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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은 리얀의 대기명령을 듣고는 숨죽여 철문 안쪽을 살펴보았다. 꽤 넓은 방이었다. 어지간한 사무실보다 컸다. 하지만 방 안은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 전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천장과 벽면에 설치된 커다란 환풍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지하 깊은 곳이니 공기가 통하게 하는 것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아무 일도 없었나 본데?”
쟈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잠깐!”
날카로운 목소리로 리얀이 쟈론을 멈춰 세웠다.
“뭐야?”
“내가 먼저 조사한다.”
리얀은 생수병에 모아놓은 피 중 일부를 바닥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핏물은 안개가 되어 방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미 몇 번 본, 익숙한 광경이었다.
“예상대로다. 외벽에만 에테르의 장벽을 쳤을 뿐, 내부에서는 에테르가 자유롭게 움직인다.”
방 맞은편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것이 분명한 문이 하나 있었다. 리얀은 에테르를 그쪽으로 흘려보냈다.
“다음 방에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더 안쪽까지 안 되는 거야?”
리얀이 말하자마자 쟈론이 물었다. 리얀의 표정을 보고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다음 방 이상 정찰은 불가능하다. 복도가 너무 길다. 에테르의 힘이 다음 방에 닿기 전에 흩어져버린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곤 이번에도 앞장서서 다음 방으로 향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거, 흑마법사가 계산한 거 아닐까? 방 지날 때마다 에테르로 정찰하게 만드는 거.”
“뭐하러 그렇게 했을까요?”
세이라가 쟈론에게 물었다.
“나도 이유는 모르지.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 수도 있고, 이 세계에는 에테르가 없으니까 에테르를 낭비하게 하려는 걸 수도 있고.”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리얀은 태연하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다.
리얀이 말한 그대로 긴 복도가 나왔다. 지하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복도였다. 복도 천장에는 푸른 LED 조명이 달려 있었고, 벽면은 매끄러운 금속 재질이었다.
“복도가 넓네요. 승합차 한 대는 충분히 지나가겠어요.”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단검을 고쳐 쥐었다.
“세이라 님. 저, 혹시, 승합차 한 대 크기라는 건, 다 큰 거미 한 마리가 지나다닐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인가요?”
학철은 아주 조심스럽게 세이라에게 물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쟈론이 학철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아마 네 말이 맞겠지.”
경고를 한 뒤에 쟈론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곤 긴장이 되는지 칼자루를 몇 번이고 고쳐서 잡았다.
복도에는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거미가 아니라 쥐 한 마리라도 지나간다면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였다. 복도는 일직선이 아니라 좌우로 휘어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하로 더 깊게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복도를 왜 이렇게 길게 판 거야?”
쟈론은 투덜거리면서도 좌우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러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리얀은 흑마법사의 생각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학철은 세이라를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진짜… 미로네요. 방향감각을 잃도록 일부러 이렇게 설계했나 봐요. 숙련된 암살자가 아니라면 벌써 방위를 잃었겠어요.”
다행스럽게도 세이라는 방향감각을 전혀 상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 번째 방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학철은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육중한 철문을 앞장서서 여는 리얀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난장판이 된 방 안이었다. 아마 운동실로 쓴 공간인 모양이었다. 헬스 자전거, 러닝머신, 그리고 벤치프레스였을 것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운동 중이었는지 죽은 자들은 다들 체육복 차림이었다.
“저항할 틈 없이 순식간에 당했다.”
리얀이 시체를 살펴본 후 말했다. 머리, 아니면 가슴에 두어 발씩 맞은 시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 킬타스를 통해서 본 시신과는 달리 시신의 상태가 온전해 보였다.
“더 있을 거 없잖아?”
쟈론이 의견을 냈고, 리얀은 그 의견에 따라 바로 다음 방으로 출발했다.
역시나 똑같은 복도였다. 넓고, 길고, 깊었다.
“그, 궁성에 가면 말이야, 복도에 다들 그렇게 그림을 걸어놓더라고. 나는 왜 그런가 했다. 이거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통 모르겠네.”
쟈론이 말했다. 학철도 동감이었다. 똑같이 생긴 벽을 따라서 좌로 우로 빙빙 돌고 있자니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멍해지기도 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죽으면 금화 1천 개 다 써보지도 못하잖아? 아니, 만져도 못 보고 죽는 건가?”
멍해져 있는 학철의 등짝을 쟈론이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학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쟁터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동료의 상태를 파악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에 익숙한 느낌이었다.
“세이라. 방향감각, 잃지 않고 있지?”
리얀이 세이라에게 물었다.
“물론이지요. 빙빙 돌게 만들어놓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방향은 북쪽이에요. 북쪽으로 향하는 통로에요.”
학철은 세이라의 능력에 새삼 다시 놀랐다. 학철은 이미 오래전에 방향감각을 상실했지만 세이라는 그걸 넘어서서 현재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 고양이가 준 지도 덕도 크니까.”
학철이 놀란 걸 알았는지 세이라가 농담조로 말했다.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세 번째 방에 도착했다. 세 번째 방은 휴게실인 모양이었다. PC, TV, 테이블, 그리고 소파였던 물건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류탄까지 쓴 모양이었다. 폭발의 흔적이 벽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주 사지를 다 찢어놨군.”
쟈론이 폭발로 손상된 시신을 보며 말했다. 분명 사람이었을 것의 형체가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번에도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이자들이 쥐고 있는 권총에서 발사된 흔적이 없다.”
그러나 특수부대 복장을 한 시신도 한 구 있었다. 목에 총상을 입은 시신이었다.
“첫 전사자가 여기서 나왔군요. 음… 흑마법사 부하들 총에 맞은 것 같지 않아요. 권총 탄이 아니라 자동소총 탄이네요.”
세이라가 특수부대원의 시신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학철이 놀라서 세이라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권총도 보고 자동소총도 봤으니까요.”
“보통 봤다고 해서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을 텐데요….”
“저는 보통이 아니니까요, 학철. 리얀 님. 이 친구는 동료가 쏜 총탄이 벽에 튕긴 유탄에 맞았네요. 총알을 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이 가슴 부분과 얼굴 부분 사이에 정확하게 명중했어요.”
세이라가 시신의 목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이라의 말 그대로 목 아래로는 방탄조끼가 있었고, 목 위로는 방탄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진짜 운 없네, 이 친구.”
쟈론은 이렇게 말하면서 칼자루를 눈높이에 대고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명복을 빈 건가요?”
“아니. 내 재수 떨어지지 말라고 신에게 기도했어. 칼 쓰는 사람들은 다들 신을 믿거든.”
학철의 질문에 쟈론이 대답했다.
‘냉정하다고 해야 하나, 자기만 생각한다고 해야 하나?’
쟈론은 어느 쪽이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학철은 그런 쟈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재수 없다는 기분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출발한다.”
리얀은 이번에도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긴 복도가 이어졌다. 이제 학철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똑같은 조명, 똑같은 벽면, 어지럽게 빙빙 도는 복도의 구조. 학철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손등을 꼬집고, 자신의 뺨을 쳤다.
마침내 세 번째 방에 도착했다.
“이 방이에요, 리얀 님.”
세이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학철은 세이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그토록 긴 복도를 지나며 정신이 혼미해진 탓이다.
“지금 이 방에 거미는 없다.”
에테르를 이용해 방 내부 정찰을 마친 리얀이 이렇게 말했을 때가 되어서야, 학철은 세이라가 말한 ‘이 방’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 전 킬타스가 본, 거미줄에 감긴 부대원이 있는 바로 그 방이라는 뜻이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학철은 방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특수부대원을 볼 수 있었다. 특수부대원은 조금 전 킬타스가 본 것과 완전히 같은 상태였다.
“리얀. 뒤로 물러서. 이 방은 내가 먼저 들어간다.”
쟈론이 앞으로 나서면서 칼을 높게 세우고 말했다.
“쟈론. 바닥에 거미줄이 있다.”
리얀이 경고했다.
“알고 있어. 나도 거미 녀석들 상대해 본 적 있다고.”
“바닥에 거미줄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학철이 세이라에게 물었다.
“거미는 먹이를 잡으면 독을 주입해서 의식을 잃게 만든 다음에 거미줄로 묶어 놓고 다른 먹잇감을 찾아서 가요. 그사이에 다른 먹이가 오는 걸 감시하기 위해서 거미줄을 바닥에 깔아둬요. 거미줄은 거미하고 연결되어 있거든요. 건드리면 바로 알아차리고 와요.”
세이라가 설명하는 사이, 쟈론이 벽면은 매끄러운 금속재질이었다.
“다들 움직이지 말고 거기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쟈론이 말했다. 학철은 숨을 죽이고 방의 바닥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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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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