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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은 흑마법사가 웃는 얼굴을 보면서, 리얀이, 또 쟈론과 세이라가 옥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어쩐지 아련한 느낌이 드는, 작별 인사 같은 미소였다.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다. 군인들이 조금 전 흑마법사가 홍대 주변으로 흩뿌린 괴물들과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환한 빛의 구체 속에 있던 병사들도 함께 싸우고 있을 것이었다.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조금 전 킬타스의 번개를 피해 달아난 용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사로잡혔고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결이라도 할 생각인가 본데, 그건 불가능해. 내가 그대의 에테르는 완전히 동결시켰으니까, 흑마법사여. 에테르 없이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아! 여기서 뛰어내릴 수는 있겠군. 쟈론이 없다면, 아니, 여기 아무도 없다면 혹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총사령관이 흑마법사를 조롱하듯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법이라고.”
“끝까지 허세로군.”
총사령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그때 했던 내 말은 틀렸어. 마법사도 결국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오기는 하는군.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마법사는 결코 적에게 자신을 넘겨주지 않는 법이야.”
흑마법사가 말했다.
“허허허. 그래? 그렇다면 무슨 수로? 에테르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마법사가 도대체 무슨 수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흑마법사여. 말을 해 보라.”
“리얀,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마지막에 이렇게 잠시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흑마법사는 총사령관의 말을 무시하고 리얀을 보고 말했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 흑마법사.”
“이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그냥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같은 마법사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리얀은 흑마법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흑마법사는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전쟁은 끝났어. 나를 잡으러 여기까지 온 그대의 의지도 여기서 끝이지. 이젠 어쩔 셈이야?”
흑마법사가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리얀을 향해서 물었다. 리얀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지. 전리품을 나누어야 하거든. 어떤 자들은 더 많이 가지고, 또 어떤 자들은 더 많이 가진 자들보다 더 가지려고 하지. 리얀. 너는 어떤 전리품을 받게 될까?”
흑마법사가 웃었다. 한쪽 입술로만 웃는 웃음이었다.
“거참, 쓸데없는 걱정 하네. 전리품이고 뭐고 네가 가질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흑마법사.”
쟈론이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학철이 보기에는 오히려 흑마법사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걸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알고 있다, 흑마법사.”
리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총사령관을 비롯한 모두가 리얀을 주목했다. 리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얀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흑마법사 말의 어떤 부분이 리얀의 감정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나의 존재 가치는 적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 있을 때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내 마법은 강력하고 그 때문에 내가 마법사 군단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말은… 전쟁이 끝나면 나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가치 없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야. 아주 불편한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되는 거지.”
흑마법사는 이렇게 말하더니 키득거렸다.
“흑마법사여!”
총사령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쟈론. 흑마법사의 입을 막아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못하게. 흑마법사여. 궁지에 몰린 마법사가 선택한다는 것이 고작 상대를 도발하는 것이냐? 도발해서 활로를 찾겠다는 것이냐? 어리석은. 쯧쯧.”
총사령관은 흑마법사를 질책하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서둘러 대화를 막으려는 기색이 강했다.
“아니. 그저 같은 마법사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것뿐이야. 마지막으로 말이지.”
흑마법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학철은 혹시 하늘이 열리며 뭔가 불길한 것이 쏟아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흑마법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하늘에는 그저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리고 조금 전에 열린 빛나는 공간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물론 모든 사냥개를 잡는 건 아니지. 하지만 언제고 주인을 물어뜯을지 모를 무시무시한 사냥개를 굳이 놔둬야 할 이유가 있을까? 거기다가 그 무시무시한 사냥개한테는 엄청나게 큰 보상을 해 줘야 할 입장인데? 응?”
“흑마법사여! 입 다물어라! 쟈론! 다시 입을 열면 흑마법사의 팔을 베어라!”
총사령관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들었지? 조용히 해.”
쟈론이 흑마법사의 오른쪽 어깨를 겨누고 말했다.
“총사령관님. 저는 결코 흑마법사의 말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리얀이 총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리얀 정도의 마법사가 흑마법사의 마법에 흔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흑마법사의 말은 맞습니다.”
리얀이 말하자 총사령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흑마법사가 말한 것이 제가 이곳으로 온 이유입니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더니 총사령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애초에 12대륙 8대양이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흑마법사가 공동의 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12대륙 8대양은 흩어지고 대립할 것입니다. 그때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저의 존재는 서로에게 부담이 될 뿐입니다. 어차피 저는 전쟁이 끝나면 그 효용이 다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얀….”
총사령관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이름을 불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군자금으로 지급된 황금이 있습니다. 그 황금이라면 어디에서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 것입니다. 이미 이곳 사람들 중에 저를 도와줄 사람들도 찾았습니다.”
리얀과 총사령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학철은 흑마법사를 보았다. 흑마법사는 하늘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눈에 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간절한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흑마법사가 학철을 노려보았다. 학철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라? 이거, 어제 리얀이 정신감응 마법을 나한테 썼을 때 느낌하고 비슷한데….’
학철은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리얀에게 받았던 느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 마치 학철 주변의 모든 사물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너는 마법사다. 그리고 이곳에는 에테르가 없어!”
“에테르 없이도 마법사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증명했습니다.”
학철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학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이곳 사람들은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이미 차원이동문으로 두 세계 사이에는 통로가 생겼습니다. 이곳을 오가는 외교가 가까운 장래에 꼭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리얀과 총사령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학철은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흑마법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타앙!
학철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학철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학철!”
쟈론이 학철을 덮쳤다. 학철은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는 걸 쟈론이 막아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바닥에서 학철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이마 한복판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흑마법사의 몸이 학철 바로 옆으로 쓰러졌다.
쟈론이 학철의 손목을 쥐었다. 학철은 자신의 손에 토카레프 권총이 쥐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가만있자… 여기 총알이 한 발, 아니면 두 발이 남았을 텐데….’
학철은 토카레프 권총의 장전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되어 있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이제 총탄은 남아 있지 않았다. 흑마법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간 것은 마지막 총탄이었다.
‘남아 있었던 건 한 발이었구나….’
학철은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심한 어지럼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갑자기 구토가 밀려 올라왔다.
“맙소사! 리얀! 당장 흑마법사를 살려! 어서!”
총사령관이 쓰러진 흑마법사를 보며 소리쳤다. 이미 리얀은 흑마법사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리얀이 말했다.
“하루 네 번 칼에 맞았던 사람도 살리면서, 고작 총 맞은 사람을 못 살려?”
쟈론이 학철을 누른 상태로 리얀에게 물었다.
“나는 마법사지 신이 아니다.”
리얀이 답했다.
“잠깐만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집중되었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나요?”
세이라였다. 세이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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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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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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