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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홍대 가다-97화 (9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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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의 양으로 마법사의 싸움에서 승패가 갈린다고 한다면, 이미 승부는 났다는 흑마법사의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파치 헬기의 등장은 충분히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 거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다가 마법으로 아파치 헬기의 공격을 막는다면… 흑마법사만 아파치 헬기의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어!’

학철은 이런 생각을 리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철은 그저 리얀의 눈을 바라보기만 할 뿐,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흑마법사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리얀 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어야 할 텐데….’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나는 그대의 힘을 잘 알고 있어. 그대는 그 무식한 폭파 마법으로 내 군단을 통째로 구워버린 적도 있지. 그대 단 한 사람 때문에 나는 부대를 나누어야만 했고, 그 결과로 그대의 부대에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결코 그대를 우습게 보지 않아. 그 병에 가득 담겨 있는 에테르 정도라면 이 건물을 날려버릴 수도 있겠지.”

다음 순간, 흑마법사 옆에 서 있는 기둥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붉은 기운보다도 짙은 붉은빛이었다. 붉은빛은 순식간에 옥상을 붉은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말했듯, 승부는 이미 났어. 그냥 항복해. 여기서 죽지 마. 나와 손잡아. 나는 그대의 힘을 잘 알고 있고, 그대의 힘은 내가 이곳을 지배하게 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마법사는 그 수가 적고, 정복해야 할 땅은 넓어. 마지막으로 묻겠어. 나에게 힘이 되어 주지 않겠어? 아니라면 여기서 초라하게 죽을 수밖에 없어.”

생수병에 담겨 있던 피에서도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붉은 기운에 비교한다면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리얀의 붉은 기운이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리얀이 만들어낸 붉은 기운은 학철과 쟈론, 세이라, 그리고 오툴까지 보호해 주고 있었다.

“에테르를 사용한 직접 공격이다. 에테르를 이용해서 막아야만 한다. 흑마법사는 소모전을 택했다.”

리얀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학철은 생수병에 담겨 있는 리얀의 피가 마치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서서히 줄어드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저 피가 사라지면….”

학철이 리얀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차마 말을 끝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 생수병에 담긴 피가 그대의 남아 있는 삶이야, 리얀. 정말로 이대로 초라하게 죽고 싶은 거야?”

흑마법사가 다시 물었다.

“초라한 죽음이 두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흑마법사.”

리얀이 말했다. 학철은 하늘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구름 너머에는 아파치 헬기가 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헬기는 이곳 옥상을 조준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희망이야….’

학철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에서는 땀이 차고 있었다.

“리얀. 이곳은 12대륙 8대양과는 달라. 이곳에서 나는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 그대가 평원에 모여 있는 적에게 손쉽게 마법을 날리는 것처럼, 나는 여기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거든.”

흑마법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학철은 그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런 장난감을 띄우면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가? 정말이지 나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한다니까.”

흑마법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을 향해서 손가락질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 건 과장이 아니야. 나는 이 세계에 전자기력으로 연결된 정보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고, 이 세계에서 전자기력으로 연결된 정보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없어. 이를테면 지금 저 구름 위를 떠가는 비행체도 말이지.”

흑마법사는 손가락질을 했던 검지를 구부렸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간이 지나자, 구름을 뚫고 아파치 헬기가 지상을 향해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어, 어….”

학철은 자기도 모르게 떨어지는 아파치 헬기를 가리켰다. 하지만 일단 추락하기 시작한 아파치 헬기는 그대로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음이 건물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폭발한 모양이었다.

“이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어, 리얀. 외부에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전자기력을 사용하는 한 나는 모든 외부의 도움을 차단할 수 있거든. 그럼 내부는 어때? 그대의 암살자는 에테르의 축복 덕분에 잠이 들었고, 쟈론은 배에 부상을 입어서 움직일 수가 없지. 남은 건 아무 능력도 없는 현지인 하나와 용 없는 용기사단장 뿐이잖아?”

학철은 자신이 ‘아무 능력도 없는 현지인’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건 용 없는 용기사 단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흑마법사! 잘난 척하지 마! 너도 칼잡이들 다 잃었잖아!”

누워있던 쟈론이 발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12대륙 8대양에서 이름 높은 칼잡이들이었지. 하지만 그들은 사냥개였어. 사냥이 끝났는데 사냥개가 없는 편이 훨씬 더 이롭지 않을까?”

흑마법사는 쟈론의 말에 이렇게 대꾸한 다음 자신의 피가 가득 담겨 있는 기둥으로 걸어간 뒤 기둥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과 함께 기둥 앞에 공간이 열렸다.

“나와라! 나와서 이곳을 초토화 시켜라!”

흑마법사가 외치자 열린 공간에서 빛나는 구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구체 안에는 괴물들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사자, 날카로운 뿔을 가진 코뿔소, 거대한 집게 턱을 가진 사슴벌레, 보기만 해도 섬뜩한 거대한 지네가 차례로 등장했다.

“자! 이제 이 세상으로 향해라! 그곳에서 너희의 남은 목숨을 증오와 분노로 불태워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삼켜버려라!”

흑마법사의 외침과 함께 빛나는 구체가 건물 옥상에서 홍대 사방으로 던져졌다. 학철은 세이라가 했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떠올랐다.

‘흑마법사는 옥상에서 차원이동문을 열고 제가 온 세계에서 괴물을 소환해 던지고 있어요. 물론 그냥 집어 던지는 건 아니고, 중력장을 이용한 거품 방울을 형성해서 그 거품 방울에 괴물을 담아서 던지는 거죠. 그렇게 하면 꽤 멀리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거든요.’

아마도 저 빛나는 구체가 중력장을 이용한 거품 방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내가 8년 전 어떻게 공격을 시작했는지 기억하지? 나는 혼란을 창조해내고 혼돈을 만들었어.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지. 불안과 공포가 떠돌고, 흉흉한 소문과 불길한 예언이 온 세계에 퍼졌을 때, 이 세상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내 편으로 포섭했고, 그것이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어.”

흑마법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먼 곳을 응시했다. 아마도 흑마법사의 눈에는 이 세계 전체가 보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늘 혼란과 혼돈을 만들었어. 그리고 이 혼란과 혼돈은 전자기력을 이용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거야. 인터넷, 포털서비스, SNS, 모두 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게 될 거야. 그다음은 간단하지. 수인족, 용족처럼 이곳에서도 차별받은 사람들은 존재하거든. 외국인노동자, 재중 동포, 이민자, 다문화가정, 비정규직… 이들 모두가 내 편이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내 편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이 나라를 전복시킬 거라고. 이 나라는 이 세계의 변방이지. 나는 변방에서 시작해 마침내 온 세계를 집어삼킬 거야. 8년 전에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12대륙 8대양에서는 실패했지만 여기서는 실패하지 않을 거야. 여기에서 나를 도와줄, 아주 확실한 지지 세력이 있거든.”

짝!

흑마법사는 박수를 크게 한 번 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뭔가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라고 생각했다. 날개의 실루엣이 새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쟈론! 다시 보니 반갑군! 크크크크.”

룩칼이었다. 수인족의 장군, 룩칼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룩칼은 일리스 공주, 마셰라를 안고 도망을 쳤다. 하지만 지금 룩칼은 동료들과 함께 날갯짓을 하며 공중에서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용족의 전사 중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을 모았지.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것이야! 크크크크. 날개 없는 자들은 우리가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겪게 되겠지! 크크크크.”

룩칼의 음성은 경쾌했다. 그리고 그 뒤에 줄지어 날고 있는 룩칼의 동료들도 다들 밝아 보였다.

“리얀!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나에게 이마의 비늘을 뜯어내는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었지! 이제 빚을 갚을 시간이야. 크크크크.”

룩칼은 서서히 리얀을 향해 활강을 해 다가왔다. 룩칼의 날갯짓이 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학철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수가 있을까요?”

다가오는 룩칼을 보면서 학철이 리얀에게 물었다. 학철의 시선은 리얀이 들고 있는 생수병을 향해 있었다. 피는 서서히 줄어들어서 이제 생수병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절반이나 남아있다고 해야 하나,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학철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품에 숨겨두었던 토카레프 권총을 떠올렸다. 총탄은 아마 한 발, 아니면 두 발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 총탄으로 흑마법사와 룩칼, 그리고 룩칼의 동료를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고통은 덜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리얀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오툴.”

리얀이 담담하게 오툴을 불렀다. 옥상에 올라온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오툴이었다.

“킬타스!”

오툴이 큰소리를 쳤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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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736300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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