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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홍대 가다-87화 (8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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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벽을 뚫으면 지하철로 이어진다는 말인가?”

    “예. 아까 보여주신 도면으로 보면 지하 환풍구로 이어져요. 환풍구는 다시 지하 통제실로 이어지고요.”

    “알겠다.”

    리얀은 벽 쪽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벽면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출입문의 문양이 벽면에 그려졌다.

    “예상대로다. 흑마법사는 이곳에 비상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그럼 굳이 벽 부수지 않아도 되겠네?”

    쟈론이 물었다. 리얀은 아무 말 없이 피를 내어 벽면을 향해 흘려보냈다.

    - 그그그그그그그…

    돌끼리 마찰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벽면에 그려진 문양이 진짜 출입문으로 바뀌더니 좌우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학철은 리얀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입으로는 가쁘게 숨을 뱉고 있었다.

    “저기요, 세이라 님. 리얀 님은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학철은 세이라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리얀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학철.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야.”

    묻기는 세이라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쟈론이 했다. 그리고 표정을 보아하니 세이라도 비슷한 의견인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자 조금 전 본 사무실과 흡사한 LED 조명이 밝히고 있는 큰 방이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텅 빈 방이었다.

    “통신 터집니다!”

    부대원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상수 불러봐, 상수! 상수가 남아서 우리 장비 지키고 있어!”

    장철중 소령이 지시했고, 부대원은 바로 지시를 받아 장비를 요청하고 있었다. 귀에 손을 대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골전도 마이크를 이용해서 통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하철로 돌입하겠소. 나가면 방향은 이즈파크 빌딩으로 향해야 하오. 1층 출입구에서 만나야 하오.”

    리얀이 방 반대편에 있는 출입문 앞에 서서 말했다.

    ‘그런데 만난다고? 무슨 말이지?’

    학철이 생각하고 있는데 리얀이 문을 열었다.

    “저는요, 잠깐 뉴트리아들 돌보고 갈게요. 약속 지켜야 할 게 있어서요.”

    오툴이 리얀에게 말했고, 리얀은 문을 열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그와 동시에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문은 지하철 복도와 이어져 있었다. 학철은 홍대입구역을 자주 다녔지만 복도에 이런 출입문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출입문은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벽처럼 보였다. 만약 평소에 벽이 열리고 사람이 나왔다면 아마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핸드폰으로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려 좋아요나 추천을 받으려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벽에서 사람이 나오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철역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학철은 리얀이 왜 ‘1층 출입구에서 만나야’ 한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얀은 이 혼란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였다.

    “4번 출구로!”

    세이라가 이렇게 외쳤다. 학철은 세이라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4번 출구 너무 좁아요! 8번! 8번으로 나가야 해요!”

    학철이 고함을 쳤다. 세이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알겠다고 말하곤 학철을 어깨에 두르더니 그대로 벽면을 타고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촬영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도망치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왜 도망치려는 것인지, 어디로 도망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었고, 왼쪽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를 통과했고, 누군가는 반대로 개찰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으아아아!”

    “사, 사람이 깔렸어요!”

    “비켜! 비켜!”

    “살려주세요!”

    - 와장창!

    벽면을 따라 8번 출구로 향하는 벽면을 뛰고 있는데 뒤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철 상가에 있는 상점 유리창이 박살 나는 모양이었다.

    리얀은 세이라의 반대쪽 벽을 타고 이동했다. 리얀의 발밑에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세이라의 행적을 따르고 있었다.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 거 같은데….’

    학철은 리얀의 상태를 걱정했지만 쟈론의 말이 맞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해야 할 수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학철은 엉뚱하게도 군 복무 시절, 거점 훈련 때 산에서 야전삽으로 땅을 파고 용변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야전에 따로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전역한 이후로 그런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이라는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의 행렬을 지나 이제는 천장을 밟고 8번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리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8번 출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진 팀장하고 미해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아니, 특수부대원들이라고 해도 이 인파를 뚫을 수 있을까?’

    학철은 세이라의 어깨 위에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엉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특수부대 아니라 초 특수부대가 온다고 해도 저 인파를 통과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8번 출구에서 바라본 홍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도로 위에는 차들이 조금 전 본 지하철역 내부의 인파처럼 뒤엉켜 있었다.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렸고, 멀리서 급브레이크를 밟는지 브레이크 파열음이 들렸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차량도 보였다.

    상가 유리창은 거의 다 깨져있었다. 그 부근에는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상처 부위를 감싸고 뛰고 있었다.

    “저, 저기!”

    세이라가 학철을 어깨에서 내리자마자 학철이 이즈파크 빌딩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즈파크 빌딩 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서 있었다. 학철은 보는 순간 괴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역시 괴물이라고 느낄 거였다.

    학철이 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전갈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싸웠던 기름거미처럼 전갈의 색깔도 시커먼 어둠이었다. 크기도 성체 거미와 거의 비슷했다. 다만 털로 뒤덮인 거미와는 달리 전갈의 껍질은 빛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었다.

    전갈의 집게에는 사람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버둥거리던 사람은 곧 두 토막이 나서 상체와 하체로 나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부에 들어있던 장기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최후의 비명을 질렀지만 인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갈 앞에는 이미 시체가 쌓여 있었다. 집게에 당했는지 시체는 조각이 나 있었다.

    “바다전갈이에요! 아니, 바닷가에서 사는 녀석들까지 도대체 어떻게 데리고 온 거죠?”

    세이라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지만 학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세이라!”

    리얀이 세이라에게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세이라는 리얀과 눈빛을 교환했다.

    “갑니다!”

    세이라는 이렇게 외치곤 리얀의 허리를 잡고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리얀은 생수병에 모아둔 피를 전갈을 향해서 뿌렸다. 피는 허공에서 추상적인 형태의 문양을 그리다가 구체의 형태를 띠더니 전갈을 향해서 똑바로 날아갔다.

    - 콰콰콰콰쾅!

    불기둥이었다. 전갈의 머리 부근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하늘로 솟아올라 있던 전갈의 두 집게발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늘로 뛰어올랐던 세이라도 리얀과 함께 지상으로 귀환했다.

    “전갈은 머리가 약점이다. 지금처럼 정확하게 머리를 공격당하면 온몸의 신경체계가 마비되어 죽게 된다.”

    세이라는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말하는 세이라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고, 눈빛은 평소와 달리 흐릿해 보였다.

    “괘, 괜찮으세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학철은 그래도 괜찮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세이라가 이미 죽어 쓰러진 전갈의 길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곳에도 괴물이 있었다.

    이번에는 거대한 사마귀였다. 거의 사람 키는 될 것 같았다. 생생한 초록색 빛을 발하는 거대한 사마귀 세 마리가 행인들을 향해서 앞발을 날리고 있었다. 사마귀가 앞발을 날릴 때마다 인간의 신체가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세이라!”

    어느 사이 생수병에 피를 채우고 있던 리얀이 세이라를 불렀다. 세이라는 리얀을 어깨에 두르고는 길 건너편을 향해서 뛰어올랐다.

    - 쾅! 쾅! 콰쾅!

    멀리서 세 번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사마귀 세 마리는 머리 없는 벌레가 되어 잠시 부들거리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학철은 이즈파크 빌딩 1층을 바라보았다. 인파는 그곳에도 어김없이 몰려 있었다.

    ‘저리로 가야 할 텐데….’

    “사, 사람 살려!”

    학철의 등 뒤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학철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동교동 로터리 한복판에 괴물이 서 있었다.

    “뭐, 뭐야 저건!”

    학철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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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9791157736300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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