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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홍대 가다-96화 (9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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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라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마치 피를 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빛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여기까지군, 암살자.”

문지기 케르벨이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공격을 시작할 거라는 신호였다.

“맞아요. 딱 여기까지네요.”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더니 단숨에 케르벨에게 몸을 날렸다.

“그런 공격으로는 어림없다!”

문지기 케르벨이 방패를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학철은 케르벨이 방패 뒤편에서 칼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위, 위험해요!”

학철이 소리쳤다. 하지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케르벨은 칼을 크게 휘둘렀다. 세이라는 케르벨을 지나쳐서 반대편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리얀 쪽까지 이동했다. 학철은 세이라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여기까지네요.”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억지로 미소를 짓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세이라!”

리얀이 달려와 쓰러진 세이라의 상태를 살폈다. 세이라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다친 곳은 없었다. 조금 전 케르벨이 휘두른 칼은 세이라의 몸에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테르의 축복 부작용이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다.”

리얀이 말했다. 학철은 문지기 케르벨을 보았다. 세이라를 향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렸던 케르벨은 그 상태 그대로 굳어있었다.

‘마법인가?’

곧이어 학철은 문지기 케르벨이 굳어있는 상태 그대로 방패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케르벨의 이마에 뭔가 박혀 있었다.

세이라의 단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쓰러진 세이라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후의 힘을 짜내 케르벨의 이마를 향해 단검을 던진 모양이었다.

“칼을 던지는 것은 제대로 된 칼잡이가 쓰는 기술은 아니다. 암살자의 기술이다. 세이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자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문지기 케르벨이 마치 담벼락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그 사이에도 쟈론과 필리페 장군의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이것이 세상 최후의 결투인 것처럼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둘의 표정은 밝았다. 싸움을 즐기는 자의 표정이었다.

“너와는 꼭 한 번 이렇게 목숨을 걸고 겨뤄보고 싶었다, 쟈론!”

필리페 장군이 칼을 날리며 외쳤다.

“난 별로!”

쟈론은 키득거리며 반격을 가했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감정! 이런 쾌감! 내가, 내가 이긴다! 으하하하하!”

필리페 장군의 음성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반면에 쟈론은 표정만큼은 필리페 장군 못지않게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태도는 침착해 보였다. 얼핏 보자면 뜨거운 광기와 냉정한 이성의 싸움이었다.

“쟈론! 내가 이곳에서 살면서 이런 싸움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는지 아는가! 갈증이! 내 갈증이 풀리는구나! 으하하하!”

“어휴, 귀찮아. 빨리 끝내자, 빨리.”

쟈론이 말하는 순간 칼이 살을 찢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학철은 쟈론의 등 뒤로 필리페 장군의 칼날이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리페 장군의 칼은 정확하게 쟈론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필리페 장군! 일부러 여기 노렸지!”

쟈론이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을 해야 할 필리페 장군의 머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잘려나간 필리페 장군의 목은 바닥을 뒹굴면서도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루 네 번이야, 네 번… 이거, 기록이야, 기록….”

쟈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리얀이 재빨리 쟈론에게 다가간 다음 배에 박힌 칼을 뽑았다.

“아! 아! 살살 좀 해!”

“엄살 부리지 마라, 쟈론.”

리얀은 손에서 피를 내어 쟈론을 치료한 다음, 흐르고 있는 피를 생수병에 담았다.

“피, 모으는 거야?”

쟈론이 리얀에게 물었다.

“이제 흑마법사가 공격해 올 것이다. 마법사와 마법사의 싸움은 결국 사용하는 에테르의 양으로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니, 아낌없이 사용해 주겠다.”

생수병에 가득 피를 담으며 리얀이 말했다.

“내 피는 소용없을까?”

리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면서 쟈론이 물었다.

“마법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피에서 에테르를 추출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했을 것이다.”

“하긴. 그랬겠지.”

옥상에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학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흑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리얀.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맑은 남자 음성이 옥상에 울려 퍼졌다. 학철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옥상 한복판이었다.

흑마법사였다. 학철은 한눈에 흑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이라가 말한 그대로였다. 마르고 큰 키에, 긴 팔다리였다. 등까지 오는 금발이었고 얼굴은 핏줄이 다 비쳐 보일 정도로 희었다.

“흑마법사.”

리얀이 일어나 흑마법사와 마주 섰다. 거리는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느껴졌다. 학철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리얀 님. 빨리 끝내야 해요. 아파치 헬기가 오고 있어요.”

학철이 리얀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리얀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흑마법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리얀. 그대와는 지난 8년 간 적으로 만났지만 나는 늘 그대를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비록 계열은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마법사이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니까. 만나게 된다면 분명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흑마법사는 맑은 음성으로 천천히 리얀에게 말했다. 학철은 흑마법사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느꼈다.

‘목소리에 사람 홀리는 마법이라도 있나 봐.’

학철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흑마법사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다, 리얀.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 나와 함께 한다면 말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너의 죽음뿐이다, 흑마법사.”

“안타깝군. 말이 통할 거로 생각했는데.”

흑마법사는 정말로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학철은 리얀이 아주 천천히 피가 담긴 생수통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뭔가 강력한 마법 한 방으로 초반에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온 게 칼잡이 하나에 암살자 하나라니, 이건 좀 뜻밖이구나. 날 죽이려면 적어도 군단 하나는 와야 하는 것 아닌가?”

“군단은 필요 없다. 내가 왔다.”

리얀이 답했다. 그러자 흑마법사는 피식 웃었다.

“만약 이 세계가 에테르로 가득 차 있다면 리얀, 그대 한 사람이 나를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곳에는 에테르가 없구나. 고로 그대의 마법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어.”

“흑마법사. 내가 모은 에테르면 그대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흑마법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흑마법사의 옆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아올랐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생수병을 쥐고 있는 리얀의 손이 움찔했다. 사람 키만 한 높이에 둘레는 두 사람이 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 남아 있는 피를 짜내고 짜내서 모았겠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피를 많이 흘렸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머리가 멍하고 몸에 힘이 없을 테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흑마법사가 말했다. 학철은 저 기둥이 도대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마법 도구인 걸까? 아니면 무기?

“나는 별로 안타깝지 않다. 나는 널 죽이고 나서 푹 쉴 것이고, 사라진 피는 다시 생길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리얀.”

흑마법사가 옆에 솟아오른 기둥에 손을 댔다. 그러자 기둥이 투명하게 변하며 기둥 내부가 보였다. 내부는 붉은빛이었다.

“3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나는 오늘을 위해 준비를 해왔어. 에테르가 없는 세계이니 에테르를 모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이게 뭔지 모르겠는가?”

“에테르….”

리얀의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학철도 기둥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기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흑마법사의 피였다.

“그대가 말한 그대로야, 리얀. 피를 흘리고 시간이 지나면 피가 다시 만들어지지. 3년 동안 나는 이렇게 피를 모았어. 마법사의 싸움은 결국 에테르의 양으로 승부가 나게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테지? 리얀. 이 승부는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이미 네가 졌어.”

흑마법사가 말했다. 리얀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자, 그렇다면 내가 다시 질문을 하지. 여기서 그냥 허무하게 나에게 죽을 텐가, 아니면 나와 손을 잡을 텐가?”

“흑마법사. 내가 그대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얀은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학철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리긴 했지만 분명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내는 소리였다.

“리얀 님! 아파치! 아파치 헬기가 오고 있어요!”

학철이 말했다.

“알고 있다.”

리얀이 답했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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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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