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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리, 리얀 님?”
학철은 순간적으로 리얀이 근처에서 부른 게 아닌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며 리얀을 찾았다.
- 그래. 들리는구나. 지금 그곳 상황은 어떤가?
“1층에 특수부대원들 도착했고요, 1층에서 튀어나오던 개미 떼를 물리쳤어요. 그런데 목소리가 잘… 안 들리네요?”
리얀의 음성은 마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은 장거리 통화처럼 지지직거렸다.
- 시간이 지나 인장의 힘이 약해져서 그렇다. 그래도 아직 들린다니 다행이다, 학철. 흑마법사의 위치를 파악했다. 옥상이다. 옥상에 있다. 옥상에서…
“뭐라고요? 리얀 님? 리얀 님?”
리얀의 목소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잡음이 심했다.
“뭐야? 뭐라고 그래?”
쟈론이 물었다.
“흑마법사가 이 건물 옥상에 있다는 건 들었어요. 나머지는 잘 안 들려요.”
“그 난리를 겪고 아직도 인장이 작동하다니 그것만 해도 행운이네. 자! 그럼 옥상으로 올라가 볼까?”
쟈론이 가볍게 몸을 풀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이 건물 옥상에 있다고요?”
진 팀장이 학철에게 물었다.
“예, 그렇게 들었어요.”
“우리가 걸어서 올라가면 층마다 튀어나올 괴물들하고 싸워야 하잖아요. 그렇죠?”
“준비는 돼 있어.”
장철중 소령이 말했다. 승합차에는 미니건 말고도 다른 무기들도 영화에서 보던 무기고 수준으로 잘 갖춰져 있었다.
“굳이 우리가 올라갈 필요 없어요. 지원요청하는 게 맞아요.”
진 팀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를 찾는 모양이었다.
“지원요청은 하는 게 좋긴 하지. 여기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게 아무래도 맞는 거 같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난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는데.”
쟈론이 들고 있던 칼을 한 바퀴 돌리며 우쭐대듯 말했다.
“아파치요. 아파치 요청할 거예요.”
진 팀장이 핸드폰을 계속 조작하면서 말했다.
“아파치? 아파치가 뭐야?”
쟈론이 학철에게 물었다.
“공격헬기요. 그러니까… 하늘을 날면서 지상으로 공격을 가하는 전차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학철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래. 아파치가 있었지. 쟈론. 아파치는 구름 위에서 30mm M230 기관포를 지상으로 쏠 수 있어. 포탄 속도가 소리보다 빠르니까 구름 위에서 쏘면 지상에 있는 목표물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다고. 죽은 다음에 포탄 소리가 도착하니까.”
학철은 언젠가 군사다큐멘터리에서 아파치 헬기가 지상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는 영상을 본 기억이 났다. 지상에 있던 적군들은 동료들이 기관포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쳤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아파치 헬기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한테도 괴물이 있긴 했었네.’
학철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진 팀장님. 아파치 헬기를 지원받으려면 절차가 필요할 텐데. 정보부에 아파치가 있는 건 아니잖소?”
장철중 소령이 진 팀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비화기 어플 돌리고 있잖아요. 부장님하고 통화하려고요.”
“…그 부장님이라는 게 설마 대한민국 국가정보부 부장을 말하는 건가?”
“물론이죠. 비화기, 괜히 쓰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진 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결이 된 모양이었다.
“예, 코드번호 164728, 2과 거울 팀 팀장 김세진이고요, 1급 지원 요청하려고 해요. 예,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연결 부탁드려요.”
“뭐야? 바로 통화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진 팀장이 전화를 끊자마자 장철중 소령이 투덜거렸다.
“절차가 있어요, 절차가. 1급 지원요청은 팀장급들이 할 수 있는 요청인데 이거 한번 잘못되면 제 모가지 날아가요. 제 경력 걸고 요청하는 거라고요.”
진 팀장이 항변했다.
“두 사람이 아주 한가하게 대화 나누는 건 좋은데, 일단 해결할 일이 또 생긴 거 같은데.”
쟈론이 말했다. 학철도 진 팀장과 장철중 소령의 대화를 듣느라 쟈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2층이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뭔가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이번에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옷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그냥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판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나이는 40대쯤 되었을까? 인상이 험악하고 덩치가 큰 편이긴 했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보아온 개미나 거미, 사마귀와는 완전히 달랐다.
“스트라이어 장군! 장군도 흑마법사 편으로 돌아선 거야? 자이스 장군하고 3년 전 대평원 전투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거 참.”
쟈론이 평범한 사람을 향해서 혀를 끌끌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쟈론. 여전히 경박스럽구나.”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깊고 울림이 있는 음성이었다.
“경박이고 뭐고 다 좋은데 배신자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나를 배신자라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겠다. 이제 적으로 만났으니 승부를 보자, 쟈론.”
스트라이어 장군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거대한 방패와 칼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칼도 방패도 거의 사람 크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학철은 저렇게 거대한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면서 힘이 어마어마하게 센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칼 쓰는 사람하고 붙어보겠네. 어이! 진 팀장! 소령! 이 승부에 끼어들지 말라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쟈론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장철중 소령이 이렇게 말하곤 승합차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까까까까까까깡!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미니건이 불을 뿜었다.
“엎드려!”
쟈론은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는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학철도 엉겁결에 따라서 했다.
미니건이 사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스트라이어 장군이 들고 있던 방패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학철은 미니건의 총탄이 방패에 맞고 사방으로 튕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학철의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다녔다.
사격이 뚝 멈췄다.
“뭐 하는 거야! 저 자식 방패는 날아오는 투사체를 튕겨낸다고!”
쟈론이 장철중 소령을 향해서 소리를 쳤다. 장철중 소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학철은 승합차 뒷문 쪽을 흘낏 보았다.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격이 멈춘 것은 방패에 미니건 총탄이 튕기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느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격을 가하던 부대원은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하고 흘러나왔다. 총탄이 폐를 관통한 모양이었다.
“원래 나는 옥상에서 쟈론,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네놈들이 장난감을 들고 설치는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난 기억한다. 쟈론, 그대가 수많은 회의 석상에서 나를 희롱하고 모욕했던 것을. 그리고 오늘 희롱당하고 모욕당한 내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쟈론, 그대의 목을 벤다면 그리될 것이다.”
스트라이어 장군이 성큼 다가섰다. 쟈론은 자세를 바로 했다.
“난 다 잊어버렸는데 뭘 그렇게 오래 기억하고 그래? 응?”
쟈론은 농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학철은 이렇게 긴장한 쟈론을 처음 보았다.
“쟈론. 내 칼을 받아라.”
스트라이어 장군이 칼끝을 쟈론에게 겨누며 말했다.
“싸우다 죽는 게 평생소원이었는데, 그 상대가 스트라이어 장군이라면 모자람이 없지.”
쟈론은 이렇게 말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어, 자, 잠깐만요! 피! 피!”
학철이 쟈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소리쳤다.
“뭐야? 좀 전에 그 장난감에 맞은 건가?”
스트라이어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그냥 스친 거야. 우리 승부와는 상관없다고.”
쟈론은 이렇게 말했지만 흘러나오는 핏물은 검붉은 빛이었다. 학철은 일리스 공주, 마셰라가 던져서 오발한 총탄에 쟈론이 맞았을 때도 같은 핏빛을 보았다.
“이거, 부상자를 베게 생겼군. 이래서야 내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까?”
스트라이어 장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대의 목을 벤다면 내 분노는 다스릴 수 있겠지. 칼을 쥐고 피를 마시는 자의 숙명이다. 부상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쟈론.”
학철은 잠시나마 스트라이어 장군이 칼을 거두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 희망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쟈론. 내가 한 방 쏠 테니까 그 틈에 공격하시오.”
장철중 소령이 복화술을 쓰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아주 작은 소리로 쟈론에게 속삭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오, 소령. 그러다가 죽어. 저 사람, 평범한 칼잡이가 아니야. 12대륙 8대양에서 이름 높은 다섯 명의 칼잡이 중 하나라고. 내 마지막 상대가 스트라이어 장군이라면 모자람이 없다고 말한 거, 진심이었어.”
쟈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숨을 아주 깊게 들이쉬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학철은 쟈론이 단숨에 승부를 내기 위해 초반에 승부수를 던질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배의 출혈이 심각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하자!”
쟈론이 단숨에 스트라이어 장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쟈론이 먼저 날린 선공이 스트라이어 장군의 방패에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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