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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용족이 약속 깨는 거 본 적 있어?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배신하지 않아. 게다가 싸우다 죽는 거야 영광이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건 사양하겠어. 크크크.”
학철은 룩칼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도대체 리얀은 어떻게 할 생각인지가 궁금했다.
‘정말로 혼자 들어가서 공주를 구출할 생각인 건가? 세이라도 없이?’
룸미러를 통해서 흘낏 리얀이 뭘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리얀은 손바닥에서 피를 내서 생수병을 채우고 있었다.
“제법 많이 모으는군, 리얀. 이번에도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인가? 크크크.”
“필요하다면.”
리얀은 짧게 대답했다.
“리얀. 내 충고 하나 하지.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진 말라고. 일리스 공주의 숙소가 건물 3층이니까 말이야. 크크크크.”
“일리스 공주의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인가?”
“전에 와 본 적 있거든. 정중하게 초대를 받았었지. 좋은 날이었어.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콜라가 있었지. 아! 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병력 배치 상황이나 여기 지휘관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줘. 그런 건 말할 수 없거든. 말하는 건 흑마법사를 배신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내 입장, 이해하겠지? 크크크.”
“물론이다.”
리얀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거 하나는 이야기해 주지. 햇살 엔터 대표는 나하고는 많이 달라. 크크크.”
“햇살 엔터 대표요?”
학철은 운전을 하면서 룩칼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햇살 용역 대표가 자이스 장군과 룩칼이었으니, 이곳 햇살 엔터 대표도 틀림없이 흑마법사의 부하일 것 같았다.
“어허. 묻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답 못 한다고. 크크크크.”
“아니, 전 그게 아니라….”
“됐다, 학철. 넌 운전에나 집중해라. 이곳은 전장이고, 전장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흔하다. 더 묻지 마라.”
“아니, 전 뭘 물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햇살 엔터 대표라면 꽤 유명한 사람 아니냐는 거였어요. 리키 곽. 그, 90년대 유명했던 그룹 응급열차 베이스 쳤던 사람요.”
햇살 엔터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순전히 마셰라 팬질을 하다 보니 어찌어찌 알게 된 거긴 했지만 그래도 리키 곽은 꽤 유명인이었다.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추억의 8090 쇼, 혹은 토크쇼 중간에 등장하는 자료화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리키 곽. 그래. 햇살 엔터 대표지. 이름은 분명 리키 곽이야. 하지만… 진짜 리키 곽일까? 크크크.”
룩칼이 꼭 놀리는 것 같은 투로 학철을 향해 말했다.
“그럼 혹시, 누군가가 리키 곽을 죽이고 리키 곽 행세를 하고 있다는… 그런 건가요?”
“글쎄? 진실은 뭘까? 응? 크크크크크크.”
룩칼이 웃음소리를 길게 끌었다. 학철은 영 불쾌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리키 곽의 정체가 뭘 지가 궁금해졌다.
학철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이제 전방 20m 앞이 목적지이니 간판이 보여야 했다.
와장창!
하지만 간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3층에서 뭔가가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오는 광경이었다. 학철은 반사적으로 차를 세웠다.
“좀 늦은 거 같네? 크크크.”
룩칼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학철은 바닥에 떨어진 물체가 뭔지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깔끔하게 분리된 인간의 하체였다.
“으, 으으악!”
학철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봐도 훼손된 인체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와장창! 쾅! 쾅!
이번에는 연이어 소음이 울리더니 비슷한 크기의 물체 세 개가 창을 깨고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절단된 인간의 하체 하나와 상체 둘이었다. 상체 하나는 권총을 쥐고 있었지만 이내 손에서 힘이 풀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 저, 저… 쟈론?”
학철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학철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떠올린 것은 오툴이 했던 말이었다.
‘쟈론 님은 여기에 자기 칼을 들고 왔다고요. 여기 이런 벽쯤은 한칼에 샥샥! 그리고 몇 명이 덤비건 상대가 안 되죠. 아마 백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다 죽여버릴걸요?’
“쟈론? 쟈론이라고 했는가?
리얀이 학철에게 물었다.
“아, 예.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 들었어요. 그, 용기사 단장, 오툴이라는 꼬마가 그랬어요. 쟈론은 자기 칼을 가지고 여기 왔고, 백 명이 달려들어도 다 베어버릴 수 있다고….”
쾅!
학철의 말은 유리창이 깨지는 소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이번에 창을 깨고 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아주 제대로 하는군, 쟈론. 크크크. 쟈론이 여길 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쟈론, 그 친구, 일리스 공주 경호 담당이었잖아? 크크크크.”
리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수병에 모아둔 피를 조금 손바닥에 쏟더니 그것을 건물 쪽으로 띄워 보내고 있었다.
“아, 맞아. 그날 경호 담당은 쟈론 뿐만이 아니었지. 최강의 마법사 리얀도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어. 그런데 최고의 검사와 최고의 마법사가 지키고 있었어도 일리스 공주의 납치를 막지 못했잖아. 그렇지? 크크크. 흑마법사의 이름이 12대륙 8대양으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나? 맞지? 크크크크.”
리얀은 룩칼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신이 건물 쪽으로 날려 보낸 피에 집중했다. 아마도 피를 이용해 건물 내부를 정찰하는 모양이라고 학철은 생각했다.
“룩칼. 나는 이제 건물로 들어가겠다. 그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이것은 나와 흑마법사의 싸움이다. 그대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여기 가만히 있으면 된다. 절대 끼어들지 말 것을 당부한다, 룩칼.”
“용족은 약속을 깨지 않는다니까? 누가 내 부하들을 죽였는지, 누군가 날 배신한 게 아닌지 확인할 때까지는 절대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아. 크크크크.”
“좋다. 학철! 그럼 차에서 내려라!”
리얀이 호기롭게 외치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예? 저, 저요?”
“그래. 너. 학철.”
“…제가 왜요?”
“그럼 당연히 따라와야지. 날 혼자 보낼 생각이었단 말이냐?”
“저기….”
학철은 잠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생각을 정리했다.
“저기요, 리얀 님. 제가 지금 리얀 님을 따라가 봐야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뻔하잖아요. 전 마법사도 아니고 암살자도 아니거든요? 그냥 알바생이에요, 알바생.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가면 오히려 방해가 될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누군가 내 등 뒤를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학철, 너뿐이다.”
“…제가 리얀 님 등 뒤를 지킨다고요? 제가, 어떻게요?”
“내 등 뒤에서 내 눈 역할을 해 주면 된다.”
“저, 지금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조폭들이 달려들 텐데 맨손으로 제가 도대체 뭘….”
“눈이 되라고 했지 손이나 발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싸울 필요 없다. 그저 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학철.”
“와! 전투에 참여하게 됐네, 학철. 정말 신나겠는데? 12대륙 최강 검사가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내 처지를 생각해 봐! 정말로 부러워, 부러워! 크크크.”
룩칼이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 한 말은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룩칼은 정말로 부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햇살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서두르자, 학철.”
“저….”
“내 등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어서!”
리얀은 이렇게 말하더니 햇살 엔터테인먼트 건물 쪽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학철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무운을 빈다, 학철! 크크크크.”
룩칼이 학철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학철은 리얀의 뒤를 따라서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타타탕! 탕! 탕!
건물 쪽에서 요란한 사격 음이 울렸다. 그리고 총성 사이사이로 사람의 비명과 기괴한 파열음,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학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도망칠까?’
학철은 겁이 났다. 이대로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유탄에 맞을 수도 있었고, 뭔가 잘못돼서 절단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구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람의 상체와 하체, 그리고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절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체인지라 팔다리가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철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피비린내가 심하게 풍겼다.
“학철!”
리얀이 큰소리로 외쳤다.
“예, 예?”
“정신 차려라. 여긴 전장이다. 정신 놓으면 죽는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뒤를 지켜라. 그리고 금화 1천 개를 생각해라.”
리얀이 말했다.
금화 1천 개. 현금 100억 원. 세금 내고 수수료 내고 나면 50억 원이 될지, 40억 원이 될지 알 수 없긴 했지만 어느 쪽이건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야 한다는 걸까…?’
학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1층 쪽으로 황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사내였다. 사내는 손에 토카레프 권총을 쥐고 있었다.
“으아아악!”
사내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비명을 질렀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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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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