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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거미요? 거미가 있다고요?”
학철은 하마터면 운전대를 놓칠 뻔했다.
“그렇다. 거미를 말했다. 다리가 여덟 개 달려 있고, 끈끈한 실로 거미집을 쳐서 먹잇감이 걸려들면 잡아먹는 녀석들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거미는 있어요. 그런데… 거미가 아무리 커도 사람을 잡아먹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학철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다 자란 거미는 대략 이 승합차 정도 크기가 된다. 새끼 때라고 해서 덜 위험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학철은 사진으로 보았던 거미의 확대 사진이 떠올랐다. 털이 솟아 있는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네 개의 눈.
“제가 아는 거미는 보통 파리, 모기 잡아먹고 사는데….”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그렇게 다루기 힘든 녀석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을까?”
쟈론이 학철의 말을 무시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맞아요. 거미는 길들일 수가 없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거미에게 당할 수도 있을 텐데….”
세이라도 쟈론과 마찬가지 견해인 모양이었다.
“흑마법사의 정신감응 마법은 강력하다. 용도 부릴 수 있는 오툴의 정신감응 마법처럼 지능이 높은 동물과 교류하는 건 힘들지 몰라도, 거미 같은 지능이 낮은 동물이라면 지배가 가능할 것이다.”
- 예전에 거미하고 대화를 시도해 본 적 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냥 본능만 강한 녀석들이라 도무지 대화가 안 되거든요. 배고파, 먹고 싶어, 이런 소리밖에 안 한다고요.
오툴이 설명한 순간, 킬타스가 기분 나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그 안에 거미가 있다면 안 들어가겠다는데요?
오툴이 킬타스의 울음소리를 통역해 주었다. 하지만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의미를 알 수 있는 울음소리였다.
“거미줄이 있는지만 확인해 주면 된다. 거미는 거미집에서는 강력하지만 거미집을 불태워 버리면 무력해진다.”
“무력해진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자식들 칼 박으려면 엄청 고생해야 한다고. 몸통은 부드럽지만 이빨하고 다리가 얼마나 단단한데! 그리고 그 발톱! 진짜 끔찍하단 말야!”
쟈론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학철은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칼을 휘두르는 쟈론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만 봐도 거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짐작이 갔다.
“물론 가설이다. 거미가 아닐 수도 있다. 특수부대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거미줄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자동소총은 발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총탄이라면 거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 거미가 보였다면 그랬겠죠. 아시잖아요. 거미는 어둠 속에서 거미줄의 진동을 느껴서 움직이지만 사람은 암흑 속에서 무력하잖아요. 만약 지하 내부가 어둡다면 꼼짝없이 당하지 않았을까요?
오툴이 의견을 말했다.
“진짜 거미는 싫은데… 예전에 거미하고 싸우다가 머리통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거든. 거미 녀석들, 빠르긴 또 얼마나 빠른데….”
쟈론이 투덜거렸다.
“일단 불을 이용할 준비를 하고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미가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흑마법사가 부린 종족들은 다양하니까 말이다. 현장에 도착해서 정찰을 시도하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리얀은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가는 길에 차는 막히지 않았다. 연희동에서 홍대 놀이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분이었다.
홍대 놀이터는 조금 전 진 팀장의 노트북에서 본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놀이터 주변에는 노란 노란색 진입 금지 라인이 둘려 있었고, 경찰들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정복 경찰 하나가 학철이 모든 승합차를 보더니 가까이 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다른 경찰들이 근처에 모여든 구경꾼들을 정리했다.
“가스안전공사에서 오셨습니까?”
정복 경찰이 학철에게 물었다.
“예. 여기, 가스누출 사고가 났다면서요?”
학철이 경관에게 물었다.
“…저희, 가스안전공사에서 연락받고 여기 출동했어요. 여기를 봉쇄해달라고 요청하셨다면서요?”
경찰이 수상쩍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학철에게 물었다.
“아, 예. 마, 맞아요.”
학철은 아무래도 자신이 매끄럽게 답변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경관님?”
학철이 쩔쩔매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세이라가 고개를 앞쪽으로 쭉 내밀었다.
“어, 어, 예?”
“이 친구가 신참이라 잘 몰라서 그래요. 우리도 회사에서 출동하라고 해서 온 거지, 자세한 사정은 직접 들어가 봐야 알아요. 우리도 공무원이에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죠. 이해하시겠죠?”
세이라가 마스크를 내린 후, 막힘없이 줄줄 이야기했다. 경찰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왜요? 제 피부색이 달라서 이상한가요?”
세이라가 경관을 흘겨보며 물었다.
“어, 어… 아뇨.”
“저, 다문화 전형 직원인데… 혹시 인종차별 하세요?”
“아!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경관은 팔을 휘휘 내저으며 승합차를 놀이터 안쪽으로 인도했다. 노란 차단선을 통과할 때, 학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라의 임기응변은 정말 대단했다. 진짜 가스안전공사 직원이라고 해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학철. 학철은 암살자 훈련을 받은 적, 없잖아요?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무장한 경비병을 보면 당황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세이라가 학철을 위로했다. 학철은 세이라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차를 세웠다. 진 팀장이 알려준, 놀이터 안쪽에 있는 화장실 옆 출입구 바로 앞쪽이었다.
“저 문이에요.”
학철이 출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이라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고, 쟈론과 리얀이 먼저 승합차에서 내렸다. 출입구를 열고 들어서자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일행은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밖에서는 가스안전공사 승합차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오툴. 잘 들리는가?”
리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예. 잘 들려요. 킬타스는 지금 리얀 님을 보고 있네요.
학철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어도 오툴의 시선과 리얀을 보고 있는 킬타스의 시선이 동시에 겹쳐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킬타스는 잠시 기다리라고 해라. 내가 먼저 살펴보겠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준비해 온, 자신의 피가 가득 담긴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생수병을 조금 기울이자 피가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하지만 핏물은 바닥에 닿지 않고 붉은 안개로 변해 내부로 흘러 들어갔다.
“정찰을 시작한다.”
리얀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좀 전까지 학철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했던 오툴과 킬타스의 시선이 사라지고 기묘한 영상이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어둠 속 기하학적 무늬가 출입구 모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학철. 지금 보는 건 내 에테르의 궤적이다. 집중해서 보아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 예….”
학철은 에테르의 흐름이 출입구를 지나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광경을 보면서 뭔가에 홀린 듯 대답했다.
에테르의 흐름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리고 거대한 철문이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열고 닫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의 장벽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철문이었다.
- 저 강철 문은 벽에 설치된 비밀번호 입력방식의 개패기로 열 수 있다고 하네요. 비밀번호는 720610이고요.
“특수부대가 그 방법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됐다. 우리는 그 방법은 쓰지 않을 작정이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에테르의 흐름을 철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에테르의 흐름이 철문 앞에서 멈췄다. 꼭 뭔가가 일렁이는 것 같은 광경이 보이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뿐이었다.
“뭐야? 왜 안 들어가?”
쟈론이 리얀에게 물었다.
“들어갈 수가 없다.”
“들어갈 수가 없다니, 무슨 소리야? 사람 몸속도 스며드는 에테르가 고작 저 문도 통과 못 한다고?”
“여기서부터는 에테르의 방벽이 있다. 흑마법사 녀석, 미리 준비를 해 둔 모양이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면서 에테르의 흐름을 돌려 계단을 올라왔다. 다시 입구로 온 에테르의 흐름은 놀이터 화장실 주변을 맴돌다가 환풍구를 발견했다.
“내부를 봐야만 한다.”
리얀은 이렇게 말하곤 환풍구 쪽으로 에테르의 흐름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에테르의 흐름은 일렁이는 광경과 함께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환풍구에도 에테르의 장벽이다. 흑마법사 녀석, 철저하게 막아두었다. 역시 킬타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툴? 내 말 이해했는가?”
- 예, 이해했어요. 킬타스!
오툴이 킬타스를 불렀다. 킬타스는 리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학철을 바라보았다. 학철은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의 시각은 사람보다 훨씬 넓었고, 흑백영화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색감이었다.
‘고양이는 붉은색을 못 보는 색맹이라고 하던데.’
학철은 흑백영화의 색감으로 비친 눈을 감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오툴. 킬타스에게 여기 환풍구를 이용해서 들어가라고 전해라. 환풍구는 여기에 있다.”
리얀이 말하자 킬타스는 바로 환풍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10마리의 고양이가 뒤따랐다. 11마리의 고양이들이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경찰들까지 시선을 집중했다.
“저기요! 가스안전공사에서 오신 분! 저 고양이, 가스누출 사고하고 관계있어요?”
좀 전에 학철을 불러 세웠던 경관이 달려와 세이라에게 물었다.
“가끔 가스가 유출되면 고양이들이 모여드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이 그런 것 같네요.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알리시고, 빨리 대피하라고 해 주세요. 폭발하면… 아시죠?”
세이라가 이번에도 막힘없이 경관에게 설명했다. 경관은 알겠다고 말하고는 허둥거리며 안전선 밖으로 달려갔다.
“어, 이, 이거!”
학철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킬타스의 감각이 갑자기 학철에게 쏟아지는 것처럼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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