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바다의 노래
바다의 노래
끼룩끼룩......!
로얀이 항구도시인 몬드에 도착한 건 그란티를 떠난 지 정확히 3일이 지난 후였다. 그가 용병길드에서 들은 것이라고는 출발이 내일 아침이라는 것과 총책임자가 궁정 대마법사 메리슨 에리드라는 것뿐이었다.
몬드에 있는 집들은 온통 흰색이었다. 심지어 도로의 바닥까지도 흰색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공을 많은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뚜벅뚜벅.......
“하하하......!”
로얀은 마크가 가르쳐준 ‘워크어’라는 선술집에 가까워질수록 웃음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와하하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로얀의 인상이 점점 굳어졌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워크어’ 앞을 장악하고 있었다. 단풍 무늬 표식이 그들의 옷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단풍기사단인 듯했다.
터벅터벅.......
로얀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워크어’ 안으로 들어갔다.
“와하하핫......!”
“허허헛! 자넨 누군가?”
로얀이 안으로 들어오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노인은 마법사들의 특징인 커다란 모자를 쓰고 붉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얀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번 의뢰의 총 책임자임을 알아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 때문에 그가 궁정 마법사인 메리슨 에리드임을 알아본 것이다.
로얀은 미소를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메리슨을 바라보며 품속에서 B급 용병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다크로얀입니다.”
상대가 노인이기에 자연스럽게 말이 높여져 나왔다.
메리슨은 흑발에 흑안의 사내가 신기해 그를 뻔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털털하게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용병 명단을 바라보았다. 상대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는 건 큰 실례였던 것이다.
“아, 여기 있구먼! 출발은 내일 아침 6시이니 그때까지 부두로 나와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로얀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워크어’를 빠져나왔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붉은 도끼 레드 일당을 소탕하면서 이가 빠진 검의 날을 세우기 위해 숫돌을 몇 개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 * *
몬드의 여관에서 눈을 붙였던 로얀은 5시가 되어 부둣가로 나갔다.
그가 한 시간이나 서두른 이유는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처얼썩......!
끼룩끼룩......!
로얀의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두 눈에 가득 담긴 광활한 바다가 소리치며 그를 부르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와 그의 발 밑을 간질이다가 저만치 물러나는 파도는 마치 수줍은 소녀의 손짓처럼 그를 유혹했다.
“이게 바다인가?”
그는 태어나서 바다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로얀은 바다를 눈 안에 모두 담으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쏴아아아......!
처얼썩......!
로얀은 짠 바다 냄새와 쌀쌀한 바람이 정겹게 느껴졌다. 마치 밀려오는 바다가 자신을 품에 끌어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한 바다의 풍경에 힘을 빼고 몸을 맡기고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작은 이슬이 맺혔다.
“와아! 정말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군요. 어제 워크어에서 봤을 때에는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흠칫!
로얀은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하하, 좋은 아침! 전 렌이라고 해요.”
170 정도 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품안에는 하프라는 악기를 들고 있었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헤에! 바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
‘어머니.......’
그의 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대답했다.
갑자기 왜 어머니가 생각났는지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이 되고 나서부터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어머니, 자신을 버린 어머니... 하지만 로얀은 그런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런 험난한 세상에 눈이 없는 아이를 키워줄 부모가 있을까? 레이나를 버린 것은 화가 났지만 그것도 가난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기억도 나지 않던 어머니이니까.......
그의 그런 마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렌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이상한 소년이다.’
로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차! 이제 그만 가야죠.”
“응?”
렌은 부두에 닿아 있는 함선을 가리켰다. 세 척의 거대한 함선... 로얀은 그것들이 자신이 타고 가야 할 배임을 알아보았다.
“너도 가는 거냐?”
“그럼요! 제가 이래 봬도 A급이라고요.”
렌은 품속에서 A급 용병패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로얀은 다시 한 번 렌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미약했다. 그의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렌은 웃었다.
“전 음유시인이에요.”
“음유시인?”
“네. 노래로 날씨를 조종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기도 하죠.”
“.......”
“항해를 할 때에는 폭풍을 대비해 연금술사들이 만든 바다의 향신료를 뿌려야 하는데 그건 무지 비싸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음유시인을 고용하죠. 음유시인도 비싼 건 마찬가지지만 바다의 향신료보다는 낫거든요.”
“어째서지?”
“헤헤, 향신료는 일회용이니까요.”
눈을 감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던 렌은 귓가로 잔잔히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사박사박.......
“앗, 같이 가요!”
로얀은 모래를 밟으며 벌써 함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이 해안가에 새겨졌다.
로얀이 탄 함선은 거대했다. 용골은 굵고 튼튼해 보였고, 뱃머리가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어 날렵해 보였다. 그리고 바람으로 나아가는 범선답게 함선은 거대한 세 개의 돛대를 중심으로 돛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뚜벅뚜벅.......
“와아! 운이 좋은데요? 우리에게는 순풍이니 말이에요.”
로얀은 검을 뽑아 뒤의 그림자를 베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함선에 오르면서부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렌 때문이었다.
그냥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싫은데 렌이 끊임없이 조잘거리자 로얀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멈칫!
쿵!
덕분에 바쁘게 입을 움직이느라 앞을 보지 못한 렌은 로얀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아얏!”
콰당!
넘어진 렌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로얀의 그림자였다.
“따라오지 마라.”
씨익.
“저랑 형이랑은 같은 방인데요?”
렌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형이라는 소리... 안 했으면 하는군. 그리고 넌 내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너와 내가 같은 방이라는 것을 넌 어떻게 알지?”
“선실 배정표를 보고 왔거든요. 또 형의 이름은 어제 선술집에서 들어서 알죠.”
로얀은 여관을 나오자마자 바로 바다로 나왔기에 선실 배정표를 미처 보지 못했다.
“형, 선실이 어딘 줄 모르죠?”
“.......”
알 턱이 없었다. 배정표의 모서리조차 구경하지 못한 그였으니까.
“에헴! 그럼 절 따라오세요. 대가는 로얀 형에게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
“맘대로.......”
로얀은 왠지 뜨거워지는 이마를 식히기 위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선실은 한 방에 네 명이 머무를 수 있도록 2층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역시 우리가 일등이네요.”
로얀과 렌이 머물게 될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털썩.
왼쪽에 있는 침대 일층에 걸터앉은 로얀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베개 위에 올려둔 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렌은 메고 왔던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 정리하고 있다가 침대가 들썩이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에에엑!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잘 테니 깨우지 마라.”
로얀의 말에 렌은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아, 안 돼요!”
“.......”
“바다를 보며 눈물 흘릴 줄 아는 형과 밤까지 바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요!”
“난 그런 취향이 아니니 건드리지 마.”
“쳇, 쳇, 쳇!”
로얀의 차가운 반응에, 입에 헤이스트를 걸었는지 렌의 입술이 급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투덜거림에 잠을 자려던 로얀의 손이 위로 움직였다.
스르릉.......
맑은 금속음과 함께 롱 소드가 천천히 뽑히자 렌은 합죽이가 되었다.
“.......”
짐을 대충 정리한 렌은 토끼 걸음으로 살금살금 선실을 벗어났다.
렌이 나가자 로얀의 손이 움직였다.
탁!
그렇게 롱 소드의 빛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움직이기도 귀찮고 할 일도 없었기에 잠을 잤던 로얀이 눈을 떴다. 배는 이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건너편 2층 침대에는 배낭과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동안 같은 방을 배정받은 다른 두 명이 들어왔다 나간 것이다. 로얀은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자는 척하고 있었다.
로얀은 손을 베개 위로 올려 뒤적거리다가 손끝에 잡히는 물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찬 로얀은 방을 나섰다.
뚜벅뚜벅.......
방을 나선 로얀은 선실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끼루룩, 끼루룩......!
선실을 나온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흰 갈매기 떼였다. 그는 나무로 된 갑판 위를 걸어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볼 때마다 로얀의 눈썹이 날아다니는 갈매기처럼 변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풍이 그려진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상전과 해안가의 모래사장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사람들이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그들의 갑옷은 풀 플레이트 메일까지는 아니었다. 하나 지금 입고 있는 갑옷도 꽤 무게가 있어 보였다.
로얀은 전쟁터에서 저렇듯 생명보다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겪어보았다. 전쟁터를 자신을 뽐내는 현장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뚜벅뚜벅.......
“엇, 형!”
로얀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뱃머리에서도 함선의 가장 앞부분은 다른 곳보다 많이 흔들려 상당히 위험하기도 하고 멀미가 들기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조용히 바다를 구경하고 싶었던 로얀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에는 달려오는 렌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히힛, 역시 바다를 보러 온 거지?”
끄덕.
부인하고 싶진 않았다.
고개는 렌을 향해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엘프.”
로얀의 입에서 잔잔하게 흘러 퍼진 말.
그렇다. 렌의 뒤편에는 그를 따라 로얀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엘프가 있었다.
그녀의 긴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로얀보다는 작지만 여자치고는 큰 키에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엘프였다. 푸른색 눈동자와 뽀얀 피부... 그녀의 모습은 말로만 듣던 엘프의 아름다움을 능가했다.
금발의 엘프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 로얀의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무슨 감정이 일었는지, 무엇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흠칫!
기운에 민감한 종족인 엘프는 로얀의 살기에 몸을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지자 로얀은 급히 그것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리아.......’
자신을 가지고 논 드래곤. 한때는 정말 사랑했던 여인. 그녀가 엘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리아는 엘프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랐다.
렌은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중간에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나섰다.
“형, 이분은 A급 용병이시자 엘프이신 세리나님이야.”
뚜벅뚜벅.......
로얀은 렌의 말을 흘려버리며 세리나에게로 다가갔다.
세리나는 그가 다가오자 미소를 지었다. 엘프다운 인사였다.
뚜벅뚜벅.......
“엘프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다시 보고 싶진 않군요.”
로얀은 세리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스쳐 지나가 버렸다.
세리나는 태어나서 저런 부류의 인간은 처음 겪어보기에 렌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잘못했니?”
“아니에요.”
렌은 발꿈치를 들어 세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엘프에게 차인 적이 있나 보죠, 뭐.”
빙긋.
세리나는 웃으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렌은 그녀의 뒷모습과 제일 앞쪽에 위치한 돛대에 몸을 기대고 있는 로얀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뚜벅뚜벅.......
렌은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끼루룩, 끼루룩......!
혼자 남은 로얀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다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다의 향기에 취했다.
* * *
콰르릉......!
쿠쿠쿵.......
고오오......!
“폭풍이다!”
“와아아......!”
세 척의 거대한 함선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유령해적단이 있는 섬은 고작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한데 출발한 지 딱 하루 만에 폭풍을 만나다니,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콰르릉......!
하늘이 놀란 건 바다가 요동쳐서일 것이다. 바다는 흰 거품을 뿜으며 이리저리 출렁였다.
“어서 음유시인을 불러라!”
타타탁!
한 남자의 외침이 있은 직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갑판 위를 울렸다.
끼이익!
잠시 후, 선실 안에서 렌이 뛰어나오더니 뱃머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뱃머리에 닿았다.
“로얀 형!”
렌은 멀리서 로얀이 보이자 다급히 외쳤다. 그가 이런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곳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여전히 뱃머리 가장 앞부분에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그곳에서 여유있게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점이라면 일어서 있다는 것 정도였다.
“렌 군!”
누군가의 외침에 렌은 로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둘러 하프를 꺼내 들고는 돛대에 등을 기대고 자리에 앉았다.
“허험! 후우웁, 후우우.......”
헛기침을 하고 렌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여자의 그것처럼 작고 가냘파 보이는 손을 하프로 가져갔다.
띠리링, 띠링.......
하프의 실이 그의 손에 따라 출렁이는 순간 그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푸르른 바다여
화내지 마요
그대 품에 잠든
아기가 깨려 하잖아요
그의 신비한 음성이 바다 가득 울려 퍼졌다. 로얀은 어느새 눈을 감은 채 렌 옆에 앉아 있었다.
띠리링, 띠링.......
잠시 동안 하프 음만이 바다의 바람을 탔다.
푸르른 어머니여
흰 손 펴세요
어서어서 아이를
달래주어야죠
띠리링, 띠리링, 띠링.......
“와아아아......!”
렌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흐렸던 하늘도 푸르게 변해 있었고 미친 듯이 요동치던 바다도 잔잔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로얀이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아쉽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
“한 곡 더 해봐.”
그 말에 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유시인도 날씨를 조종하려면 많은 힘이 든다고요.”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가냘팠다. 그러자 로얀이 감았던 눈을 뜨고 렌을 향해 물었다.
“잠든 아이는 뭘 뜻하는 거지?”
“그야... 바다에는 많은 정령들이 산다고 해요. 신비한 그 정령들은 아마 포근한 바다 위에서 모두 잠을 자고 있을 거예요.”
“네가 지은 거군.”
“물론이죠! 쿨럭!”
무리하게 대답하던 렌은 기침을 했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헤에, 그래야겠네요.”
“이번 싸움에서 너의 목숨만큼은 지켜주마.”
씨익.
렌은 활짝 웃어 보이곤 선실로 들어갔다. 로얀은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잠을 잔다.......”
그의 눈에는 바다 위에서 뛰놀고 있는 푸른색 여자아이와 초록색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마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인 듯했다.
로얀은 폭풍이 쳤을 때를 떠올렸다. 출렁이는 파도를 타며 즐거워하던 정령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잠은 무슨.......”
그도 정령왕인 이상 정령이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정령과 친한 엘프라 해도 계약한 정령이 아닌 이상에는 보기가 힘들었다. 굳이 보려고 한다면 볼 수는 있었지만, 그러려면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했다.
로얀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
로얀이 탄 배가 몬드를 떠난 지 정확히 이틀이 지나고 또다시 아침이 밝았다.
바람은 매우 잔잔하게 불어 배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가는 함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형! 어제도 여기서 밤샜죠?”
그러나 로얀은 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뱃머리에 나와 가장 앞에 있는 돛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렌은 로얀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바다를 좋아하지만 로얀처럼 저렇게 심하진 않았다. 이건 중증이었다.
몬드를 떠나 항해를 하면서 로얀이 밤에 선실에서 잠을 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벌써 두 번의 밤을 거쳤지만 그는 선실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로얀은 렌이 또 옆에서 조잘거리며 따지려 들 것 같아 결국 입을 열었다.
“난 바다를 처음 보았다.”
그제야 렌은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볼 수가 없었다. 여행자가 아닌 이상에는 마을을 잘 나가지 못하는 일반 평민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렌은 로얀이 바다와 떨어진 먼 곳에서 왔다고 생각했지만 팔레인에서 바다까지는 사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항구는 없었지만 바다는 팔레인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었다.
“형이 살던 마을 이름이 뭐예요?”
“.......”
로얀은 팔레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다를 응시했다.
번뜩!
그의 흑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바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롱 소드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르릉.......
“히이익!”
후닥닥!
렌은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번뜩이는 검을 보고는 엄청난 순발력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방어를 하기 위함인지 어느새 얼굴과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이 뚝뚝 떨어지는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을 들어봤자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스윽.
로얀은 몬드에서 샀던 숫돌을 꺼냈다. 그리고 검을 갈기 시작했다.
치이익, 치이익.......
로얀이 검을 손질하자 렌은 다시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죽기 전의 마지막 발악이죠.”
로얀은 렌의 실없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함선 세 척, 소형선 두 척.”
“네?”
렌은 갑자기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마중 나온 모양이다.”
“누가요?”
“해적.”
“.......”
슥슥슥.
둘 사이에 숫돌이 검날을 스치는 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렌이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으아아아아......!”
타타탓!
그는 갑판 위를 달렸다.
“해적이다!”
“뭐!”
렌의 한마디는 함선 여기저기서 무료함에 질려 있던 사람들을 일깨웠다.
타타탁!
함선이 소란스러워졌다. 세 척의 함선 모두가 전투 준비를 하며 해적선을 파악하기 위해 들썩거렸다. 갑작스런 소동은 십여 분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바다 어디에도 해적선은 보이지 않았다.
뚜벅뚜벅.......
“렌, 어디에 해적이 있다는 거니?”
렌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음성을 전한 이는 엘프인 세리나였다. 그녀 뒤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데 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렌은 순간 당황했다. 설마 그 무뚝뚝한 로얀이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할 줄이야!
“그, 그게... 로얀 형이 해적이 왔다고.......”
그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등을 돌린 채 검을 손질하고 있는 로얀의 등을 찔렀다. 세리나는 렌이 저 사람에게 속은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녀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아무래도 네가 속았나 보다.”
“윽!”
렌은 세리나 뒤로 몰려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곤경에 처한 그를 구해 준 건 세리나의 맑은 음성이었다.
“저... 렌이 너무 순진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 그러죠.”
남자들 모두는 세리나가 몸을 돌려 말하자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휘오오오!
세 척의 함선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나아갔다.
촤아아......!
“이, 이......!”
렌은 폭발할 듯 얼굴이 붉어져 로얀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그가 걱정되어 세리나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로, 얀, 형!”
“시끄러워.”
스윽.
로얀은 숫돌을 내려놓고 흰 천을 꺼내 검날을 닦았다. 그 모습에 렌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으아아아! 제가 형 때문에 얼마나 창피를 당한 줄 알아요!”
그러자 검 손질에 전념하고 있던 로얀이 처음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난 거짓말한 적 없다.”
스윽, 스윽.......
그는 다시 검을 손질했다. 한데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렌의 뒤를 따라왔던 세리나는 로얀의 눈동자에서 그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지만 바다에는 해적의 해 자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푸른 대해뿐이었다.
“흥!”
렌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로얀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세리나가 달래어 그 주변에 앉게 하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에 간간이 로얀이 검을 손질하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두 개의 검을 모두 손질하는 데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동안에도 렌과 세리나는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주로 말을 하는 건 렌이었고 세리나는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스릉, 탁!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찬 로얀이 몸을 일으켰다.
스윽.
우두둑!
어젯밤부터 이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시원한 뼈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얀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근육을 풀었다. 그의 몸 풀기는 30분간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바다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둑, 우두둑!
자신이 화가 났음을 보여주려는 듯 로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렌은 입이 너무도 근질거려 결국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일어나신 거예요?”
“녀석들이 오니까.”
“아, 진짜! 또 그 소리.......”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리치려던 렌의 목소리가 멈춰버렸다. 아니, 누군가에 의해 끊어졌다. 돛대 위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전방에 함선 세 척! 소형선 두 척!”
타타탓!
쿵쿵쿵!
세 개의 함선에서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투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렌과 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돼!”
뚜뚜뚝!
마지막으로 손가락의 마디를 푼 로얀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다섯 척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냥 보였다.”
그냥 보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지금도 바다 저 멀리에 있어 매우 희미하게 보이는 해적선을 무려 2시간 전에 어떻게 볼 수 있었단 말인가?
해적선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지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두 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해적선은 그들 바로 눈앞까지 오게 되었다. 로얀의 황당한 대답에 멍하니 해적선을 응시하던 렌과 세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렌, 어서 선실 안으로 들어가.”
세리나는 그렇게 당부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옆 함선과의 사이에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은 후 그쪽으로 건너갔다.
로얀은 세리나가 뭘 하건 관심을 전혀 두지 않고 해적선만을 응시했다. 그런 그를 향해 렌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로얀에게 거짓말했다고 화냈던 건 일단 사과했다. 그런 렌의 귓가로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
“싫어요.”
렌은 로얀의 말에 딱 잘라 거절하며 바다를 보았다.
“바다에서의 전투! 노래의 소재 거리로는 딱이죠!”
“내 허락 없이 죽지나 마라.”
로얀과 렌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싸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로얀이 있는 함선은 단풍기사단의 단장이 타고 있는 함선을 기준으로 왼쪽 편에 있었다. 단풍기사단의 단장이 타고 있는 함선에는 대마법사인 메리슨과 세리나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선두에 서서 멀리서 다가오는 해적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세리나는 메리슨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실라페.”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초록빛 바람으로 이루어진 새 모양을 한 실라페가 나타났다.
“실라페, 바람의 칼날로 저 배의 돛대를 잘라줘.”
세리나의 말에 하늘을 날던 실라페가 날개를 크게 펼쳤다.
쉐에에엑!
그러자 실라페의 날개에서 한 줄기 반월의 바람이 쏘아져 나갔다.
스팟!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해적선의 돛대가 싹둑 잘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자리를 떠나 옆으로 쓰러졌다. 그 거대한 돛대가 옆의 해적선을 덮쳤다.
쿠쿠쿠쿠쿵......!
“으아아악!”
해적선이 크게 출렁였고 해적들의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몇 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돛대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세리나의 최종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던 듯 그녀는 옆에 있는 메리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염의 불꽃이여, 바람마저 태우며 나아가 불의 장엄함을 뽐내라. 인페르노!”
화르르륵!
메리슨이 주문을 외우자 마나의 기운이 그의 손에서 화염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화염으로 변해 해적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화르르르......!
“크아아악!”
“부, 불이다!”
해적들은 갑자기 떨어진 뜨거운 불꽃에 허둥지둥,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쓰러진 돛대로 인해 함선 두 척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한 척에서 시작된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옆의 배에 옮겨 붙었다. 그로 인해 두 척의 해적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메리슨은 마법을 쓰고 난 뒤 뒤로 물러났다. 5서클의 인페르노 마법을 펼친 그였지만 여유있어 보였다. 그는 현재 6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기에 5서클의 마법을 썼다고 해서 쉽게 지치지는 않는 것이다.
세리나는 활활 타오르는 두 척의 해적선에게서 시선을 돌려 실라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러자 실라페는 그녀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척의 함선을 잃어 분노한 해적들은 그 분노를 담아 불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피핑!
“불화살이다!”
화살에 기름을 바른 천을 묶어 불을 붙인 화살이었다. 그것은 따로 몸을 피할 곳도 없고, 모든 것이 나무로 된 배 위에서 펼치는 해상전에서는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실라페를 돌려보낸 세리나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이미 예상했던 공격이었던 것이다.
“실라이론.”
휘리릭!
세리나는 몸 속에서 쭈욱 빠져나가는 마나 때문에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그녀가 소환한 정령은 바람의 상급 정령이었던 것이다.
실라페보다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실라이론을 향해 세리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 바람의 장벽을 쳐줘.”
그러자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윽고 실라이론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는가 싶더니 강한 바람이 세 척의 함선을 감쌌다. 화살 같은 원거리의 물리적 공격을 막아주는 장벽이었다.
세리나는 창백한 얼굴로 메리슨을 바라보았다.
“메리슨님, 최대한 버텨도 10분이에요.”
“허허, 수고하셨습니다. 뒷일을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세리나를 치하한 메리슨이 뒤에 있는 단풍기사단 단장인 레토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는 반듯한 용모에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섞인 금발의, 중후한 인상을 지닌 40대 초반의 검사였다.
“모두 돌격하라!”
촤아아......!
그의 외침과 함께 세 척의 함선은 해적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레토의 외침이 무색하게 배는 기어가는 수준을 겨우 면한 정도의 느린 속도로 나아갔지만 해적들은 돌격할 수 있는 함선이 한 척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해적들의 남은 한 척은 멀리서 끊임없이 불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또한 인페르노로 인해 침몰한 두 척의 함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해적들이 헤엄을 쳐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 척의 함선에 달라붙어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형선 두 척에 타고 있던 백 명의 해적들도 일제히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을 쳐서 함선으로 다가왔다.
채채챙!
“와아아아......!”
세 척의 함선이 무대가 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세리나가 부리는 정령과 메리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흠... 인페르노라는 건 내 능력 밖인가?”
그는 다름 아닌 로얀이었다.
로얀은 인페르노의 마법수식이 흡수되지 않자 저 마법의 서클은 흡수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게 로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렌은 배를 타고 올라와 그를 덮치는 그림자를 보았다.
“형! 피해요!”
“시끄러워.”
스팟!
두 개의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푸화확!
로얀을 덮치려던 해적은 허공에서 몸에 엑스 자의 검상을 그리며 피를 뿌렸다.
“히이익!”
렌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로얀은 생각을 접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해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몸을 돌린 그는 렌을 향해 물었다.
“어째서 우리 측엔 궁수가 없지?”
그랬다. 로얀은 싸움을 하면서 자신이 속한 편의 함선에서 해적선을 향해 날아가는 단 한 발의 화살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해적들은 너무도 쉽게 배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렌은 배 위로 올라오는 해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선실로 몸을 피하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들린 로얀의 그 말에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고는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기 있잖아요.”
후닥닥!
로얀은 렌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가 가리킨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3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초록빛 머리카락의 남자로 커다란 롱 보우를 가지고 한 번에 두 발에서 세 발의 화살을 쏘았다. 한데 그가 쏘는 화살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쏘아져 나가 화살 하나에 꼭 한 명의 해적은 죽였고, 어쩌다가 두 명이 꼬치처럼 꿰어 죽기도 했다. 가히 명사수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다른 함선에 있는 세리나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입술까지 파리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람의 장벽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다행인 건 남은 해적선 한 대가 물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채챙......!
푸확!
로얀은 세리나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얼굴을 간질이는 나뭇가지를 베듯 해적들을 죽이며 활을 쏘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뚜벅뚜벅.......
그가 다가가자 헌터로 보이는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호오, 반갑구먼.”
“.......”
“하하! 같은 용병끼리 인사나 하고 지내자고.”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화살을 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있어 보였다.
로얀은 상대의 실력이 헌터 중에서도 뛰어난 편에 속해 약간의 호감을 느낀 데다가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다크로얀.”
“하하, 난 레인이라고 하네. 그리고 보시다시피 헌터지.”
로얀은 활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레인을 보며 그가 아마 남은 한 명의 A급 용병일 거라 생각했다.
로얀은 그의 뒤에서 다가오는 해적들을 처리했다.
레인은 자신의 뒤를 지켜주는 로얀을 보며 웃음 짓다가 조금 전 바다로 뛰어내렸던 녀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잠수하여 배를 파손시키기 위해 일부러 뛰어내렸던 것이다.
피피핑!
그의 손에서 떠난 세 개의 화살이 물 위를 헤엄치는 해적 세 명의 머리를 관통했다.
“메리슨님!”
화살을 날린 레인의 외침에 메리슨은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배의 난간으로 향했다. 그가 타고 있는 함선에는 오러 블레이드를 검에 씌우고 싸우고 있는 레토가 있었기에 해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전기의 사슬이여, 죽음으로 이어져라.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직!
그의 손에서 생성된 푸른 빛이 바다로 떨어졌다.
파지지직!
“끄아아악!”
“크아악!”
전기에 온몸이 감전된 해적들은 부들부들 떨다 사지가 뒤틀려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4서클의 체인 라이트닝이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전기의 사슬이여, 죽음으로 이어져라.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직!
메리슨은 계속해서 마법을 펼쳤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활의 시위를 당겼다.
“저기도 이제 처리됐군.”
“저기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겠습니까?”
“응? 저기?”
레인은 갑자기 물어오는 로얀의 말에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멀리, 해적들의 함선 한 척이 떠 있었다.
레인은 문득 자신이 있는 함선을 둘러보았다. 갑판에는 사지가 잘린 참혹한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로얀의 검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흠흠! 애로우 샷이라면 가능하겠는걸.”
“애로우 샷?”
“헌터의 유일한 기술이라고나 할까? 화살에 마나를 담아 쏘아 보내는 것이지.”
“근데 왜 지금껏 마나를 담지 않았죠?”
“그게... 헌터의 몸엔 마나가 아주아주 미약해서 그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거든. 한 마디로 일격필살!”
로얀은 그의 말에 선실 안으로 들어가 돛을 잇는, 상당히 긴 로프를 가지고 나왔다. 한데 그것을 화살에 묶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레인은 그가 하는 양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로얀은 로프가 묶인 화살을 레인에게 건넸다.
“이걸로 저 함선까지 닿도록 해주십시오.”
레인은 로얀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로얀은 로프의 반대쪽을 돛대에 묶었다.
“흠... 해적들이 금방 칼로 자를 텐데?”
“그 전에 죽이면 됩니다.”
“끙... 쩝! 그래, 알겠네.”
턱!
레인은 함선의 난간 위에 발을 올려놓고는 활의 시위를 최대한 끌어당겼다. 그런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끼이익!
스스스.......
순간 푸른 빛이 화살을 감쌌다. 그리고 레인은 눈을 뜸과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피핑!
슈아아앙!
화살은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해적선과의 거리가 멀어 레인이 쏜 화살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지만 헌터로서 거의 최고 수준에 이른 레인은 자신이 쏜 화살이 해적선의 난간에 정확히 꽂힌 것을 볼 수 있었다.
“휴우, 꽂혔군. 이제 어쩔.......”
레인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로얀이 이미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이미 로프 위를 달려 해적선의 대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크아아! 저 자식들은 뭐야!”
해적선의 함선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짐승의 포효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덥수룩한 수염에 머리가 큰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헤인이라는 이름의 해적으로 이번 출전의 총지휘를 맡은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싸움은 완전한 대패였기 때문이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라이던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크, 큰일났습니다!”
“또 뭐야!”
“이상한 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
헤인은 부하의 말에 급히 함선의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팟!
“응?”
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팟!
그림자는 함선의 갑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꺼꺼꺽.......”
푸화화확!
투퉁.......
헤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잘려 떨어져 내렸다. 코가 있는 부분을 검이 가로로 지나간 것이다.
뚜벅.
“넌 누구냐!”
“이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은 사람.”
해적들은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섬뜩한 모습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그를 공격해 왔다.
“와아아......!”
스걱!
“크아악......!”
푸화확!
로얀의 검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그때마다 해적들의 몸에서 피가 튀고 시체가 갑판 위를 굴렀다.
해적들은 로얀을 포위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쑥.
“.......”
로얀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몸을 숙였다. 그의 눈 안 가득 해적들이 발이 보였다.
스거거걱!
푸화확!
“끄아아아악......!”
로얀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해적들을 인정사정없이 베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빙그르르......!
스거거걱!
“커커컥......!”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해적들의 시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뚜벅!
주춤!
강철의 심장을 가졌을 것만 같은 해적들이 로얀 한 사람에 의해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모여주다니.......”
휘리리릭.
바람이 로얀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롱 소드를 휘둘렀다.
“바람의 칼날!”
쉐에에엑!
그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실라페가 썼던 바람의 칼날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일한 사람인 레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스걱!
푸화화확!
한 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해적들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들의 상반신이 양분되었다. 엄청난 피가 폭포를 이루었고 해적들의 상반신이 걸쭉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끝났군.”
순식간에 백오십여 명가량을 죽인 그는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다 다시 멈췄다.
“한 명이 남아 있었나?”
“히이익!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해적들의 시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열다섯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에 바람의 칼날에 베이지 않은 듯했다.
뚜벅뚜벅.......
로얀은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었다.
“잘 가라.”
“으아아아......!”
로얀은 소년의 목 언저리에서 검을 멈추었다. 막상 죽이려고 검을 들긴 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였기에 죽이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턱!
그는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채 어깨에 들쳐 메고는 자신이 밟고 왔던 로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로프를 타고 다시 건너온 로얀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레인을 향해 소년을 던졌다.
로얀은 옆의 함선에서 쓰러진 세리나를 선실로 옮기는 메리슨을 보고는 자신도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하군. 그 녀석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뚜벅뚜벅.......
로얀은 등을 돌려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실 안의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그냥 잘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가 빨리 잠들고 싶은 것은 어쩌면 창백한 안색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엘프 때문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실로 돌아온 그는 피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가 잠든 사이 구석에 처박아 둔 옷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와 선실의 바닥을 적셨다.
* * *
쏴아아아......!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거대한 함선 세 척을 두 개의 달이 비추어주었다.
어두컴컴한 밤바다는 고요하기만 했다.
큰 피해 없이 해적선의 공격을 막아내고 큰 승리를 일궈낸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은 갑판 위에서 자그마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승리로 인한 기쁨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일을 위해서였다.
내일 오후쯤이면 해적들이 있는 흑섬에 도착하기에 미리 긴장을 풀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은 내일부터였으니 지금 옆자리에 있는 동료가 내일 밤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내일 전투에 지장이 갈 정도의 술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 몇 잔의 술을 사람들은 불만없이, 나름대로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싸움이 끝난 직후 자러 들어갔던 로얀은 아직도 꿈속인지 갑판 위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얀을 보러 온 몇몇 인물들은 모두 그의 지정석이라 할 수 있는 뱃머리에 모여 있었다. 바로 단풍기사단의 단장인 레토를 비롯해서 메리슨과 세리나, 레인과 꼬마 남자아이, 그리고 렌이었다.
그들 중 렌과 세리나는, 세리나가 정신을 차린 후 바다를 보며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으로 같이 나와 함선을 돌다가 뱃머리에 로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렌이 이곳으로 가자고 해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인이 뱃머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레인은 해상전에서 로얀이 펼친 기술에 대해 묻기 위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함선 한 척을 유령선으로 만들어 버린 로얀이 짐짝처럼 던지고 간 전직 해적이었던 소년이 있었다. 한데 이 네 사람이 만나고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메리슨과 레토가 로얀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서 이렇게 여섯 명이 뱃머리에 모여 있게 된 것이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레토였다.
“대체 로얀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레토는 해상전이 벌어졌을 때 우연히 옆 함선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쌍검술의 검사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로얀만큼 빠르고 정확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해적들은 온몸을 떨며 피분수를 뿜었던 것이다.
해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로얀은 오로지 싸움만을 위해 태어난 투신 같았고, 지옥의 문지기라는 무시무시한 발록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
레토는 로얀이 B급 용병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나 그가 보인 움직임과 건장한 사내의 허리를 가볍게 베어버릴 정도의 힘은 결코 B급 용병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소드 마스터의 움직임을 보는 듯했다. 그것도 숙련된 중급의 소드 마스터의 움직임.
그는 로얀이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소드 마스터라면 적어도 A급 용병은 될 수 있었다. 한데 A급 용병보다 보수도 적을 뿐더러 대우도 다른 B급 용병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첩자?’
레토의 입장에선 이론 제국의 첩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괴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돌연변이.”
렌, 세리나, 레인의 로얀에 대한 평가였다.
모두의 시선이 레인에게로 모아졌다. 렌과 세리나가 대답을 한 직후 레인을 바라보자 메리슨과 레토도 덩달아 그를 바라본 것이다.
“왜, 왜 그러시는지......?”
레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렌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레인 아저씨, 로얀 형을 알아요?”
“아저씨라니! 난 아직 총각이라고! 그리고 로얀이라는 청년은 해상전 때 만났지.”
아저씨라는 말에 굉장히 민감한지 레인은 발끈해서 외치고는 로얀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근데 왜 돌연변이라는 거죠?”
엘프인 세리나까지 레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해상전을 겪고 나서 로얀을 매우 좋지 않게 보았다. 어떻게 같은 동족인 사람을 표정 한 번 바뀌지 않고 무 자르듯 베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세리나의 말에 레인은 헤실거리며 말했다.
“그야 그 녀석이 실라페의 바람의 칼날을 썼거든.”
“.......”
몇 초간의 정적.
“푸하하하!”
“하하하!”
“호호호!”
“허허허.......”
레인의 말에 해적이었던 소년을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반응에 레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끙... 진짜라고!”
“푸하하! 아저씨, 사람이 어떻게 정령의 기술을 써요?”
“호호호, 그건 렌의 말이 맞아요. 정령의 기술은 정령 고유의 기술이랍니다.”
렌의 말을 세리나가 뒷받침해 주었고, 그 뒤로도 메리슨과 레토가 그를 놀려먹었다.
역사상 정령의 기술을 펼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령왕이라면 자신의 속성을 지닌 기술을 모두 쓸 수 있을 테지만 로얀이 정령왕일 리는 없었으니 조금 전 레인의 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건 엘프인 세리나가 증언한 일이었다. 로얀이 정령왕이라면 엘프인 그녀가 그 기운을 느꼈을 텐데 그녀는 그에게서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아무리 속성이 다르다 해도 정령왕에게는 인사를 하는 것이 법칙이었거늘 그녀가 소환한 정령들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웃음이 진정될 때쯤 렌이 레인 옆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인 누구예요?”
“엇! 이 녀석, 취했잖아!”
레인은 화들짝 놀라며 잠든 소년을 흔들다 등에 업었다. 아무래도 자신만 빼놓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심심해서(?) 술을 들이켠 듯했다.
“하하, 이거 참!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이 아인 해적인데 로얀이 저에게 주면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레인은 웃으며 소년을 등에 업고는 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 소년이 해적이라고 하자 놀라는 한편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소년이 해적질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십중팔구 강제로 끌려와 해적이 된 경우였다.
“와아! 로얀 형이 적을 베지 않을 때도 있구나.”
“그 사람도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군요.”
렌은 신기해 하며 탄성을 터트렸지만 세리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생명을 중시하는 엘프의 입장에서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인 로얀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비록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녀 자신도 용병일을 하며 생명을 해한 적이 많았지만 로얀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짚단을 베듯 사람을 베진 않았다.
“허허허!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렌과 세리나의 반응에 메리슨과 레토는 웃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레토가 얼굴을 굳히며 메리슨을 바라보았다.
“만약 첩자라면 너무도 두려운 적입니다.”
“허, 양날의 검이라는 건가?”
그들의 반응에 세리나는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첩자 같지는 않아요. 그 사람의 눈동자는 너무도 슬퍼 보였거든요.”
“헤에! 누나, 로얀 형이 싫은 건 아니지?”
“슬픈 눈동자를 가진 것과 생명을 함부로 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그리고 난 그처럼 살아 있는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사람은 싫어.”
세리나는 또다시 로얀이 싸우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가 휘두르는 검엔 살기가 너무 짙었다. 그녀는 그 기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쏴아아......!
이렇게 파티는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고, 세 척의 함선은 여전히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