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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까 보안서약서도 받았잖아요.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죽였겠지요.”
진 팀장이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뇨. 죽일 마음이 있었어도 당장은 죽일 수 없죠. 왜냐하면 이곳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안 그래요? 그리고 정보부 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요. 사람은 영원히 비밀을 지키지 못해요. 비밀을 지키는 건 오직 죽은 사람뿐이죠. 안 그런가요?”
세이라의 질문에 진 팀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일이 끝나고 나면 이세계에서 온 사람은 이세계로 돌아갈 테니 문제없겠지만, 이곳 민간인들은 죽일 생각이었을 거라 판단하오, 진 팀장.”
리얀이 진 팀장에게 말했다.
“그건….”
“크핫! 여기 학철이, 게스트하우스 사장, 홍 대표,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던 거야? 그거 아주 합리적이네. 진 팀장, 보기보다 냉철하게 자기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네? 으하하하핫!”
쟈론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진 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 팀장이 답변하지 못하는 꼴을 보면서, 학철은 흑마법사가 했던 일들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인인증서에 자신을 추적하려는 사람을 역으로 추적할 수 있는 코드를 넣은 것이나 핸드폰 위치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었던 건 이곳에서 서버를 통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였다.
“이곳에서 흑마법사가 벌였던 일을 철저하게 은폐할 작정이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관련자 중에서 무고한 사람을 해치거나, 감금, 뭐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었어요. 다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외부로 새어나갈 경우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게 될 파장이 워낙 커서… 그만큼 조심했던 것뿐이에요.”
진 팀장이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학철은 진 팀장의 말이 진실일지 거짓일지 판별할 수 없었다.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을까?’
학철은 미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미해도 진 팀장 못지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무지 표정 관리를 못 해서 얼굴 근육이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외부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 진 팀장. 본사에서 신입 요원을 파견받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소.”
당황하고 있는 진 팀장과 미해를 향해서 리얀이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 다 리얀이 하고 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진 팀장. 저 얘기, 진짜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장철중 소령이 물었다. 아주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학철은 장철중 소령이 감정을 억누르며 묻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싸우기 직전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만약 장철중 소령의 감정이 폭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지원 안 해 준 거냐고 묻잖아!”
장철중 소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 팀장과 미해는 물론이고 학철도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장 소령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원래 정보부 일은 정보부 안에서 해결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애초에 장 소령님이 정보부 일 하기로 하셨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사실이잖아요. 빠르고 은밀하게 일 처리 하는 거요.”
진 팀장은 장철중 소령이 화를 내자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장철중 소령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잠깐만. 지금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내가 이해하겠소. 하지만 지금 그 갈등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소.”
리얀이 갑자기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리얀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밖에서 일이 생긴 모양이오. 익숙하지 않은 기계라서 정확하게 모든 정보를 읽을 수는 없으나… 흑마법사가 뭔가 행동을 시작한 것 같소.”
리얀이 서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거, 모니터도 없고, 키보드 마우스도 없고… 외부 입력 장치, 출력장치는 하나도 없어요. 그냥 서버만 있어요.”
미해가 서버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정신감응 마법으로 접속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니 보통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오. 세이라!”
리얀이 짤막하게 설명한 다음 세이라를 불렀다.
“이게 이곳 지하 지도다. 그리고 이것은… 이 부근 지하철 지도다. 최단 거리를 계산할 수 있겠는가?”
리얀이 세이라에게 말했다. 세이라는 눈을 감고 리얀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철도 리얀이 보여주는 지도가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마치 미로를 보는 것 같은 도면인지라 학철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예. 지금 온 통로를 거슬러 가다 보면 지하철 환풍구로 통하는 최단 경로가 있어요.”
“그곳 벽을 뚫고 지하철로 돌입한 뒤, 그곳에서 지상으로 나가야겠다.”
“잠깐! 벽은 어떻게 뚫으려고?”
쟈론이 리얀과 세이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마법으로 뚫는다. 다들 주목하시오!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하오!”
“…저기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리얀의 말에 미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 팀장이 미해에게 질문을 하라고 슬쩍 눈치를 준 모양이었다.
“흑마법사가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어서 오시오!”
“저, 행동이라고 하시면….”
“내가 살았던 세계에서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오. 전쟁.”
리얀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흑마법사가… 전쟁을 일으켰다고요?”
진 팀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물었다.
“그렇소.”
“우리가 흑마법사의 병력은 다 제거했어요. 이곳에 남아 있던 병력도 오늘, 조금 전에 다 끝내버렸고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병력으로 전쟁을…?”
“흑마법사의 모든 병력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자만하지 마시오, 진 팀장. 이곳에 기름거미가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소?”
리얀은 이렇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 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흑마법사야. 차원이동문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가서도 전쟁을 일으키다니! 크핫! 이거, 정말 기대 이상이야. 이거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전투가 되겠어! 으하하하핫!”
쟈론은 신이 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학철은 저 웃음이 전투를 즐기기 때문에 웃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감추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쟁… 전쟁이라니….”
진 팀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리얀이 한 말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진 팀장님. 너무 나쁜 면만 보지 마세요. 정보를 통제하는 방법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똑같이 생각해 보세요. 여기 있는 민간인 죽여서 비밀을 지키는 건 옛날 방법이잖아요. 다른 정보를 뿌려서 진짜 정보가 뭔지 모르게 해야 한다면서요. 전쟁이 벌어졌으니 흑마법사가 민간인을 사찰했거나 말거나 이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진 팀장한테 책임 물을 사람도 없을 거예요.”
세이라가 진 팀장에게 말했다. 학철은 어쩐지 세이라가 의기양양해서는 자신이 어떤 싸움에서 이겼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럼 서두르지. 우리가 앞장서겠소. 뒤따라오시오.”
“어서요!”
길을 알고 있는 세이라가 먼저 방을 나섰고 그 뒤를 바로 쟈론과 리얀이 뒤따랐다. 학철도 자연스럽게 그 뒤에 붙었다. 바로 뒤를 따라서 장철중 소령과 남은 특수부대원들이 움직였고 진 팀장과 미해는 가장 마지막에 움직였다. 오툴은 진 팀장과 함께 이동했다.
세이라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긴 복도에 들어서자 좌우를 살피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움직였다. 리얀과 쟈론도 그렇게 했다.
“리얀. 전쟁이라면, 진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오? 대낮에? 홍대 한복판에서?”
몇 걸음 빨리 움직여 리얀을 따라잡은 장철중 소령이 물었다.
“그렇소. 올라가면 통신장비를 이용해서 장비부터 인수받아야 할 것이오. 지금 들고 있는 것보다 익숙한 무기, 그러니까 자동소총 것을 지원받으시오.”
리얀이 말했다. 장철중 소령은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더니 자신의 부대원들 쪽으로 돌아갔다. 학철은 장철중 소령이 이끄는 부대가 특수부대원들이니 일반 보병이 쓰는 무전기보다는 성능이 좋은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학철아.”
리얀의 뒤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느새 미해가 학철의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어.”
학철은 미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오기 전에 가히한테 들었어. 너, 저 이세계인한테 돈 받기로 하고 일하고 있는 거라며?”
“어.”
이번에도 시선은 리얀의 발걸음을 떠나지 않았다.
“꽤 금액이 많더라? 100억이라던데, 진짜야?”
“어.”
세 번째로 학철은 ‘어’라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해는 피식 웃었다.
“몸조심해. 100억 아니라 1,000억이라고 해도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지. 죽어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충고하는 거야.”
미해는 이렇게 말하더니 진 팀장 쪽으로 돌아갔다.
미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어떤 것도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다. 가치를 증명하는 것도 살아야 의미가 있다고 했던 세이라의 말이 떠올랐다.
“이 벽이에요.”
세이라가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서더니 벽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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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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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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