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홍대 가다-100화 (완결)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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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학철은 꿈을 꾸었다.

잘 모르는 세계에서 잘 모르는 전쟁에 휘말려 잘 모르는 전장에서 잘 모르는 전투를 지휘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학철은 마치 베테랑 지휘관처럼 행동했고 그래서 꿈에서 깨었을 때 그것이 진짜 꿈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학철은 입원했다.

의사는 충격에 의한 단기 기억상실인 것 같다고 했다. 학철은 흑마법사를 쏘았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리얀의 견해는 달랐다.

“마법의 후유증이다. 꿈을 꾸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리얀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학철은 자신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흑마법사를 쏜 바로 그 순간을 제외하면 기억도 온전했다.

입원 이틀 만에 퇴원했다. 정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리얀이 말한 것처럼 꿈 때문에 나은 것인지,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약 덕분에 정상이 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학철. 전설이 된 소감이 궁금하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리얀이 물었다.

“…전설요?”

“그래. 12대륙 8대양을 위협한 흑마법사를 죽인 전쟁의 종결자. 학철의 이름은 전설이 되어 역사 속에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기 힘든 소리였다. 학철은 그저 아, 예,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리얀에게 듣기로 총사령관은 흑마법사를 살해한 살해자의 영광을 다른 세계의 아무 능력도 없는 현지인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했다.

흑마법사의 잔당을 처리하는 전투는 저녁이 되기 전에 끝났다. 빛의 군대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세계로 돌아갔다. 쟈론도, 세이라도, 오툴도, 이세계인들은 모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해 질 무렵, 차원이동문은 닫혔다.

그리고 리얀은 이곳에 남았다.

***

시간에는 기묘한 속성이 있다.

시간은 늘 일정하게 흐르지만 어떤 때는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정말로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길고도 길었던 하루를 보낸 학철은 그다음 석 달이 정말이지 빠르게 간다고 느꼈다.

물론 그 석 달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홍대에 전 세계의 언론인이 찾아왔다. 다들 도대체 홍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어 했다. 북한의 공격이라는 설, IS의 테러라는 설, 주식 폭락을 노린 작전 세력의 설계라는 설, 심지어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전 세계 언론이 취재 경쟁에 나섰지만 다들 일어난 사건의 일부만 알아낼 수 있었을 뿐 진실에 접근하지는 못했다.

한동안 홍대 주변에는 추모의 열기가 뜨거웠다.

원인 모를 사고로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꽃다발과 촛불의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 꽃다발과 촛불이 놓였고, 그 앞에서 많은 사람이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졌다.

정부의 공식 발표는 원인불명의 자연재해라는 것이었다.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뭔가 복잡한 음모가 있을 거라는 게 대부분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스캔들이 터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천천히 식어갔다.

가수 마셰라가 이번 홍대 사태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속사 대표인 리키 곽은 근거 없는 소문에 대한 명예훼손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햇살용역건물의 건물주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정보부 소유 건물의 명의를 가지고 있는 바지사장 역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정보부에서 받는 급여가 쏠쏠해서 사장은 불만 없이 바지사장 역할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오브라이언이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

학철이 병원에 입원한 직후, 리얀은 진 팀장을 만났다.

“학철과 게스트하우스 사장에게 약속한 금화 1,000개가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리얀은 꽤나 단호한 태도로 진 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는 이곳의 관습과 절차가 있어요. 그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진 팀장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학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은 63억 원이었다. 예상보다는 많은 액수였지만 역시나 100억 원보다는 적었다.

63억 원은 홍대에 5층짜리 주상복합을 소유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학철은 정보부 특수부대 거점 건물 부근에 5층짜리 주상복합의 건물주가 되었다. 그 과정은 주로 홍 대표가 도왔다. 물론 수수료는 홍 대표의 몫이었다.

학철이 소유한 건물 2층에 세입자가 들어왔다. 공식적으로는 어떤 외국인 관광객의 장기 체류를 위한 주거공간이었다. 물론 그 외국인 관광객은 리얀이었다.

리얀 리얀. 성과 이름이 같은 라트비아와 벨라루스 혼혈인 우크라이나 관광객. 리얀에게 제공된 신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관광객이었지만 리얀의 공식적인 위치는 ‘이세계와 소통을 위한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부 고위층과 국가정보부 일부뿐이었다.

리얀의 월세는 3층 세입자가 부담했다. 3층 세입자는 국가정보부 2과 거울 팀이었다.

거울 팀의 대외용 위장 명칭은 ‘햇살 컨설턴트’였다. 당연히 진짜 회사는 아니었다. 진 팀장이 대표역할을 했고, 미해가 실무책임자인 정보부 사무소였다. I.O로 한가히 요원도 이곳으로 출근했다.

이들이 맡은 임무는 리얀의 관리였다. 그리고 홍대 부근에서 벌어지는 외국인 관련 첩보 수집도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여기서 ‘외국인’의 범주에는 ‘이세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대 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차원이동문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새로운 개척지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이곳에 남은 유일한 이세계인, 리얀이 있었다.

“나는 차원이동문을 열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차원이동문이 열린다면 그들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이곳 정부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곳의 대사인 것이다.”

리얀은 자신이 대사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정부에 몇 가지 요청을 했다. 그중 하나가 반드시 수행원으로 학철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리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학철의 건물 4층에는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당분간 계속 그럴 예정이었다. 만약에 ‘이세계’에서 누군가 찾아온다면 4층 공간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학철은 5층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했다. 갑작스럽게 건물주가 된 걸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간신히 살아가다가 갑자기 월세를 받아 생활하게 되었으니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월세가 들어온다. 거기다가 매달 정보부 I.O 수당도 들어온다. 통장에는 수십억 원의 거액이 예치되었다.

학철은 돈이 생기자 학자금 대출부터 갚았다. 복학을 준비하면서 집에는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했다. 당첨된 돈과 대출을 합쳐서 건물을 샀으며, 당분간은 대출을 갚으며 생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건 홍 대표의 조언을 따른 거였다. 그래야 시끄러운 일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가끔씩 미해가 5층으로 찾아왔다. 주로 묻는 것은 리얀의 최근 근황이었다. 학철은 미해를 다시 만나는 게 불편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기분 좋기도 했다. 자랑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자랑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해는 학철에게 주어진 보상을 매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오늘은 또 왜?”

학철이 미해에게 거실 소파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일이지, 내가 다른 거로 왔겠어?”

미해는 아주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학철은 그런 미해의 반응이 싫지 않았다.

“차 뭐 마실래? 커피 괜찮은 거 있는데. 커피 싫으면 카모마일도 있고.”

학철은 커피나 차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미해를 보면 꼭 이렇게 허세를 부리고 싶어졌다.

“차, 생각 없어. 그냥 용건만 물어볼게. 리얀, 어제 뭐 했어?”

“뭐 하긴. 그냥 집에 있었지.”

정보부 요원이 이렇게 직접 학철을 찾아와서 묻는 건 상대가 리얀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류의 도청 장치도, CCTV도 리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리얀은 주변에 있는 모든 전자기기의 존재를 알고, 또 그것을 조종할 수도 있다.

“너, 뭐 알면서도 말 안 하고 그러면 그거 보안규정 위반이다? 위반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돈 다 뺏기고, 감옥 간다? 응?”

“그러시던지.”

학철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면서 피식했다.

“아, 맞다. 가히 씨, 오늘 출근했어?”

학철은 가히가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굳이 관심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가히의 근황을 물으면 미해가 불쾌해한다는 걸 알고는 굳이 가히의 근황을 묻곤 했다.

“당연히 출근했지. 지금 일해. 왜? 보고 싶어? 불러 줘?”

미해가 발끈한 티를 냈다. 학철은 말 대신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미해는 보안규정을 들먹이며 다시 한번 학철을 협박한 다음 3층으로 돌아갔다. 학철은 소파에 앉았다.

리얀이 뭘 하는지는 학철도 잘 모른다. 리얀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리얀의 거처에는 요청에 의해 컴퓨터도 설치했고, 인터넷도 깔았다. 아마 어떤 종류의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

학철은 리얀의 호출을 받았다.

- 학철. 내 방으로 와라.

리얀은 학철의 핸드폰을 조작해 음성으로 호출 메시지를 전달했다.

‘무슨 일이지?’

2층 리얀의 방으로 향하며 학철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리얀은 식자재와 옷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뭔가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투명한 원통이었다. 학철은 굳이 용도를 묻지 않았다.

“룩칼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흑마법사의 다른 수하들도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리얀은 친절하게도 원통을 사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만약을 대비해 원통에 에테르를 모아두려는 것이다. 흑마법사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늘 고맙다, 학철.”

리얀이 말했다. 학철은 괜찮다고 말하고는 5층 방으로 돌아갔다.

만약을 대비하는 건 아마도 리얀이 군인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철이 생각하기에 그건 지나친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설마,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또 일어나겠어?”

학철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TV를 켰다. 음악방송에 일리스 공주, 마셰라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셰라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이 찾아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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