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은빛 여우 얀
은빛 여우 얀
로얀이 잠에서 깨어난 건 해적들과의 해상전이 있고 하루가 지나서였다.
선실에서 눈을 뜬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밖으로 나와 뱃머리로 향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잠을 자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말소리와 걸음소리, 무엇을 하는지 요란하게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들 때문에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갑판을 밟으며 걸어나온 로얀은 배가 돛을 내리고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함선의 앞쪽으로는 칠흑의 돌을 쌓아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섬이 보였다.
섬 중간에는 돌산 하나가 덩그러니 솟아 있었는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삭막함이 느껴졌지만 마왕의 섬처럼 보이는 기괴한 모양으로 인해 요새로써는 최고로 보였다. 그리고 그 둘레를 흰 모래사장이 빙 두르고 있어 흑색의 돌산과 크게 대비되었다.
로얀과 일행은 무사히 해적왕 라이던이 있는 흑섬에 도착한 것이다. 여름의 대륙과 가을의 대륙은 몬스터가 많이 없는 곳이라 해적들 외에는 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없었기에 이렇게 제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흑과 백의 멋을 가진 흑섬을 바라보다가 해안가로 시선을 돌렸다. 단풍기사단과 사람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잠결에 들은 사람들의 말소리는 무거운 물건을 들면서 내뱉는 그들의 기합소리인 듯했다. 그리고 쿵쿵거리는 소리는 짐을 놓는 소리인 듯했다.
“이제 일어났어요?”
“넌 안 가냐?”
로얀의 말에 렌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의 뒤로 레인과 세리나가 보였다.
“잠탱이 형을 여기 두고 갈 순 없잖아요.”
타탓!
레인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로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자네가 말 좀 해봐! 어제 분명 자네가 바람의 칼날을 썼지 않는가!”
마치 섬광처럼 빠른 움직임! 그가 얼마나 다급한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로얀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일어날 파장을 알기에 담담히 말했다.
“으아아......!”
그리고 그의 말에 절규하는 레인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바보 취급을 당했던가?
“허허허! 레인, 그만 좀 하게나.”
“으아아......!”
다가오며 말하는 메리슨의 모습을 보며 레인은 더욱 절규했다. 그러나 레인이 절규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로얀의 눈은 해안가를 훑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의 발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엇! 형, 어디 가요? 이제 모두 내려야 한다고요!”
렌의 외침을 뒤로하고 로얀은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턱.
“선실에 두고 온 짐을 가지러 갔겠지. 곧 올 게다.”
메리슨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렌은 로얀에게는 짐이 없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한데 아까부터 말이 없던 세리나가 해안가와 흑섬 전체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이상해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명색이 유령해적단의 소굴인데, 우리가 온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데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군요.”
확실히 그랬다. 해적들의 소굴인 흑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높이 솟아 있는 돌산에는 해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안가에 우뚝 솟아 있는 망루에도 사람이 없었다.
너무도 깨끗한 모래사장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음, 그렇긴 하구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메리슨의 말을 받으며 레인이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해안가를 응시했다.
뚜벅뚜벅.......
“응? 그게 뭐예요?”
“창이다.”
렌의 말에 선실에서 나온 로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윽! 그건 저도 안다고요!”
그의 양손에는 창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허어! 선장실에 있던 건가?”
“예.”
함선마다 있는 선장실은 역시나 다른 방과는 달랐다. 배를 책임지는 선장들이 머무는 선실답게 크기도 컸고 여러 가지 가구와 아담한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한데 군함의 선장실에는 어김없이 무기들이 장식용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로얀이 가지고 나온 창도 선장실에 걸려 있던 장식용 창이었다.
선장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간 것은 군율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장이 배의 갑판에 나가 있었던 탓에 선장실에는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의 행동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뚜벅뚜벅.......
로얀이 선수로 다가가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 안에 있던 창의 날이 정면으로 세워졌다.
후웅.......
그의 오른손 근육이 불끈거리는가 싶더니 창이 그의 손을 떠나며 무거운 바람소리를 내었다.
쉐에에엑!
퍽!
멋지게 날아간 창은 모래사장에 박혔다. 한데 보통 모래에 박히는 소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얀은 그가 던진 창이 바닥에 꽂힘과 동시에 남은 창을 들어 올렸다.
스윽.
후웅.......
쉐에에엑!
퍽!
“.......”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해안가에서 짐을 나르던 사람들도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로얀의 주변에 있던 레인을 비롯한 인물들은 몸이 굳어버렸다. 그들은 혹시 로얀에게 정신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취이잇!
취이잇!
로얀이 던진 창이 꽂혀 있던 곳에서 붉은 액체가 튀어 올랐다. 액체는 하얀 모래사장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많이도 숨어 있군.”
“꿀꺽!”
사람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파파팟!
그때, 마법처럼 눈앞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땅 속에서 수십 명의 해적들이 솟아오른 것이다.
해적들은 얼굴에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사장 속에서 메리슨과 나머지 일행이 모두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발각됐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해적들로 인해 해안가는 순식간에 싸움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쿵!
채챙......!
짐을 나르던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은 들고 있던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해안가에서 물건의 운반을 지휘하고 있던 레토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적의 매복이다! 모두 맞서 싸워라!”
“와아아......!”
채채챙......!
매복해 있던 해적들의 출현에도 레토는 기사단의 단장답게 침착하게 대처했다.
함선의 뱃머리에서는 메리슨을 비롯한 사람들이 로얀을 각기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로얀에게 말했다.
“자, 자네... 어, 어떻게 알아차린 건가?”
“보이더군요. 모래알이 들썩이는 것이.”
그의 말에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래 속에 매복해 있는 적도 사람이기에 숨을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잘 훈련된 자들이었기에 그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숨을 쉬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들 바로 앞에서 짐을 부리던 기사들이나 용병들도 해적들의 매복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형은 괴물이었어.”
“내 태어나서 자네 같은 돌연변이는 처음 보는군.”
렌과 레인의 말에 로얀은 한마디로 끊었다.
“반은 죽겠군.”
그의 말에 메리슨은 무슨 말인지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곧 그 말의 뜻이 눈앞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촤아악......!
파팟!
바다 속에서 잠수하고 있던 해적들이 치솟아 올랐다.
“와아아......!”
채채챙......!
사방에서 협공을 받은 단풍기사단의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일국의 기사답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해적들을 상대해 나갔다.
파팟!
가벼운 복장에 날카로운 단도를 쥔 해적이 솟아올랐다. 그의 앞에 있던 단풍기사단의 기사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해적이 훨씬 빨랐다.
푸욱!
푸쉬쉬......!
“크아악!”
해적의 단도는 기사의 목을 꿰뚫고 붉은 피를 머금었다. 기사의 무거운 갑옷이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기사들은 그 무게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모래에 빠졌다.
단풍기사단이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해안가를 다니고 있는 이유는 기사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갑옷은 검과 마찬가지로 기사를 상징하는 무구이기 때문에 절대 버려선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그랬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갑옷을 벗어 던지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해적들은 무척이나 가벼운 차림에 양손에 단도나 짧은 숏 소드만을 들고 기사들을 요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사장에서의 전투에 숙련된 이들이었기에 무척이나 날랬다. 그리고 단도나 짧은 숏 소드로는 단단한 플레이트 메일과 철 투구를 뚫을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기사들의 목만을 노렸다.
그토록 당당하던 단풍기사단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하나둘 모래사장에 쓰러져 갔다. 모래사장에는 기사들의 시체만 한 구, 두 구, 늘어나고 있었다.
푸푹!
“크악!”
쿵!
갑옷의 무게 때문에 묵중해진 기사의 몸은 모래 안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크으윽! 모두 힘을 내라!”
우웅......!
후우웅......!
레토는 부하들의 죽음을 보며 비통에 찬 음성을 터뜨렸다. 그의 검에 맺힌 푸른색 오러가 빛을 뿌리며 해적들의 몸뚱이를 두 동강 내었다.
푸화확!
해적의 몸은 양분되어 떨어져 내렸다.
“헉헉.......”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그라 해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모래사장에서 싸우다 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푹.
레토의 발이 엉켜 오른쪽 무릎이 모래에 잠겼다.
파팟!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해적의 공격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피잉......!
푹!
레토의 시야에 머리에 화살을 꽂은 채 모래에 몸을 묻는 해적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함선 위에서 레인이 활을 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토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리슨은 난처한 듯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워낙에 뒤섞여 싸우다 보니 마땅히 쓸 만한 마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던 세리나 역시 지난번 해상전 뒤로 좀더 휴식이 필요했기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싸움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활을 쏠 만한 힘도 그녀에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인은 계속해서 활을 쐈다. 이런 때를 대비하고 있었기라도 한 듯 그의 화살통에는 화살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커다란 짐 속 또한 화살이 거의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했다.
스르릉.......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뽑았다. 검날에 겁에 질린 렌의 얼굴이 비쳤다.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라.”
팟!
그가 함선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당히 높은 높이였지만 그는 가볍게 착지했다.
타탁!
하얀 모래가 그의 발목을 묶어두려 손을 뻗기도 전에 그의 몸은 그 자리를 떠났다.
스거걱!
부우욱!
“크아악!”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해적은 단 한 명도 예외없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하는 그를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어떠한 방어구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짧은 무기를 휘두르는 해적들은 로얀의 쾌검술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빠른 움직임은 모래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
로얀은 해적들을 베며 푸른색 오러를 뿜어대는 레토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붉은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화려한 검이라도 날이 없다면 그저 장식용에 불과하지.”
“.......”
레토는 로얀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기사들의 갑옷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레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숙련된 기사들보다 로얀을 비롯한 B급 용병들이 훨씬 잘 싸우고 있었다.
보통 신분이 높은 기사라면 일개 용병의 가르침에 분노를 터뜨렸겠지만 레토는 달랐다.
“모두 갑옷을 벗어라!”
레토의 말이 해안가에 울려 퍼지자 싸움 중에 기사가 갑옷을 벗는 기괴한 사태가 벌어졌다. 상관의 말은 절대적이었기에 기사들은 허둥지둥 갑옷을 벗었다. 벗는 도중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사들은 갑옷 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와아아아......!”
갑옷을 벗은 기사들은 기합을 터뜨리며 힘차게 해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계속해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다가 벗고 나니 몸이 가벼워져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바뀐 기사들의 움직임과 기세에 해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로얀은 그것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해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탓!
레토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얀이 처음으로 웃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 * *
밤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흰색 막사를 툭툭 쳤다.
스산한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에 하얀 막사가 우뚝 서 있었다. 해안가 위쪽에 세워진 여러 개의 막사 위로 달빛이 비쳤다.
다른 막사들과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흰 막사에 달빛이 강렬하게 비치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지금 여러 개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휴우...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휴우...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닐세.”
메리슨의 위로에도 레토는 단풍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적의 매복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싸움 도중 갑옷을 벗으라고 로얀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전멸을 면하지 못했으리라.
메리슨과 일행은 매복해 있던 해적들을 모두 해치우고 이곳에 전쟁터에서 흔히 쓰는 막사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막사 안에는 메리슨과 레토를 비롯해 기사단의 부단장과 세리나와 레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의 피해로 인해 작전을 다시 짜야 했던 것이다.
일단 기사들은 간단한 보호구를 제외하고는 갑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돌산으로 올라가 싸워야 했기에 플레이트 메일은 짐만 될 뿐이었다. 또다시 과오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안가에서의 적의 매복으로 단풍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해상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기에 현재 용병을 포함해 240명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적의 수는 대략 1,300명. 더구나 그들은 마왕의 성과 같은 튼튼한 요새 안에 있었다. 메리슨이 이끄는 무리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구 하나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레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얀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해안가의 싸움을 통해 로얀이 첩자가 아닐 거라 믿었다. 아니, 로얀이 적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레토는 로얀이라면 이 상황을 풀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섬을 둘러본다며 나갔다고 하더군요.”
레인의 말에 레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다시 로얀이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막사 안의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 * *
“후우웁! 하아.......”
모두들 앞으로의 일 때문에 시름하고 있을 때 로얀은 검은색 바위 위에서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바다의 향기가 가슴 가득 담기는 것만 같았다. 한데 짙은 어둠이 몸을 휘감은 어두운 밤에 검은 바위 위에 서 있으니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쏴아아......!
눈을 감고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소리를 듣던 그의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잡혔다.
투툭!
작은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달빛에 언뜻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사라졌다.
‘해적인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흑섬에 동물이 살 리 없었다. 흑섬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해적이라는 사람.
스윽.
로얀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흑섬 위를 오르던 로얀은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림자의 정체는 사람이었다. 등을 보이고 암벽을 타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움직임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그들을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로얀은 그를 뒤쫓아 암벽을 탔다. 남자는 아직 누군가가 자신의 뒤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흑섬 중앙에 있는 돌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저기가 해적들의 소굴이군.’
잠시 후 돌산의 정상에 도착한 로얀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해적들의 소굴을 바라보았다. 화톳불이 해적들의 소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돌산 중턱에는 평평한 땅이 있었고, 그 위에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보초를 서고 있는 해적만 해도 백 명은 넘는 듯했다.
스슥.
‘어디로 가는 거지?’
로얀은 그림자 주인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해적들의 소굴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해적이라 그런지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재빨랐다. 그의 뒤를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로얀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응?’
어느 정도 내려가자 그림자의 주인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멀리 거대한 동굴만 언뜻언뜻 보였는데, 아직 해적들의 소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공주가 잡혀 있는 곳인가?’
로얀은 눈앞에 모습을 보인 거대한 동굴을 바라보았다.
괴물의 입처럼 생긴 동굴 입구는 굉장히 컸는데, 그 앞에는 보초로 보이는 네 명의 해적이 두 개의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부터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저것은 해적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길인 듯했다.
로얀은 저 동굴 안에 공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림자의 주인을 덮치기로 했다. 상대가 상당히 재빨랐기에 뒤에서 빠르게 덮쳐야 했다.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팟!
“읍!”
무사히 그의 입을 막는 데 성공한 로얀은 그림자의 주인을 데리고 벽에 붙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흑섬의 돌이 워낙에 들쭉날쭉하다 보니 몸을 숨기기에는 좋았다.
“묻는 말에 맞으면 고개만 끄덕여.”
흠칫.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당황해서인지 해적의 몸이 떨렸다. 한데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억지로 로얀의 손을 조금 밀어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엔?”
“......!”
정령왕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크게 놀란 로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신의 과거 이름을 부른 것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 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의 손이 풀리자 얀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몸을 돌려 로얀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용병 세계에서 은빛 여우라 불리던 얀이었다.
“제길! 그 정떨어지는 무뚝뚝한 목소리는 시엔의 것이 맞는데.......”
얀은 상대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얼굴의 소유자가 아니자 욕을 뱉었다.
자신을 덮칠 때까지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상대방은 고수였다. 얀은 해적들을 이용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려 했다.
“정떨어지는 목소리라 미안하군. 과거에는 시엔이었지만 지금은 로얀이다.”
“뭐?”
턱.
“읍!”
로얀은 급히 손을 들어 얀의 입을 막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굴 입구를 지키던 해적들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로얀과 얀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해적들을 보며 로얀은 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검을 뽑으려 했다.
휘이익......!
퍽!
휘이익......!
퍽!
날카로운 단도가 얀의 손끝에서 튀어나가 다가오던 두 해적의 미간에 꽂혔다. 해적들은 몸을 바르르 떨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자 남은 두 명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피리였다. 적의 기습을 알리는 도구였다.
휘이익......!
퍽!
휘이익......!
퍽!
그러나 그들의 손보다 얀의 손과 단도가 빨랐고, 날카로운 단도는 그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씨익.
얀은 웃으며 로얀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곱슬거리는 금발, 장난기 어린 목소리까지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로얀은 얀의 옆에 떠 있는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단도가 훨씬 빨라진 것은 실프의 힘임을 알 수 있었다.
로얀은 얀이 여기 있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이, 어이! 난 네가 어떻게 살아 있으며, 네 모습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가 더 궁금해.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무덤까지 만들었다고.”
얀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해적들이 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얀이 동굴 쪽으로 가자 로얀은 그가 용병으로서 공주를 구하러 온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갔다.
얀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적들의 미간에 박혀 있는 자신의 단도를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도 단도만은 반드시 회수하던 그였다.
동굴의 벽 쪽에 횃불이 꽂혀 있어 동굴 내부는 어둡지 않았다.
“히힛! 있다, 있어!”
얀은 안으로 달려가 품속에서 커다란 가죽으로 된 자루를 꺼냈다. 그의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로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얀의 눈앞에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보석들과 갖가지 보물들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해적들이 약탈한 물건들을 놓아두는 금고 같은 곳인 듯했다.
로얀은 얀의 뒷모습을 보다 한숨을 쉬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돈을 밝히는 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가 은빛 여우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단검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삭빠르게 이곳저곳에서 돈을 챙기는 그의 수전노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로얀은 자신의 검 한 자루를 뽑았다. 하얀 검신이 달빛에 빛났다.
우웅!
롱 소드가 푸른 오러를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동굴 옆에 있는 벽 쪽으로 향했다.
휘익!
쾅!
그가 검을 휘두르자 푸른 오러가 출렁이며 흑색 돌벽을 강타했고, 돌벽은 굉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삐이이이......!
흑색 돌산 가득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밑에 있는 해적들이 이렇게 큰 굉음을 못 들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타탁!
얀은 굉음에 놀라 급히 동굴에서 뛰어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자루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많이도 담았는지 꽤나 불룩해져 있었다.
“야! 이 자식, 너는 어떻게 내가 잘되는 걸 못 보냐?”
얀은 왔던 길로 산을 내려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뒤쫓았다. 멀리서 해적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헥헥......!”
로얀이 산책을 하던 바위 위까지 내려온 얀은 숨을 헐떡였고, 그 앞에는 로얀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었다.
“이 자식, 완전 괴물이 됐잖아? 헉헉.......”
“작은 복수였다.”
지금 이 순간 로얀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친구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 짓는 사람 말이다. 그의 얼굴엔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헉! 뭔 복수?”
“전쟁터에서 레이나의 편지를 읽어주는 데 네가 얼마의 보수를 요구했더라?”
“아... 그, 그게... 네가 편지를 외울 때까지 밤새도록 읽게 했잖아!”
로얀은 십 년간의 용병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레이나의 편지였다. 싸움을 할 때에도 그 편지를 떠올리기 위해 얀에게 편지를 외울 때까지 읽어달라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 보수는 1실버.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로얀의 급료는 1실버였다. 급료를 모두 가져가면 레이나에게 보낼 약값이 없어지기에 얀은 처음에는 50코퍼만 받았다. 그리고 남은 50코퍼는 레이나에게 줬던 것이다.
로얀이 전쟁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4실버를 받는 용병이 되어 있었지만 얀의 보수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그는 로얀의 급료가 오르자 1실버를 모두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있는 추악한 외모 때문에 언제나 무시받던 로얀이 유일하게 말을 튼 친구는 얀뿐이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그때를 생각하다 얀 옆에 떠 있는 실프를 보았다.
“정령술도 배웠냐?”
“흐흐흐, 당연하지. 이 몸이 이제 너도 요리.......”
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로얀의 검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이 그냥 검이라면 웃고 넘어갔겠지만 그 검에는 푸른색 오러가 어려 있었던 것이다.
“큭! 괴물 같은 자식. 쳇쳇!”
로얀이 검을 거두자 얀이 주위의 돌을 툭툭 차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오러는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의 정령인가?”
“어? 그래.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 예쁘지? 귀엽지? 사랑스럽지?”
실프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드리우고 있는, 매우 귀엽게 생긴 정령이었다.
얀의 실프를 본 로얀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다에서 노는 실프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이다.
“나의 절친하면서도 사랑스런 친구야. 인사해.”
“앞의 수식어... 너의 목을 벨 수도 있어.”
“하하! 이런 깍쟁이 같으.......”
스윽.
얀의 목을 두 개의 검이 감쌌다. 두 개의 검에는 모두 오러가 맺혀 있었다.
만약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테지만, 얀은 이 녀석이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언제나 기적을 보여줬던 녀석이니까.
“제길! 연약한 내가 참아야지. 실프, 인사혀.”
로얀은 검을 거두고 실프를 바라보았다. 한데 실프는 어느새 얀 뒤로 숨어 있었다.
[꺄악......!]
“응? 실프, 왜 그래?”
실프는 몸을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잔뜩 질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그치만 무서운데.......]
로얀은 실프의 말을 들으며 얀을 바라보았다.
“그냥 돌려보내.”
얀은 실프가 갑자기 몸을 떨며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지금 실프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질 못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하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실프, 돌아가.”
실프는 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그런 실프의 모습에 얀은 로얀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로얀은 얀에게 넌지시 물었다.
“실프도 말을 하냐?”
로얀은 얀이 실프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의아해 물어본 것이었다.
“뭐? 쯧쯧... 역시 정령에 대해 모르는구나. 정령은 상급 정령 이상부터 말을 할 수 있어.”
얀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승리의 미소를 드리운 채.
“정령들 모두가 말을 하긴 하는데 정령 고유의 말이라서 같은 정령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
로얀은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두 개의 달을 눈동자에 담았다. 그는 바람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인간이 아닌 정령이었지.......”
“뭐?”
“아냐. 너에게 해줄 말이 많다. 따라와.”
“엥, 어디 가는데? 아! 넌 어떻게 여기에 왔냐?”
“그만 조잘대고 그냥 따라와.”
로얀이 앞장서서 막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그 뒤를 얀이 따랐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점점이 새겨졌다.
* * *
얀과 함께 막사로 향하면서 로얀은 그에게 최근 이야기, 즉 자신이 어떻게 여기 흑섬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했는데 얀이 알면 곤란한 부분은 적당히 꾸며서 둘러댔다.
“아아! 네가 흑안의 검사 다크로얀이었구나!”
“어떻게 알았지?”
“내가 워낙에 발이 넓잖아.”
얀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얀의 모습에 로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고, 잠시 후 현재의 이야기까지 모두 끝냈다.
막사까지는 꽤나 먼 데다가 매우 천천히 걸었기에 아직도 막사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로얀은 이제 묻어두었던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팔레인에 떨어졌고 그 순간 로얀은 자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헉! 유, 유령!”
후닥닥!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얀은 엄청난 속도로 로얀에게서 물러났다.
“유령이 그림자 있는 거 봤냐?”
그 말에 얀은 슬그머니 다시 다가와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었던 인간이 되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윽! 그럼 너 리치가 된 거냐?”
“리치가 살점 붙은 거 봤어?”
“하긴, 검을 쓰는 리치도 들어본 바가 없지.”
리치라는 것은 마법사들이 무한한 생명을 위해 악마와 계약해 다시 살아나게 된 존재를 뜻했다. 그렇게 살아난 존재는 언데드인 스켈레톤처럼 뼈밖에 없는 존재였다.
얀은 로얀의 정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퉁겼다.
딱!
“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얀의 말에 장난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화를 내지 않고 다시 걸어갔다. 얀의 발자국도 그의 발자국을 따라 다시 해안가에 찍혔다.
로얀은 걸어가며 아직 말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빛이 다시 생명을 주었고, 영원한 생명과 함께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대가는 뭔데?”
얀은 다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언제나 거래와 관련된 일에는 냉정했다.
로얀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어떠한 것을 받았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더구나 생명을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없다.”
“하아... 정말이냐?”
“그래. 단지 영원한 세월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거겠지.”
“젠장할 녀석!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영원히 사는 거라고.”
“너도?”
“난 다르지. 암암!”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일단은 안심이 되어서인지 얀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이름은 왜 바꾼 거냐?”
“아아! 다시 태어나는 조건이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을 받는 거였어.”
“뭐? 살다살다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얀은 로얀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고, 강인한 육체와 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없었던 눈이 생긴 것이 친구로서 기쁘긴 했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항상 어떠한 행운이나 힘에는 그에 걸맞는 대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얀은 친구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젠 뭐 할 거냐?”
얀의 질문에 로얀은 다시 과거사를 꺼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얀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리아와 레이나의 애인이라는 카엔이 드래곤이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들에 의해 팔레인이 사라졌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너무도 단순한 이유로 인해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친구인 로얀이 끔찍이도 아끼던 동생 레이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래.”
얀은 로얀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과 살벌한 눈동자가 로얀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턱!
“너! 이럴 생각으로 다시 살아난 거냐? 레이나가 하늘에서 퍽이나 좋아하겠다. 너 미쳤냐!”
“.......”
“말해 봐!”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하! 그래, 고작 소드 마스터의 힘으로 드래곤 두 마리를 잡으시겠다고?”
너무도 무모했다. 기껏 살아났다 다시 개죽음당하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떻게 드래곤을 죽인단 말인가? 더구나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를!
“강해질 거다.”
‘나에겐 네 개의 목숨과 봉인된 힘이 있다.’
“나에겐 무한한 생명이 있으니 그동안 강해질 거다. 어떻게든 죽인다!”
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꼭 그렇게 해야겠냐? 넌 항상 레이나를 위해 살아왔다.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어? 너의 인생을 좀 살아봐. 언제까지 레이나만 부르며 살 건데!”
로얀은 가만히 얀의 말을 들었다.
“십 년이다. 넌 십 년 동안 레이나를 위해 피 속에서 살아왔다. 그 정도면 오빠로서 충분히 할 만큼 한 거다.”
로얀은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구름이 꼈지만 밤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그 밤하늘에 로얀의 슬픔에 젖은 듯한 촉촉한 음성이 번져 나갔다.
“하늘을 보고 싶었어.”
“뭐?”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든 하늘을 보고 싶었다.”
“.......”
“그리고 난 다시 살아났을 때 희망을 품고 있었어. 나처럼 레이나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난 레이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이대로 저승에 가서 바보같이 동생도 못 찾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안 되잖아. 오빠가 돼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새롭게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로얀이었다.
“그날... 마을로 돌아왔을 때 드래곤 옆에 있던 레이나는 너무도 행복한 것 같았어. 그런데... 그런데!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그들을 찾아내 죽이겠어. 내 영혼이 부서진다 해도 죽이겠어!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죽여버릴 거다!”
스륵.
얀은 잡았던 멱살을 놓고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득한 살기가 내비치는 로얀의 눈동자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로얀이 돼버린 시엔이라는 녀석은 한번 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독종 중에서도 상 독종이었다.
얀은 마음을 씻어내려는 듯 입 안 가득 바닷바람을 담았다.
“하아.......”
스윽.
얀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몸을 돌린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턱.
그의 손이 로얀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로얀의 몸 전체에서 느껴졌다.
“내 친구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
로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런 그를 향해 얀은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그런 얀의 모습에 로얀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새겨졌다.
“드래곤 몸뚱어리는 보물이니까 나도 좀 줘야 한다. 그리고 내 허락 없이 이상한 데서 죽지 마라. 천하에서 가장 멋진 얀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비참하게 죽으면 내가 쪽팔리잖아.”
“고맙다.......”
그 말에 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가 오른팔을 로얀의 어깨에 둘렀다.
“이거 천하의 무정남인 너에게서 고맙다는 소리도 다 듣고,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더 오래 살 텐데?”
“제길, 한 번도 안 져요. 아까 가자고 한 데나 가자고.”
피식.
로얀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얀과 나란히 걷던 그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거저 얻은 힘이 아닐지도 몰라. 봉인이 풀릴 때마다 뭔가를 잃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