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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지? 섬광탄인가? 섬광탄을 쓴 건가?’
학철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이런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특수부대가 테러리스트를 진압하기 위해 섬광탄을 터트린 후 진입하는 광경 말이다.
FPS 게임에서 섬광탄을 체험해 본 적도 있었다. 게임 속에서 섬광탄이 터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길진 않았었던 거 같은데.’
학철은 엎드린 상태로 눈과 귀를 본능적으로 마구 비비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다.
시각과 청각이 돌아오기 전, 누군가 학철의 허리에 손을 놓고 쓱 두르더니 한 동작으로 들어 올렸다.
‘특수부대원인가? 아니면 리얀? 세이라? 아니, 쟈론?’
학철은 누군가에 들려 이동하면서 지금 도망을 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힘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허리를 감싼 팔은 학철을 내려놓고는 등을 두 번 툭툭, 두드리곤 사라져 버렸다.
“아이, 진짜, 이거 뭐야!”
학철은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었다. 뭔가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지른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히려 더욱더 두려워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서히 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명이 작아지면서 주위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학철은 이대로 엎드려 있는 편이 안전할지, 아니면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는 편이 나을지를 고민했다.
결국 학철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을 따랐다.
“빨리! 시간 없어!”
리얀이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철은 쟈론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특수부대원 하나를 묶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끝! 마지막 놈까지 다 묶었어.”
쟈론이 손에 들고 있던 남은 밧줄을 주먹에 쥐고 돌리면서 말했다. 밧줄을 다 감은 쟈론은 남은 밧줄을 허리에 찬 복대에 집어넣었다.
“정말 빠르긴 빠르군, 쟈론. 12명을 순식간에 묶었다.”
“내가 원래 손이 빠른 거로 유명하잖아?”
쟈론이 으쓱댔다.
학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눈앞이 조금은 흐리게 보였고, 소리도 완전하게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파악해 보려는 거였다.
특수부대원들은 모두 팔을 뒤로한 상태로 쟈론의 밧줄에 묶여 있었다. 부대원들이 무장하고 있던 자동소총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RPG도 마찬가지였다. 발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까 그거, 뭐였어요?”
학철이 조금 휘청거리며 리얀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리키 곽도 천천히 일어나 학철의 뒤를 따랐다.
“뭐 말이냐?”
“그, 앞 안 보이고, 소리 안 들리는 거요.”
“섬광 마법을 썼다. 적을 살상하지 않고 무력화시키는 마법이다.”
“우리도 있어요, 그런 무기. 섬광탄이라고.”
“그래. 잘 됐다.”
리얀은 학철의 말을 무시하고 묶여 있는 부대원 하나의 마스크를 벗겼다. 20대 청년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당혹감에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너희들 지휘관이 누구냐?”
리얀이 부대원에게 물었다.
“대, 대장님! 이세계인이 우리 지휘관을 찾습니다!”
청년이 고함을 쳤다.
“여기! 나다, 나야! 나랑 이야기해. 내 부하들은 내버려 두고.”
구석에서 부대원 하나가 말했다. 리얀은 그쪽으로 향한 뒤, 역시 마스크를 벗겼다.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머리를 짧게 깎은 사내였다. 면도는 깔끔하게 했지만 피부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대가 지휘관인가?”
“우리는 경찰이다. 여기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리얀이 단검을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사내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지, 진짜야. 우리는 신고를 받고 출동….”
“나는 흑마법사의 부하가 아니다.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 온, 이세계인이다.”
리얀이 말하자 사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그럼….”
“죽일 생각 없다.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 나도 이렇게 힘들여서 밧줄을 낭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쟈론이 거들었다.
“자. 그럼 다시 묻겠다, 지휘관. 그대의 관등성명을 부탁한다.”
“…대한민국 정보부 타격대 소속 특임 중대 중대장 장철중 소령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가 소속을 밝혔다.
“어때? 진실인 것 같아?”
쟈론이 리얀에게 물었다.
“진실이다.”
리얀은 쟈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후, 사내의 팔을 묶고 있는 밧줄을 단검으로 끊어주었다. 사내는 손목을 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 햇살 용역에 있는 흑마법사의 부하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는 걸 알고 있다. 보는 바와 같이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흑마법사의 부하들은 우리가 이미 제거했다. 그리고 이곳의 지휘관도 처치했다.”
“아….”
중대장이 탄식을 냈다.
“왜? 이세계인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가?”
“가급적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이세계인. 여의치 않으면 사살해도 좋다고는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갔다, 중대장. 우리는 이곳 사람들을 해칠 마음이 전혀 없다. 오직 흑마법사를 죽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몇 가지 묻고 싶다. 흑마법사는 이곳 정부를 배신한 것인가?”
리얀이 물었다.
“미안하지만 잘 몰라, 이세계인. 우리는 흑마법사가 있고, 흑마법사 부하 중에 이세계인이 섞여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여기 온 거야.”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
“그래. 말투를 봐서는 그쪽도 아마 군인인 것 같은데… 군인은 원래 명령을 따를 뿐이지. 안 그래?”
중대장이 리얀에게 되물었다. 리얀은 중대장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중대장도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몸인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리얀의 눈싸움을 피하지 않는 것을 보면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진실이로군.”
“자, 그럼 됐네. 먼저 내 부하들, 풀어줘. 그리고….”
“그리고?”
쟈론이 물었다.
“이세계인들은 우리하고 함께 가지. 우리 부대로. 흑마법사를 죽이러 왔다고 했지? 도와주겠어. 아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아주 크고 넓어. 이세계인 몇 사람이 흑마법사를 찾아서 죽인다는 건 불가능해. 우리 도움을 받지 않으면 말이지.”
“…거짓말이로군.”
리얀은 이렇게 말하곤 쟈론에게 신호를 보냈다. 눈치를 챈 중대장이 쟈론을 향해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날렸다. 몸을 돌리는 회전력을 이용한 빠른 주먹이었다. 하지만 학철은 중대장이 날린 주먹을 아주 똑똑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쟈론이 오른손으로 날아오는 중대장의 팔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어, 어….”
다음 순간 쟈론은 중대장의 오금을 발로 가볍게 툭 찼다. 그러자 중대장은 자연스럽게 쟈론에게 오른팔을 뒤로 꺾인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아아! 이봐! 왜 이러는 거지? 우리는 너희를….”
“나는 그대가 이세계인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따를 생각일 뿐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중대장.”
“그야 명령이니까….”
“그대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이 막상 우리를 접한 뒤에 어떤 판단을 내릴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다, 중대장.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대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리얀. 여기서 이놈들 다 죽이고 우리끼리 흑마법사를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아앗!”
쟈론이 중대장의 팔을 조금 더 깊게 꺾으면서 말했다. 중대장은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쟈론. 어차피 이들은 군인이고, 우리는 군인과 맞서 싸운 것이니 그렇게 하는 편이 가장 온당할 것이다.”
“저기요,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 정부하고 적이 되는 건데… 괜찮겠어요?”
학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눈도 뿌옇게 보이고 있었고, 이명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학철. 여기서 다 죽으면 누가 죽인 것인지 모를 테니까.”
리얀이 냉혹한 얼굴로 학철에게 말했다.
“여기 CCTV 다 설치되어 있어요. 그리고 근처에 목격자들도 있고요.”
리얀이 옆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군. 중대장. 이곳을 공격하기로 했을 때, CCTV와 목격자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는가?”
리얀이 중대장에게 물었다. 중대장은 쟈론의 손에서 풀려나 보려고 몸을 좌우로 흔들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나도 모른다. 명령을 받았을 뿐.”
“분명 무슨 계획이 있긴 했을 텐데….”
쟈론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리얀과 쟈론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 이 고양이, 나 본 적 있는데….”
학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킬타스!”
어린아이 음성이 크게 울렸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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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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