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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쟈론이 외치자마자 천장과 벽면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거미와는 다르게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바로 붉은 피였다.
“뭐, 뭐야?”
쟈론이 떨어지는 붉은 덩어리를 피하면서 말했다.
“저거, 뉴트리아 같은데요?”
학철이 말했다.
“뉴트리아? 뉴트리아는 또 뭐야?”
쟈론이 화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거대한 쥐인 거 같네요. 맞나요?”
반면 세이라는 뉴트리아를 처음 보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학철에게 물었다.
“맞아요. 쥐, 비슷한 거예요. 옛날에 식용으로 수입했다가 안 팔려서 버려진 게 개체 수가 늘어나서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그런 뉴스를 본 적은 있었는데….”
“쥐도 아니고 수달도 아닌 녀석이네? 보니까 발에 물갈퀴가 있어. 크기로 봐서 식용으로도 좋겠지만 물에 사는 녀석이니 모피도 쓸모가 있겠어.”
쟈론이 뉴트리아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런데 뉴트리아가 홍대 지하에서 살고 있었나 보네요?”
학철은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벙쪘다. 도대체 어째서 뉴트리아가 홍대에서 사육되는 걸까 싶었다.
“이건 거미들의 먹잇감이다.”
리얀이 설명했다.
“그게 무슨….”
“거미는 알을 한 번에 100개 정도 낳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가 100배로 불어나지는 않는다. 그건 먹을 것이 부족해서 새끼들끼리 서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굶주려 죽는 거미도 있고, 서로 잡아먹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체 수가 조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뉴트리아 같은 먹잇감이 많다면 개체 수가 지금처럼 불어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일부러 지하에서 뉴트리아를 대량으로 기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세이라가 리얀의 의견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 저기요, 지금 하신 이야기, 진 팀장님한테 했거든요? 그랬더니 진 팀장님이 중요한 단서를 얻은 것 같다고, 조사해보겠다고 하시네요.
오툴이 불쑥 정신감응 마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들 별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뉴트리아를 왜 우리한테 던지는 거야?”
쟈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에테르의 칼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리얀이 짧게 답변했다.
“에테르의 칼날은 지속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세이라가 물었다.
“곧 끝난다.”
“그럼 어서 다시 설치해야지, 지금 뭐 해!”
쟈론이 리얀을 보며 다그쳤다.
“쟈론. 무한정 에테르의 칼날을 세울 수는 없다. 이곳은 에테르가 없는 세계이고, 내 피에는 한계가 있다.”
리얀이 쟈론을 설득하려는 듯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피 아껴서 뭐 하려고? 죽은 다음에는 피고 에테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어!”
“하지만 흑마법사와 마주쳤을 때 이 피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쟈론. 에테르 없이 흑마법사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쩐지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쟈론도 그걸 느꼈는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네. 여기 온 목적은 흑마법사를 잡는 거지 거미를 사냥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쟈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들고 있던 칼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럼, 준비해야겠지요?”
세이라는 단검을 하나 더 꺼내 들면서 말했다. 양손에 단검을 들고 싸울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래야겠지.”
- 저, 그런데요, 진 팀장님이 그러는데 세이라 님이 이곳 요원들을 다 잠재워 버리는 바람에 지금 조사할 요원이 부족하다고 하네요. 본사에서 요원들을 파견받아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고…
“그게 지금 중요해?”
오툴이 다시 한번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쟈론이 오툴의 말허리를 잘랐다.
- 중요하진… 않죠?
“그럼 나중에 해!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걸고 거미들하고 싸우고 있다고! 아마 100마리는 될 거야! 게다가 이것들은 성체도 아니라고! 성체와 싸울 걸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
쟈론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대체 흑마법사는 뭘 감추려고 이런 괴물들까지 소환한 걸까요? 지하에 굴을 파고 거미를 기른다니. 이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잖아요?”
세이라가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환풍구에서 떼지는 않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중요한 거겠지!”
쟈론이 말하는 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뉴트리아가 다시 떨어졌다. 에테르의 칼날은 이제 효력이 다 된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뉴트리아의 몸통은 온전했다.
“위!”
쟈론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쟈론의 경고 그대로, 위쪽에서 거미가 한 마리 내려왔다. 지금까지의 공격적인 거미와는 달리, 이 거미는 내려오자마자 벽면 쪽으로 거리를 벌리더니 쟈론과 세이라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뭐지?”
쟈론도 벽면에 붙어 있는 거미를 경계하면서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건 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다리… 저 녀석, 오른쪽 세 번째 다리가 없다.”
리얀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거미는 정말로 여덟 개 다리 중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다리가 없었다.
“가장 약한 녀석을 보낸 것이다. 우리의 힘을 파악하기 위해.”
“거미가 원래 조직적으로 사냥을 하나요?”
세이라가 물었다.
“둘 중 하나다. 성체가 지휘하고 있거나, 새끼 중에 뛰어난 지휘관 거미가 존재하거나.”
“이거 진짜 머리 아프네. 이 녀석,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쟈론이 고민하는 사이, 다리 하나 없는 거미는 벽면을 보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마치 벽을 타고 도망치려는 듯 버둥거렸다.
“그냥 죽일까요?”
세이라가 리얀의 눈치를 살폈다. 리얀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찍!
그 순간, 정말로 뭔가를 쥐어짜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거미의 엉덩이 쪽에서 뭔가 뿜어져 나왔다. 거미줄이었다.
피하라고 외칠 틈도 없었다. 쟈론과 세이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려 거미줄을 피했다. 그리고 그 거미줄은 학철의 몸에 그대로 쏟아졌다.
“어, 어….”
순식간에 회색 그물에 갇힌 꼴이 되어버린 학철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그대로 있어! 움직이면 더 엉킨다!”
리얀이 학철에게 지시했다. 리얀의 말 그대로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몸에 달라붙은 거미줄은 엉키면서 더욱 억세게 학철을 조여왔다.
‘만약에 이걸 쟈론이나 세이라가 맞았다면….’
움직임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속도가 중요한 거미와의 싸움에서 크게 불리해졌을 것이다. 쟈론과 세이라가 쓰러진다면 리얀과 학철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학철은 지금까지 살면서 기름이라는 건 미끌거린다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거미줄은 기름기가 가득했지만 미끌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끈적였다. 학철은 여름날 도로에 막 시공된 시커먼 아스팔트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냄새도 비슷했다. 학철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역겨운 냄새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번쩍!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철은 쟈론이 단 일격에 다리 하나 없는 거미를 해치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뭔가가 번득인다 싶은 다음 순간 거미가 세로로 쪼개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거, 슬슬 위험해지는데? 오랜만이야. 전장에서 이런 기분 드는 거.”
쟈론이 칼날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쟈론의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온다.”
리얀이 짤막하게 말했다.
학철은 다섯 마리의 거미가 천장과 벽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챙! 챙! 챙!
학철은 불꽃이 튀기는 것을 보며 이게 뭔가 싶었다. 불꽃은 쟈론과 세이라의 칼날이 거미의 발톱과 이빨과 부딪치며 나오는 것이었다.
“더 온다! 빨리!”
리얀이 외쳤고, 다시 몇 마리의 거미가 공격해왔다. 이번에는 너무 빨라서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먼저 내려왔던 거미가 거미줄을 뿜었고 쟈론과 세이라는 벽을 짚고 공중제비를 돌며 그것을 피해냈다.
그런데 하필 뿜어낸 거미줄 중 일부가 학철에게 적중했다.
“학철! 그대로 엎드려! 쓰러져 있으면 먹잇감이라고 판단하고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어서!”
리얀이 학철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더 서 있기도 힘든 참이었다. 학철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뒤, 손을 움직여 얼굴에 붙은 거미줄만이라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팔을 움직이자 거미줄은 엉키고 설켜서 학철은 금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거미줄… 정말 풀 수 있는 거야?’
학철은 힘을 써 보았지만 팔을 벌릴 수도 없었다. 꼭 굵은 밧줄에 감겨 있는 것만 같았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학철은 구하기 위해 왔던 특수부대원과 눈이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특수부대원의 볼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쩌면 저 특수부대원도 나름대로 거미줄에서 풀려나기 위해 애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 싶었다.
퍽!
조금 전 들었던, 거미가 베어질 때 났던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 베어 넘긴 모양이었다.
“학철!”
세이라가 소리쳤다. 거미 한 마리가 학철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학철은 그대로 숨까지 멈추었다. 여섯 개의 시커먼 눈동자가 학철을 노려보았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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