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어둠 속에서 천 명을 베다
어둠 속에서 천 명을 베다
메리슨과 사람들은 아직도 막사 안에 모여 앉아 있었다.
막사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단풍기사단의 절반이 죽은 지금 이 인원으로 해적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용병들은 돈을 받고 이 일에 고용됐으니 책임감 같은 게 없었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팔란 왕국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 공주를 구출할 결심을 하고 있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했다.
기사들이 생각한 것은 전면전이 아닌 몰래 소굴로 침투하여 공주만 빼내는 것이었다.
공주가 있는 곳은 이제 몸을 회복된 세리나가 졍령을 소환하여 알아볼 수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안으로 침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적들의 소굴은 마왕의 성처럼 솟아 있는 돌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세리나가 실프를 소환해 알아보니 역시나 공주는 해적 소굴의 가장 중심부에 있었고, 지키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자신들이 해적들의 이목을 끌 동안 용병들과 메리슨이 공주를 구하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메리슨은 그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말이 이목을 끄는 것이지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처음에 흑섬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이 정도 인원이면 해적쯤은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해 보자 상황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기사들의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들이 실행할 수 있는 작전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작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메리슨은 기사단장 레토를 보며 눈을 감았다.
‘정녕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인가?’
터벅터벅.......
그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막사의 입구가 열렸다.
“엇!”
들어온 사람을 보고 가장 반긴 건 레토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로얀이었던 것이다.
흠칫.
레토는 어정쩡하게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어! 안녕하쇼?”
로얀의 뒤를 이어 한 남자가 들어왔는데 그는 해적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토는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이 없자 안도하며, 해적으로 보이는 자의 인사를 무시한 채 로얀을 향해 물었다.
“첩자를... 잡아온 것입니까?”
“처, 첩자라니! 어딜 봐서 내가 해적 같다는 거야!”
얀이 발끈해 외쳤다.
“어딜 봐서라니.......”
레토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얀의 전신을 훑었다.
“이, 이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은 거라고.......”
“일?”
“도둑질이지.”
레토가 의아해 하며 묻자 로얀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도둑질이라니!”
격렬한 얀의 반응을 뒤로하고 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람은 누구죠?”
“친구.”
로얀의 짤막한 대답에 모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오오오!”
얀이 로얀을 제치고 나와 세리나의 손을 잡았다.
덥석!
흠칫.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하하, 전 얀이라고 합니다. 용병 세계에선 은빛 여우라고 불리고 있죠. 나이는.......”
스릉.......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레토가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얀이 로얀의 친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 손을 잡힌 세리나가 당황하자 기사도가 발동해 자동적으로 검을 뽑은 것이었다.
“자네 너무 무례하군!”
“쳇! 나한테 이러면 안 될 텐데요?”
얀은 이들의 상황을 로얀을 통해 상세히 들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메리슨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무슨 말인가?”
“당신들은 공주님을 구하러 왔지만 기사단 절반이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죽는 바람에 마땅한 방법이 없어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요?”
레토는 검을 넣고 로얀을 살짝 쏘아보았다. 그런 얘기까지 했냐는 의미였다. 그의 입장에선 얀은 제삼자였고 아무리 로얀의 친구라고 해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흐흐! 저에게 공주님을 구하는 건 물론이고 해적들을 몽땅 죽일 수 있는 묘책이 있는데.......”
“뭐!”
얀의 말에 로얀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특히 메리슨과 레토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험험! 일단 앉아서 말하죠.”
얀은 누가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의자를 빼내서 세리나 옆에 앉았다. 로얀도 얀의 건너편인 레인 옆에 앉았다.
“저 녀석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가능합니다.”
얀은 로얀을 힐끔 쳐다본 후 자신의 묘책에 대해 말했다.
먼저 얀과 엘프인 세리나가 물의 정령을 소환하여 해적 소굴에 있는 모든 불빛을 없앤다. 여기서 불빛이란 해적 소굴을 비춰주고 있는 화톳불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의 정령으로 모든 불빛을 없앤 후 음유시인인 렌이 힘을 발휘해 달을 구름으로 가린다. 다행히 하늘에 구름이 간간이 보이니 렌이 구름을 조금만 몰고 와 두 개의 달을 가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한 희미하고 작은 구름이라도 달빛을 조금만 미약하게 만들면 된다고 얀은 덧붙여 말했다.
메리슨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 불빛을 모두 없애서 뭘 하자는 겐가?”
“훗! 그런 후 로얀을 들여보내 몽땅 죽여야죠.”
쾅......!
“지금 장난치는 건가!”
레토가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다. 불빛을 다 꺼트린 후 로얀을 투입시킨다니! 아무리 로얀이 강해도 그 또한 어둠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해적들은 천 명이 넘었다.
“자자, 진정하고 자리에 앉게나.”
메리슨이 연장자답게 레토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혔다. 실제 나이는 세리나가 훨씬 많았지만.......
레토의 반응에 얀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그렸다.
“이 방법이 아니면 공주님을 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해적왕은 소드 마스터라고요.”
세리나는 엘프답게 얀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진실함을 집어내었다. 이것은 엘프의 특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얀의 말에 거짓이 없다 해도 그것은 상식적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하긴 한가요?”
“물론! 그리고 내 친구는 어둠 속에서도 해적들이 보이거든요.”
얀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마음에 걸렸지만 메리슨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당사자인 로얀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뜻은 친구의 말이 옳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라 볼 수 있었다.
“알겠네. 로얀 군은 어떻게 하겠나?”
“메리슨님!”
레토는 그런 황당한 작전을 말리려 했지만 메리슨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
“해보죠.”
로얀의 짧은 대답에 메리슨은 다시 한 번 수염을 쓰다듬었다.
로얀이 더 이상의 질문을 꺼리는 것 같아 메리슨은 얀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뭘 준비하면 되겠나?”
“해적 소굴 주위로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으십시오. 소굴에서 도망쳐 나오는 해적들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아! 어둠 속에서는 친구 녀석의 검에 눈이 없으니 밤에 아군을 표시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표식이라면 걱정 말게나. 마법으로 투구나 갑옷에 살짝 표시해 두면 어두운 곳에서 빛날 테니까 말일세.”
작전이 대충 짜여지자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낀 레인이 손을 들었다.
“난 뭘 하면 되겠나?”
“헌터시군요.”
끄덕.
“그냥 구경이나 하세요.”
“.......”
레인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에 화살을 날린 순 없었다. 그러다 같은 편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싸움에서 그의 역할은 없는 것이었다. 레인은 밀려오는 소외감에 몸을 떨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시작하죠.”
“지금 말인가?”
“구름도 적당히 깔렸고, 오늘밤이 딱 좋습니다.”
얀이 웃으며 막사를 나가자 로얀도 몸을 일으켰다.
“렌은 내가 깨우겠습니다.”
그가 막사에서 나가자 메리슨이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난 왠지 로얀이라는 친구가 일을 낼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먼. 레토 자네도 그럴 것 같지 않은가? 허허허......!”
그러면서 메리슨이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마법으로 표식을 해주기 위해 막사를 나서자 그 뒤를 따라 세리나와 레토, 기사단의 부단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레인을 홀로 남겨두고 막사 밖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레인의 어깨 위로 사람들이 나갈 때를 틈타 막사 안으로 들어온 쌀쌀한 바닷바람이 내려앉았다.
* * *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이 어디 있어요!”
렌은 검은 바위 위에 서서 로얀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렌은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다가 로얀이 깨워 해적 소굴이 보이는 이곳까지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전을 들은 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세운 사람이 도대체 누구예요!”
렌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레인을 향해 묻자 레인은 얀을 쳐다보았다.
“으하하하! 이 천재님이 세웠지.”
“아저씨 이거죠?”
렌이 얀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들어 귓가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빡!
렌의 뒤통수에서 경쾌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어른에게 못 하는 말이 없어!”
“크윽!”
“연주나 해!”
렌은 다시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제발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멈춰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다.
“에휴.......”
하지만 로얀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렌은 어쩔 수 없이 근처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하프를 꺼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렌은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작전이 실패해서 형이 죽어도 난 몰라요.”
렌은 로얀을 향해 그렇게 한마디를 톡 쏘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프 위에 손을 얹어놓았다.
띠리링.......
그와 때맞춰 바위 위로 올라오고 있는 세리나를 향해 얀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하죠. 운디네!”
하급 정령 중 실프와 운디네만 소환 가능한 얀은 운디네를 불렀고, 세리나는 그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 그를 한 차례 노려보고는 바위 위로 올라와 자신의 정령을 소환했다.
“엔다이론.”
그러자 물로 이뤄진 작은 아가씨의 형상을 한 운디네와 커다란 늑대의 모습을 한 물의 상급 정령 엔다이론이 나타났다.
세리나는 엔다이론에게 운디네를 소환해 달라고 말하자 그는 다섯의 운디네를 소환했다. 엔다이론이 부릴 수 있는 운디네의 수가 다섯이 한계였기에 그 정도밖에 부르지 못한 것이다.
“그럼 부탁한다.”
“부탁해.”
얀과 세리나의 말에 운디네들은 웃으며 모두 해적 소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엔다이론이 말없이 소굴을 향해 사라졌다.
일정한 형체가 없는 정령들은 몸을 숨기기가 편해 마나를 잘 감지하는 서클이 높은 마법사나 실력이 좋은 정령술사가 아니라면 들킬 염려가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잠시 후, 연주를 끝낸 렌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두 개의 달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힘이 약해 가까스로 달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얇은 구름을 움직였지만 달빛은 확연히 줄어들어 흑섬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의 연주로 모든 힘을 다한 렌은 매우 지쳐 보였다. 아직 나이 어린 그가 구름을 움직여 달빛을 막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렌의 눈빛은 어느새 해적 소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로얀에게로 향해 있었다.
“엇! 어디 가세요!”
얀 또한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렌이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얀의 손에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로얀과 처음 만났던 동굴 쪽이었다.
“정말 가능할까요? 아무리 괴물 같은 형이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해적들의 소굴이 보인다고는 하나 상당한 거리가 있어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지 않은 렌은 휘적휘적 걷고 있는 얀을 향해 외쳤다.
얀은 그런 렌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하지 마. 어둠은 녀석을 배신하지 않아.”
“네?”
“20년이 넘는 세월을 동거동락한 녀석을 어떻게 배신하겠어? 쿡쿡!”
여전히 뜻 모를 말을 하는 얀이었다.
흑섬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렌이 달빛을 가리는 것을 시작으로 횃불들이 하나하나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어둠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같다.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흑섬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흑섬의 주인인 해적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허둥거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톳불과 횃불의 불이 꺼진 것도 모자라 달빛도 구름에 가려 발 밑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이 그들을 벌하려 하는 것일까? 심지어는 집 안에 켜둔 촛불까지 순식간에 모두 꺼졌다. 푸른 물줄기가 어디선가 쏘아져 나와 불꽃을 모두 잠재운 것이다.
그렇다! 해적들이 마지막에 본 건 한 줄기 푸른 빛이었다.
해적들이 그 푸른 빛이 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자연스레 정령을 쓰는 엘프를 생각해 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해적들은 적의 기습인가 싶어 모두 밖으로 나왔다.
1,300명의 해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나타내자 해적 소굴이 순식간에 꽉 들어차 상당히 비좁아 보였다. 물론 공주와 노예로 팔기 위해 잡은 사람들을 지키는 해적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적왕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해적왕 라이던은 1,300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습격을 예상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해적들은 달마저 빛을 감추고 있자 당황하여 허둥지둥댔다.
“뭐, 뭐야! 젠장, 빨리 불을 켜!”
“빌어먹을! 적은 어디에 있는 거야!”
“빌어먹을! 하늘은 또 왜 저 지랄이여!”
거친 인생을 사는 해적들답게 걸쭉한 욕설이 마구 오갔다. 서로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장님 체험을 하는 그들이었다.
저벅저벅.......
어느새 소굴 근처로 다가선 로얀은 눈을 감았다. 하나의 감각을 막음으로써 다른 감각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서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려왔을까? 로얀은 문득 자신의 심장이 평소 이상으로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피의 향연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입구를 지키는 보초 다섯 명 또한 소굴 안을 기웃거리며 갑작스런 사태에 얼떨떨해 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스걱!
촤악......!
붉은 피의 느낌이 로얀의 피부 가득 느껴졌다.
붉은 피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기에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뿌려지는 피가 낯설었지만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피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나 자신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던 그였다.
실제로 지난 십 년간의 용병생활 동안 전쟁터에서 힘이 다할 때마다 그를 정신 차리게 해준 것은 동료들의 함성도, 적의 고함도 아니었다. 피였다. 붉은 피가 그의 정신을 깨워주었고 혈향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무, 무슨 일이야!”
살을 도려내는 섬뜩한 소리에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해적들이 당황하여 외쳤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약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스윽.
푹! 푹!
로얀의 몸이 미끄러지듯 이동해 당황하고 있는 두 해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검이 각각 검집에 꽂히듯 그들의 뱃속으로 파고들었다.
“꺼꺼꺽!”
주륵! 투투툭!
갑자기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온 차가운 침입자를 느끼며 두 명의 해적은 붉은 피를 입으로 쏟아냈다.
촤악......!
로얀은 해적들의 몸에 박힌 검을 뽑지도 않고 그대로 옆으로 베었다. 섬뜩한 검날은 해적들의 몸에 길을 내며 빠져나왔다. 그러자 반쯤 갈라진 해적들의 허리가 피를 쏟아내었다.
털썩!
해적들이 쓰러지자 로얀은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야!”
로얀의 감각에 남은 두 명의 해적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자신의 발 밑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훤히 보고 있는 것 같은 적... 해적들은 지금 그들을 공격하는 자가 귀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유령해적단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그들은 귀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 같은 걸 할 여유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며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부욱! 부욱!
“커컥!”
해적들은 갑자기 날아든 검에 큰 소리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들이 죽어가며 내뱉은 것은 말이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절로 흘러나오는 가래 끓는 것 같은 신음소리뿐이었다.
저벅저벅.......
입구를 지키는 보초 다섯을 죽인 로얀은 나무로 만든 커다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문 뒤에는 굵은 나무 기둥이 가로로 놓여 있었지만 로얀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것으로 간단히 장애물을 제거했다.
끼이익......!
저벅저벅.......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입구 주변에 있는 두 개의 망루 위에 있던 해적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로얀은 죽은 해적들의 시체가 내는 혈향 쪽으로 다시 걸어가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은 후 죽은 해적들의 무기를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청각과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후욱, 후욱.......”
망루 위에 있는 해적들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정령왕이 되면서 감각도 극대화되어 해적들의 숨소리는 물론이고 그들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로얀은 침착하게 한곳에 모아두었던 해적들의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망루를 향해 날렸다.
휘익......!
퍽!
검은 해적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생명을 잃은 해적의 몸뚱이는 망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으아아! 무, 무슨 일이야!”
“어, 어서 모두에게 알려야 해!”
휘익!
퍽!
쿵!
로얀이 던진 검이 또다시 다른 해적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제 세 개의 검만이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휘이익......!
퍼퍽!
쿵, 쿵......!
로얀의 손에서 떠난 두 개의 검이 거의 동시에 두 해적의 심장을 꿰뚫으며 그들의 목숨을 앗았다. 이제 남은 검은 하나!
삐이이!
삐이이......!
두 개의 망루에는 각각 한 명씩의 해적이 남아 급하게 피리를 불며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휘익......!
퍽!
로얀은 나머지 한 개를 우측에 있는 망루로 쏘아 보내고는 소굴 깊이 들어갔다.
좌측 망루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해적은 무시해 버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피리소리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얀의 손에는 어느새 뽑아 든 건지 허리에 매달려 있던 자신의 검이 들려 있었다.
저벅저벅.......
삐이이이......!
“어, 어디야!”
웅성웅성.......
적이 쳐들어오면 불게 되어 있는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해적들은 적을 맞이하는 함성을 터뜨리지 않았다. 단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둠 속에서 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욱.
스걱.
푸화화확!
로얀의 피부와 옷에 튄 해적들의 피가 뜨뜻한 감각을 남기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의 양손에 들려 있는 검이 각각 한 명씩의 적을 벤 것이다.
천 명이 넘는 해적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보이진 않았지만 살 떨리는 섬뜩한 소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꿈이 아니라 마치 죽어 저승이라는 곳에 온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오오오.......
서늘한 바람만이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따따딱......!
몇몇 해적들은 밤바람이 차가워서인지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떨었다.
푸욱.
스거걱.
푸화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그때마다 짙어지는 혈향으로 해적들은 동료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료들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상대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해적들은 덜덜 떨려 힘이 빠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사삭.
해적들이 보이는 모든 행동은 자살행위였다. 그들의 행동은 로얀의 검을 향해 이리로 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스거걱.
“끄르륵.......”
해적을 벨 때마다 그들의 붉은 피가 로얀의 온몸에 느껴졌다.
“뭐, 뭣들 하느냐! 어서 주위를 밝혀라! 불을 켜란 말이다!”
“모, 모두 물에 젖어 부, 불이 붙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불을 붙이면 될 거 아니냐! 어서 불을 붙일 곳... 끄아악!”
해적 사이에서 꽤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이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로얀의 검은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싫어했다.
‘어떻게든 빛은 다시 살아난다. 그 전에 모두 죽여야 해!’
로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덩달아 그의 검도 이전보다 더욱 사납고 매서워졌다.
오러 블레이드는 쓸 수가 없었다. 오러의 푸른 빛이 로얀의 위치를 적들에게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스거걱!
스거걱!
“끄륵.......”
“으, 으아아아......!”
살을 가르고 뼈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돌산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몇몇 해적들은 이성을 잃었는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날뛰거나, 검을 뽑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한데 그 검에 동료들만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 동료끼리 죽고 죽이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로얀은 찢어지는 듯한 해적들의 비명소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해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화륵!
“돼, 됐다!”
한 해적이 물에 젖지 않은 횃불에 불을 붙이자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적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하나 해적들에겐 불행이요, 로얀에게는 천운인 일이 벌어졌다. 마침 그때 로얀이 횃불을 밝힌 해적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뎅겅!
횃불을 밝히고 환하게 웃던 해적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화륵.
퍽.
횃불이 바닥을 구르자 로얀이 재빨리 그것을 발로 꺼트렸다.
잠깐 빛을 보았던 해적들은 미처 주위를 둘러볼 새가 없었다. 몇몇이 로얀의 얼굴을 보긴 했지만 보지 못한 사람들은 주위에 적이 없자 더욱 깊은 공포에 휩싸였다. 불이 켜졌음에도 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건 바닥을 뒹구는 참혹한 동료들의 시체뿐이었다.
‘큰일날 뻔했군.’
파팟!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스거걱!
그에 맞춰 겁에 질린 해적들의 검도 바람을 갈랐다.
“끄아악......!”
절망과 공포의 감정만이 돌산을 울리고 있었다.
“저, 적은 한 명이야!”
스거걱!
로얀의 얼굴을 봤던 해적의 외침에도 해적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로얀은 그렇게 외치는 해적을 향해 달려가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멀리서 적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외치는 해적들은 땅에 떨어진 해적들의 검을 발로 차 죽여버렸다.
푹!
로얀의 검이 앞에 있던 해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로얀은 자신의 검을 빼내기 위해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걷어차고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옆에 있는 해적을 베었다.
부욱!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밤하늘 아래 로얀은 아름다운 피의 바다를 돌산 위에 만들어갔다. 그에 따라 모든 대기와 땅 속을 다니던 정령들과 미세한 생물들이 몸을 숨겼다. 피의 혈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돌산이 울었다.
부서져 떨어져 내리는 달빛 아래 로얀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한 장의 지옥도를,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갔다. 혼자서 천 명을 벤 용병 이야기는 한 장의 지옥도와 함께 용병 세계에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새길 것이다.
* * *
삐이이......!
적의 침입을 알리는 피리소리가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며 요란하게 울렸다. 희미한 달빛이 전부인 해적 소굴 안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혼령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챙강!
죽어버린 시체에게 더 이상 무기는 필요없다는 사실을 아는지 평생 동안 주인의 정신에 감응하며 적의 피를 먹고 살았던 검이라는 물건은 바닥 위로 떨어지며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파팟!
현란하게 움직이는 두 개의 검이 피의 길을 만들었다.
부우우욱!
챙강! 툭!
두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그 중 하나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지만 다른 하나는 묵직한 금속음을 토해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해적단의 소굴은 시체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체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틈을 밟으며 해적들을 베는 로얀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끄아악!”
푸우욱!
푸하학!
로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다 보니 발생한 일이었다. 그 모든 원인은 공포라는 이름의 어둠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인간은 같은 동족이 아니다. 피에 미친 짐승일 뿐이다.’
십 년 동안 용병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의 생각이었다.
시체는 쌓여만 가고, 그에 따라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룬 채 돌산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돌산에 풀 한 포기 안 나는 것은 토양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돌산에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돌산에 붉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붉은 피가 돌산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로얀의 귓가로 들려왔다.
“헉헉! 허억.......”
로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가 정령왕의 이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정령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인간에 더 가까웠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른 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었다.
“후욱, 후욱.......”
휘이익.
부욱!
로얀은 숨을 고르며 오른 손목을 회전시켜 휘둘렀다. 어느새 해적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툭.
앞으로 나아가려던 로얀의 발끝에 오묘하면서도 기분 나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죽은 사람의 딱딱해져 가는 피부... 비록 로얀이 신발을 신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 물컹거리면서도 묘한 시체의 느낌은 그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륵!
시체 때문에 잠깐 움직임을 멈췄던 로얀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뭔가가 타는 듯한 퀴퀴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횃불?’
피이잉......!
퍽!
로얀이 횃불이라 생각했던 물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 물건이 향한 곳은 산적들의 집이었다.
화르륵!
물건의 정체는 불화살이었다. 나무로 만든 해적들의 집은 불화살을 꽂은 채 서서히 타올랐다.
화륵!
피이잉......!
퍽!
또다시 불화살이 날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 불화살을 맞아 불이 붙은 집 바로 맞은편 집에 화살이 박혔다.
화르륵!
로얀의 후각으로 전해지는 냄새의 농도가 짙어졌다. 예전과는 달리 눈이 있는 그는 갑자기 밝아진 환경으로 인해 눈이 부심을 느꼈다.
“뭣들 하느냐! 집에 불을 붙여라!”
우렁차고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가 불화살을 쏜 장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두목님! 집에 불을 놓으면 저희는.......”
“이 자식들아! 죽으면 모든 게 헛방이야! 어서 불을 붙여라! 명령이다!”
“두목!”
음지에 사는 인물들일수록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리고 의리라고 하는 집단의식도 끈끈한 편이었다.
유령해적단의 두목 해적왕 라이던! 소드 마스터라고 알려진 그가 드디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부하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더 이상 안에 처박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늦었다!’
로얀은 직감했다. 이미 곳곳에 불이 붙고 있었다. 혼자서 저 불들을 끄는 건 무리였다. 물의 정령들은 해적 소굴에 있던 불들을 모두 끈 후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계약자의 마나가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이 시간인 만큼 달이 기울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곧 타오르는 태양이 뜬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의 정령왕이라 해도 태양을 끌 순 없을 것이다.
해적들의 집들이 타오름에 따라 주위의 광경이 드러났다.
“헙!”
“헉!”
그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서로를 죽이며 싸우던 해적들의 동작도 마법에 걸린 듯 멈추어 버렸다.
마계의 가장 깊숙한 곳인 죽음의 계곡이 이런 모습일까? 검은 돌로 이루어진 땅은 시체들로 포장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피가 연결하고 있었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잘린 시체들... 허리가 잘린 해적의 시체에선 내장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우욱!”
해적들은 참혹한 광경을 보다 입을 가리며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뒤로 화급히 물러났다. 아무리 거친 인생을 살았던 해적들이라 해도 이런 광경에는 참지 못하고 속의 것을 게워냈다.
스륵.
로얀은 눈을 떴다. 더 이상 눈을 감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해적왕 라이던은 시체들의 참혹한 모습보다는 상대방의 모습에 놀랐다. 그들의 주변에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한 젊은 검사 한 명만이 서 있을 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체들의 땅 위에 그 젊은이는 홀로 서 있었다.
“으음.......”
해적왕은 침중한 표정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참혹한 시체의 바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자였다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저 청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로얀의 모습에선 강한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흑발은 붉은 피에 절어 착 달라붙어 있었고, 흑색 눈동자 아래로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온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은 피로 염색한 듯했다.
해적왕 라이던은 30대 후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해적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두건은 검은색에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로얀보다는 작은, 175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하나 결코 가볍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사냥꾼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스릉.......
해적왕 라이던은 자신의 무기인 검을 뽑았다. 그것은 날이 상당히 휘어 있는 시미터였다. 오로지 상대를 베기 위해 만든 살인병기! 그 시미터가 활활 타오르는 해적 소굴의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우웅......!
라이던의 검 위로 오러 블레이드가 치솟았다. 초급의 것으로 보이는 오러는 대장간의 화로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푸른 빛깔에 붉은색을 가미하고 있었다. 주변의 불길로 인해 원래의 푸른색에 붉은색이 섞인 듯 보이는 것이었다.
해적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났다는 마계의 발록처럼 보이는 젊은 침입자와 라이던을 번갈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로얀은 라이던의 검에서 치솟은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적을 향해 검광을 뿌렸기에 그의 팔에는 힘이 없었다.
우웅! 우웅!
온 힘을 쥐어 짜내듯 로얀은 두 개의 검에 동시에 오러를 생성시켰다.
흠칫!
“두,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라니!”
역시나 라이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나 그는 시미터를 바로잡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놀라움에 정신을 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눈 문제였다.
“꿀꺽!”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을 감싸안았다. 해적들은 커다란 도박판 위에 몸을 던졌다. 삼백도 채 남지 않은 해적들이 자신의 두목에게 모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라이던은 긴장감을 해소시키려고 시미터를 장난감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너의 이름은 뭐지? 두 개의 검에 오러를 퍼붓는 괴물은 들어본 바가 없다.”
라이던의 물음에 로얀의 입이 열리며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크로얀.”
“응? 다크로얀이라... 들어본 적이 없다. 용병인가?”
라이던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다크로얀이라는 희한한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세계에 퍼져 있는 백 명의 소드 마스터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보았다면 그 특이한 이름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B급 용병 다크로얀이다. 잠이 오니 빨리 끝냈으면 한다.”
무미건조한 그 음성에 라이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로얀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한 B급 용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괴물 같은 소드 마스터를 B급 용병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라이던은 로얀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로얀이 자신보다 약한 자를 깔보는 자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너 같은 새끼들이 가장 재수없지!”
그의 입에서 해적 특유의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파팟!
라이던은 로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시체들을 밟으며 날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엄청나게 빨랐다. 어릴 때부터 바위가 널린 흑섬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보니 생긴 감각이었다.
무섭게 다가오는 라이던을 보며 로얀은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팟!
퍽.
로얀의 발이 라이던의 어깨를 지그시 밟고 더욱 멀리 날아갔다. 시체가 없는 평지에서 싸우고자 그의 어깨를 빌린 것이었지만 로얀에게 어깨를 밟힌 라이던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큭! 죽여버리겠어!”
샤샤샥.
라이던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차아악!
시미터가 늘어나듯 오러를 풍기며 로얀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까깡......!
로얀은 오러를 뿜어내는 라이던의 시미터를 오른손에 들린 검을 들어 막았다.
까깡! 까깡!
라이던의 손목 회전과 팔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갔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가며 휘둘렀지만 손이 점점 뻐근해짐을 느꼈다. 손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몸이 버티질 못한다. 서둘러야 해!’
“흡!”
쿠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로얀의 검이 라이던을 덮쳤다. 그의 두 개의 검은 조금 전과는 다른 오러를 뿜고 있었고 길이도 길어져 있었다.
“헉! 주, 중급의 오러!”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오러를 머금은 두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라이던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하나를 흘려보낸 뒤 남은 하나를 시미터를 휘둘러 막았다. 로얀의 움직임이 매우 둔해져 있었기에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캉......!
“크으윽!”
하지만 중급의 오러는 무거웠다. 초급의 오러로 막기에는 무리인 감이 없지 않았다. 손마디가 찌릿찌릿 아파 왔다.
“잘 가라, 해적왕 라이던.”
로얀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손이 저려와 검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라이던은 그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흐흐흐, 과연 그럴까? 실드!”
화아악!
카가강......!
라이던의 왼손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금빛 반지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하얀 막이 감쌌다. 실드라는 방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다.
라이던은 강탈한 물건 중에서 우연히 고가품인 아티팩트를 발견하고는 경매로 팔아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자신이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티팩트가 지금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쾅......!
너무 무리하게 휘둘렀는지 로얀의 검이 실드와 부딪치며 그만 폭발해 버렸다. 아무리 잘 관리했다고는 하나 로얀의 검은 십 년의 세월을 겪은 검이었다.
“큭!”
로얀의 입에서 처음으로 짤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그의 왼팔에 박힌 것이다.
두 개의 검을 같이 휘둘렀는데 하나는 완전히 박살나 그 파편들이 로얀의 팔에 박혔고, 다른 하나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완전히 부서진 검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주르륵.
해적들의 피가 아닌 로얀의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팔에 박힌 검의 파편이 반짝이는 가운데 그 사이로 그의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하하! 죽어라!”
번뜩!
로얀의 머리 위로 붉은 불꽃으로 번뜩이는 시미터가 으르렁거렸다. 시미터가 로얀의 머리를 가르려는 순간!
“실드.”
화아악!
깡......!
로얀의 몸을 흰색 빛이 감쌌다. 라이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스윽.
로얀은 부서진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팔레인에서 처크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물건이자 이제는 단 하나뿐인 팔레인의 물건... 많은 추억과 과거의 잔재가 묻어 있는 검이었다.
‘이제 버려야 한다.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선 복수를 할 수가 없다.’
챙강.......
박살이 나고 두 동강이 난 검들을 던져 버린 그는 자신의 발 밑에 떨어져 있는 한 자루 검을 집어 든 후 그것을 수평으로 세워 라이던의 머리통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멍하게 있던 라이던은 그가 어떻게 실드를 썼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지워버렸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조금 물러선 라이던. 그러나 그가 어디로 움직여도 로얀의 검은 변함없이 그의 이마 정 중앙을 겨누고 있었다.
이윽고 적막한 사막의 바람 같은 로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졌다, 해적왕 라이던. 애로우 샷!”
“뭐?”
피융.......
퍽!
로얀의 검에서 푸른 빛이 쏘아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라이던의 이마를 관통했다.
어느새 라이던의 머리엔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거렸다.
쿵......!
라이던의 몸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으아아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해적들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주위가 불꽃으로 인해 밝았기에 길을 찾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더군다나 동이 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돌산을 에워싸고 있는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기에 로얀은 떠오르는 태양을 쳐다볼 뿐 해적들을 뒤쫓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팔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내 피도 붉군.”
그런 말을 중얼거린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피의 강을 뒤로하고 공주가 잡혀 있다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나 그곳으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갔을 것이기에 서두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