보였으니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그를 가로막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령 노인이 준 망토는 갈색 중에서도 바닥에 있는 흙과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망토를 몸에 두르고 흙더미 위에 있으면 엄청난 위장술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볼품은 없어 지금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을 향해 로얀은 왕이 주었던 금으로 된 패를 보여주었다. 그 패는 왕이 친히 하사한 것으로 왕족이나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패였다. 한마디로 일급 신분증이었다.

“흠흠! 연회장 내로 들어가시려면 검을 맡겨주십시오.”

“팔이 탈지도 모른다.”

로얀의 섬뜩한 말에 병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말은 곧 팔이 잘릴 거라는 소리로 들렸고, 그것은 엄연한 협박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진땀을 빼고 있는 그 병사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헉! 흑안의 다크로얀!”

헛바람을 들이켜며 놀란 외침을 토하는 병사를 뒤로하고 로얀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도 놀라 미처 막지 못했던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그를 뒤쫓진 않았다.

무서웠다. 하룻밤 사이에 악명 높은 유령해적단을 궤멸시킨 장본인... 아직도 그가 왜 B급 용병이었는지에 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소드 마스터인 해적왕 라이던마저 죽인 인물이었다.

그가 하룻밤 사이에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천 명. 물론 서로가 서로를 죽여 쌓인 시체의 수를 포함해서였지만 사람들에겐 그가 단신으로 그 모두를 죽였다고 알려졌다. 또한 해상전에서 해적함선 중 대장선을 박살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 사실은 살아 돌아온 용병들과 단풍기사단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보수와 작위를 모두 마다한 그가 갑자기 왜 공주의 호위기사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엘레나 공주의 미모에 반해 그랬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소문의 주인공인 로얀을 일개 병사 따위가 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연회장 내로 들어선 로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한 향수 냄새와 사람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뚜벅뚜벅.......

미끈한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로얀은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갑작스런 로얀의 등장에 연회장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이 멈췄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움직임도 함께 멈췄다.

두 개의 검을 허리 양쪽에 찬, 검은 머리에 흑안을 가진 남자... 팔란 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흑안의 다크로얀이었다.

로얀의 눈에는 동물처럼 여기저기 무리 지어 모여 있는 귀족들의 모습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엘레나 폰 크라우드, 레이나를 너무도 닮은 소녀... 실제 레이나의 모습과는 다르다지만 그 느낌만은 똑같았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면서 본 엘레나의 모습은 새장에 갇힌 새 같았다. 그녀는 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지만 로얀에겐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뚜벅뚜벅.......

로얀이 걸어오는 것을 본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오늘 아침 로얀이 자신의 호위기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마치 최고급 신성마법을 받은 듯 다시 예전처럼 활달해졌다.

엘레나는 로얀에게 이번 파티에 파트너로 참석해 줄 것을 청했지만 그는 그 부탁을 단박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로얀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그의 답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밤이 되었고, 엘레나는 당장 파티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엘레나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 로얀의 태도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뒤돌아 서며 한마디를 내뱉고 가버렸다.

“오늘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형처럼 웃어야겠지... 하아! 갑자기 파티장에서 눈물이 나오면 어쩌지.......”

이 말은 로얀의 머릿속 깊이 새겨졌고, 그가 파티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덥석.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허락없이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연회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꽤나 높아 보이는 귀족의 모습이 로얀의 눈에 비쳤다. 보석이 치렁치렁 달린,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목을 날리기 전에 꺼져.”

주춤.

뼈까지 시리도록 섬뜩한 로얀의 음성에 당당히 나섰던 그 남자는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뚜벅뚜벅.......

로얀은 그대로 엘레나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구, 국왕폐하!”

로얀이 있을 때에는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원성이 갑자기 빗발쳤다.

가장 상석에서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국왕 레이언은 자신의 딸인 엘레나가 로얀에게 끌려(?) 갔지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험! 음악이 왜 끊겼는가? 어서 다시 파티를 시작하라.”

“폐, 폐하.......”

국왕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본 귀족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왕이 그렇게 말했으니 조용히 파티나 즐길 수밖에.......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잡고 연회장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밤이라 꽃들이 빛을 뿌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놓고는 몇 발짝 떨어져 섰다. 그런 그를 보는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절 이리로 데리고 오신 이유가 뭐예요?”

“아까 말한 것이 이런 뜻 아니었나?”

“흠흠! 전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었다고요.”

그의 싸늘한 말에 엘레나는 심술이 났는지 본심과는 다른 말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럼 다시 데려다 주지.”

로얀이 손을 내밀자 엘레나는 급히 말을 꺼냈다.

“이미 오빠가 연회장을 한바탕 휘저어 놨는데 또 가면 어떡해요?”

“.......”

그 말에 로얀이 손을 거두려 하자 엘레나가 얼른 그것을 붙잡았다.

“저를 위한 파티였는데... 책임지세요.”

혀를 빠끔히 내밀며 말한 엘레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로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로얀에게 춤을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경악할 노릇이었다. 일국의 공주인 그녀가 할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얀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넌 공주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행동은 전혀 아니잖아요.”

확실히 로얀의 행동은 무례를 넘어 범죄에 가까웠다. 반말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평범한 여인에게 해도 범죄가 되는 행동을 공주인 엘레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로얀은 그녀의 막 나가는(?) 행동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난 춤을 춰본 적이 없다. 차라리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이 있다면 말해.”

그는 문득 전쟁터에서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탈출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보다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요?”

“오늘밤 안에 처리해 주겠다.”

엘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손을 잡았다.

“피이... 그냥 이걸로 할래요. 오빤 그냥 발만 맞춰줘요.”

엘레나의 환한 미소를 뒤로하고 로얀과 엘레나는 달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다. 그들의 추억을 밤하늘에 뜬 두 개의 달과 촘촘히 박힌 별들이 관중이 되어 지켜보았다.

이 일을 기점으로 로얀과 엘레나는 좀더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로얀은 하늘을 지붕 삼아 엘레나가 묵는 방의 지붕 위에서 지냈다. 그들의 묘한,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커다란 건물 안에 로얀의 방으로 배정된 곳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번도 자지 않았다. 눈을 가지게 된 이상 밖에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얀과 엘레나는 이런저런 추억을 쌓았고, 떠오르는 태양과 사라지는 석양을 수차례 함께 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 어느덧 로얀이 왕성에서 지낸 지 석 달이 되었다.

* * *

“오빠!”

지붕 위에서 푸른 하늘을 보고 있던 로얀은 밑에서 들려오는 맑은 음성에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나였다. 세상에서 그를 오빠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엘레나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타탁.

로얀은 지붕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지난 석 달 동안 항상 이렇게 지냈기에 로얀은 싫은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그저 엘레나가 이끄는 대로 다녔다.

엘레나는 로얀에게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맹인이었다는 것도 들었다.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이 안 보이는 맹인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눈이 없는 것과 눈은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눈은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래도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주지만 눈이 없는 사람은 괴물로 여겨 고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을 산책하는 것은 로얀과 논다는 의미보다는 그에게 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더 컸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기에 로얀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석 달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로얀의 머리카락은 하나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였다. 찰랑거리는 부드러운 흑발... 로얀의 외모는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지만 성의 시녀들은 그를 호감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눈동자는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상당히 섬뜩하게 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해적들을 목각인형 베듯 천 명을 베었다고 말이다.

엘레나와의 생활은 항상 아침 일찍 성을 산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엘레나가 여러 가지 수업을 받을 때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밥을 먹을 때에는 항상 함께했다.

공주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후 지금까지 이론 제국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황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 제국의 침략전쟁을 멈추게 한 교황이 봄의 대륙으로 돌아간 이상 이제 곧 팔란 왕국을 향해 시꺼먼 손길을 뻗칠 게 틀림없었다.

로얀이 엘레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시작한 지 딱 석 달째 되는 날은 두 개의 달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날이었다.

엘레나가 머무는 궁전은 많은 나무와 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 맑은 물이 노래를 부르는 분수대가 있는 곳은 항상 엘레나와 로얀이 달을 구경하는 곳이었다.

분수대에 비친 두 개의 달이 흐르는 물에 흐물거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로얀은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달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

분수대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조금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항상 자러 가기 전에 투정을 부렸지만 오늘따라 더욱 완강하게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로얀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녀를 끌고라도 방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로얀은 오늘따라 유독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때, 로얀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눈 감아.”

아무리 친남매처럼 지내는 엘레나와 로얀이었지만 그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자 다 큰 남녀였다.

두근두근.......

엘레나의 심장이 보통 때보다 크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파핫!

부우욱!

후두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던 엘레나의 귓가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너무 궁금해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

그녀의 동그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로얀은 두 개의 검을 양손에 뽑아 들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검은색으로 색칠한 예리한 검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엘레나를 노리고 이곳에 잠입한 암살자들이었다. 그 세 명은 옷으로 보나 무기로 보나 어쌔신 같았다. 이곳까지 잠입해 들어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어쌔신임을 알 수 있었다.

로얀 바로 앞에는 토막토막 잘린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 엘레나를 죽이려던 어쌔신들의 시체였다.

참혹한 광경을 본 엘레나는 조금 전 로얀이 왜 눈을 감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흑섬에서 더 참혹한 광경을 봤던 그녀였지만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 감아. 오늘 밤 악몽 꿀 생각이 없다면.”

로얀의 말에 엘레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우웅.......

“소, 소드 마스터였나!”

로얀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맑은 검명을 토해 내며 푸른색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팟!

로얀은 엘레나를 위해 이자들을 빨리 처리하기로 했다.

휙!

그의 미간으로 작은 단도가 날아들었다.

깡......!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가볍게 휘둘러 그것을 쳐내고는 단도를 날린 상대를 다크리온으로 수평으로 갈라버렸다.

로얀에게 암기는 통하지 않았다. 소리까지 죽여 날아오는 암기가 아니라면 그의 귀를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파팟!

로얀의 실력을 안 나머지 두 침입자는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헤이스트라도 몸에 건 듯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다. 하긴, 일국의 공주를 암살하는 일에 고작 다섯 명이 왔으니 그만큼 실력도 굉장할 것이다.

우웅......!

에리오네가 푸른 오러를 뿌렸다.

“헉! 두, 두 개의 오러!”

부욱, 부욱!

촤아아......!

붉은 비가 아름다운 정원에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로얀의 손놀림은 왠지 더 빨라진 듯했다. 성검과 마검의 힘이었다.

떨어지는 암살자들의 시체를 보며 로얀은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시험해 보는 검의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생긴 것에 비해 상당히 가벼웠고, 적을 벨 때 손에 흘러 들어오는 느낌도 좋았다.

스윽.

로얀은 묘하게 자신의 몸을 움찔거리게 만든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높이 솟은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는 흑색 까마귀가 눈에 띄었다.

푸드득!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검은 까마귀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까마귀가 왠지 꺼림칙해 죽여버리려던 로얀은 엘레나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피를 볼 만큼 본 그녀에게 죄없는 동물의 피까지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했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엘레나는 그대로 로얀에게 다가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작은 떨림이 로얀에게 전해져 왔다.

“나... 오빠를 사랑하면 안 돼?”

흠칫.

쪼르륵.

분수대의 맑은 노랫소리에 맞추듯 엘레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오늘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도 아직 이 사랑이 이성을 향한 사랑인지 가족을 향한 사랑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엘레나도 로얀이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단지 그녀가 그의 죽은 동생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얀의 마음이 어떻든 엘레나에게 있어 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하지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위의 광경은 참혹했지만 로얀은 엘레나의 갑작스런 말에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날 좋아해도 되지만 사랑하지는 말아줘.”

스윽.

엘레나는 로얀의 품에서 벗어났다.

“헤헤! 저 자러 갈래요. 방금 제가 한 말은 모두 잊어주세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떨림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렇게 말한 엘레나는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로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위에 널브러진 암살자들을 둘러보았다. 뒤처리를 해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붉은 고깃덩어리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 * *

이론 제국의 황제인 이론 폰 클라스.

초대 황제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야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인물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가을의 대륙의 통일이었다.

십여 년 동안 치밀한 전쟁 준비를 마친 그는 주위의 작은 왕국부터 하나하나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란 왕국과 작은 왕국 두 개만 남게 되었다. 드디어 대륙 통일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의 나이 45세. 아직도 혈기왕성한 그는 두 개의 작은 왕국은 무시하고 이론 제국 다음으로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팔란 왕국을 치기로 했다.

이론 제국의 수도인 이시스는 팔란 왕국과 이론 제국의 국경 근처에 있었기에 치러 가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하, 지, 만!

갑자기 끼어든 교황이라는 작자가 황제인 이론의 심기를 마구 흩뜨려놓았다. 한참 대륙 통일의 꿈에 부풀어 있던 그에게 교황이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이론 황제는 봄의 대륙에 있는 교황이 가을의 대륙으로 왔다는 소식과 함께 전쟁을 멈추라는 전서를 받은 것이다. 교황은 이유없는 살생이라며 전쟁을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칸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교황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칸 대륙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제국의 황제라도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컸다.

대륙을 통일한다고 해도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껍데기뿐인 통일이었다.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같은 신을 믿고 있는 다른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시름하던 이론은 팔란 왕국이 가을의 대륙의 거의 모든 바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도 전쟁만큼은 하지 않는 바보 같은 팔란 왕국의 왕이 딸만큼은 지독하게 아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간은 가고 교황의 시선 아래 다급해진 이론 황제는 팔란 왕국의 골칫거리인 유령해적단의 라이던을 이용하기로 했다. 엘레나 공주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조사를 통해 알아냈기에 해적과 계약을 맺을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일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라이던에게 바다로 나들이 나온 공주를 공격하여 죽이라고 했지만 빌어먹을 라이던이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레나 공주를 공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라이던이 갑자기 엘레나를 잡아 가두고는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이론 제국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공주를 죽여주겠다고 했다.

이론 제국의 황제는 큰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일단은 레이언을 움직이고 보자는 생각에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교황이 눈치 채기 전에 어서 빨리 공주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하나 라이던이 엘레나 공주를 죽이기 전에 이론 제국의 계획은 로얀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이론 제국의 황제가 라이던의 요구를 수락하는 전서를 보내려던 바로 그날, 해적들은 모두 죽었고 엘레나 공주는 무사히 구출된 것이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이론 황제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가을의 대륙에 있던 교황이 봄의 대륙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쟁같이 큰일을 벌이면 아무리 봄의 대륙에 있는 교황이라 해도 눈치를 챌 것이기에 결국 부릴 때마다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어쌔신 길드에게 엘레나 공주의 암살을 의뢰했다.

어쌔신의 제일 덕목은 의뢰자의 신상에 관한 것만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공주 암살 사건에 대한 것을 설사 교황이 눈치 챈다 하더라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증거가 없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이론 제국의 흉계임을 짐작할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 팔란 왕국의 국왕도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론 제국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쳐들어온 팔란 왕국을 부숴버린 뒤 반격이라는 명분으로 팔란 왕국을 완전히 삼켜버린다는 것이 황제 이론의 완벽한 계획이자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무슨 원한을 졌는지 떠났다던 그 이상한 괴물이 갑자기 돌아와 호위기사를 자청하고 엘레나 공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론 황제의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사전에 그런 실력자가 있다는 말을 안 했다는 이유로 의뢰를 실패한 어쌔신 길드는 돈을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

황제 이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어쌔신 길드 마스터와 반짝이는 머리에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는, 음흉하게 생긴 꼽추가 서 있었다.

이론의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 괴물이 소드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1급 어쌔신이 다섯 명이나 되지 않았나?”

“그는 두 개의 오러를 썼습니다. 또한 그에게 암기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1급 어쌔신이라고는 해도 특기인 암기를 모조리 피해 내는 괴물 같은 중급의 소드 마스터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주, 중급... 끙.......”

이론 황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제국에도 중급 소드 마스터가 몇 명 있었기에 그 힘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론의 얼굴에 잔잔한 주름이 퍼졌다.

“흐흐흐... 황제폐하.”

“뭔가, 멀로?”

이론 황제는 꼽추 노인의 쇠 끌리는 듯한 기괴한 음성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연금술사를 배척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연금술사를 받아들였다. 멀로라 불린, 반짝이는 머리의 꼽추가 바로 궁정 연금술사였다.

“황제폐하께서 명하신 그것이 완성되었습니다.”

“뭐, 뭣이라!”

그 말에 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멀로의 두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런 그의 반응에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어쌔신 길드는 암살과 정보, 두 가지를 다루는 길드인 터라 대륙의 어지간한 일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지만 지금 황제와 멀로가 하는 말은 그 길드 마스터조차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제국에서 극비리에 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멀로는 황제의 격렬한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그, 그것이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한번 만들어봤다면 대량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혹 연구 비용이 모자란 건가?”

“아닙니다. 그 물건이 완성되었지만, 홧김에 여러 가지를 마구잡이로 넣다가 완성된 것이라.......”

“흠... 그럼 성분을 연구하면.......”

이론 황제의 말에 멀로는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워낙에 위험하고 신비한 물건인지라 그것은 불가능할 듯합니다.”

“끙... 그렇다면 그것을 그 괴물 같은 다크로얀이라는 녀석을 죽이는 데 사용해야겠다.”

“헉!”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 고작 그런 곳에 쓴다고 하니 멀로의 눈이 떨렸다. 비록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것을 허비해 만든 물건이 겨우 정체불명의 사내 하나를 제거하는 데 쓰일 거라는 황제의 말을 들은 멀로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멀로의 떨림에 이론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운가?”

“아, 아닙니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시간이 없어.”

이론은 멀로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어쌔신 길드 마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서 이번 일을 해줬으면 하는군. 역시나 1급 어쌔신으로 다섯 명. 의뢰 내용은 좀 다를 거네.”

“알겠습니다, 황제폐하.”

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의뢰 요금을 왕창 받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황제 이론과 멀로, 그리고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로얀과 엘레나가 머물고 있는 궁에서는 여전히 로얀만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어쌔신의 침입이 있었다는 것을 알렸지만 왕은 공주에 대한 호위를 보강하지 않았다. 그만큼 팔란 왕국의 국왕이 그를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늘도 로얀과 엘레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일주일 전 그날, 수줍은 소녀의 고백이 있었지만 엘레나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로얀을 대했다. 그날의 일을 완전히 잊은 듯한 그녀의 행동에 로얀은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성을 나가 마을을 구경하고 왔다. 때문에 밤이 깊어지자 피곤했는지 엘레나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로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쏴아아......!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바다의 파도소리를 연출했다.

쏴아......!

로얀이 문득 팔을 들어 엘레나의 얼굴을 나무에 기대게 하려 했다. 그 바람에 눈을 뜬 엘레나는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가운데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자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스윽.

“적이다. 저번처럼 다섯 명.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싫어요. 오늘은 오빠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안 잘 거예요.”

엘레나의 투정에 로얀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흩트려놓고는 두 개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파파팟!

역시나 나타난 인물들은 검은 복장을 한 어쌔신 다섯 명이었다. 지난번에 왔던 인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자들... 로얀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번과 같은 수준의 어쌔신을 같은 수로 보낼 정도로 이론 황제가 미친놈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얘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창......!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는 검을 힘주어 뽑았다.

타타탓!

어쌔신 네 명이 일제히 로얀을 향해 날아왔다. 풀잎을 스쳐 지나가는 엄청난 속도였다.

채챙......!

부우욱!

그들의 발이 빠르다면 로얀의 검은 허공을 날아다녔다.

엘레나는 로얀이 싸우는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걱정되는 한편 사람들이 죽는 모습이 무서웠기 때문에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엘레나의 눈동자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어쌔신에게로 향했다. 로얀에게 덤비지 않은 그 어쌔신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었다.

유리병을 불신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어쌔신은 고개를 젓더니 다른 손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타타탓!

그러자 어느새 네 명에서 두 명으로 줄어든 그들이 휘파람을 분 어쌔신 뒤로 몸을 날렸다.

“너희들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로얀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후후후... 잘 가라, 다크로얀.”

퐁!

유리병을 들고 있던 어쌔신이 병마개를 따고는 그것을 로얀을 향해 던졌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길드 마스터가 유리병을 주면서 말해 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름은 없다. 단지 상급의 소드 마스터도 죽일 수 있는 액체라는 것, 또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도 상당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죽음의 물약이라고만 했다. 물건은 녹지 않으나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대로 빛이 되어 부서져 버린다고 멀로라는 꼽추가 말하더군.”

로얀은 피하지 않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유리병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저 맹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바디 체인지를 한 그는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로얀의 뒤에서 그 액체를 바라보고 있던 엘레나는 문득 지난날의 꿈이 생각났다. 그리고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소년이 지금의 로얀과 겹쳐 보였다.

팟!

그의 옆을 지나 검은 그림자가 흘러갔다.

스윽.

로얀은 몸을 돌려 뒤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를 베려 했다. 엘레나가 갑자기 뒤에서 뛰어들어올 줄 몰랐던 그는 다른 어쌔신이 등 뒤에서 자신을 덮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멈칫!

그의 검이 멈추었다. 엘레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멈춰버린 그의 검을 지나 그녀의 몸은 로얀 앞에 섰다.

촤락......!

퉁, 데구루루.......

로얀의 눈앞으로 긴 보랏빛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석 달 동안 매일 함께 있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유리병에서 나와 엘레나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아니, 옷에 묻자마자 액체는 증발을 했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박사박.......

가을의 대륙답게 공주의 정원에도 낙엽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엘레나는 낙엽을 밟으며 로얀을 향해 걸어왔다.

와락!

그녀는 얼굴을 로얀의 품에 묻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몸이 이상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녀의 음성이 로얀의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오빠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난 오빠를 사랑할래. 미안.......”

파직!

그 순간, 엘레나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듯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와락!

로얀은 자신의 품안에서 부서지는 엘레나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의 입술도 눈동자도 떨려왔다.

부스스슥.......

그러자 원래부터 반짝이는 가루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그녀의 몸은 별빛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휘오오!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어 엘레나의 빛을 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름다운 별이 허공에 뿌려졌다.

엘레나의 부드러운 옷을 안고 있던 로얀의 음성이 떨려왔다.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었다.

“으, 으으아아아......!”

콰가가강!

성검이 가늘게 떨고 마검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파핫!

로얀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번뜩!

멍하니 서 있던 세 명의 어쌔신들은 모두 핏덩이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흐르는 피를 밟고 허공을 수놓은, 엘레나가 만든 별을 보던 로얀은 그 별을 잡으려고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만 저었을 뿐이다.

챙강.......

성검과 마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크흐흑! 으아아아아......!”

비통한 로얀의 음성이 성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또다시 잃어버렸다. 또다시 몸조차 지켜주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또다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