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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에는 여직원 하나가 책상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여직원의 이름은 한가히였다.
“아, 진짜 거지 같은 회사, 내가 진짜 별꼴을 다 봤지만 이건 진짜 너무 심한 거 아냐?”
가히는 책상 밑에 숨은 상태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짜증을 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싶었다.
수리 맡긴 신발이 며칠 더 걸리겠다고 해서 맘에 들지 않는 구두를 신고 출근해야 했다. 게다가 아침에 한 화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하철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고, 아침에 먹은 샐러드도 드레싱이 상한 것 같았다.
“진짜 내가 이 거지 같은 회사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가히가 중얼거리는데 3층 계단 쪽에서 펑, 하는 폭음이 연이어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 다물고 여기에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가히는 햇살 용역에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부터 이 회사가 제대로 된 회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사원들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조직폭력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20명이 넘었고, 다들 이 조직폭력배들이 근무하는 회사에 근무하고 싶어 했다.
가히는 자신이 합격한 것이 정말로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입사한 후로도 회사에서는 일반적인 회사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툭하면 외근이라는데, 나가서는 다쳐서 돌아오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번은 짱구파인지, 짱돌파인지 하는 조직폭력배들이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때도 가히는 책상 밑에 숨어서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누구를 찾아야 한다면서 직원들 전원이 출근을 하고는 퇴근은 하지 않았다.
“내 진짜 정규직이니까 꾹 참고 다니는 거지, 이런 회사를 어떻게 계속 다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히는 꾹 참고 계속해서 회사에 다닐 생각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학벌과 경력으로는 월급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나오는 정규직 자리 찾기가 정말로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그냥 여기서 좀 숨어 있다 보면 일 해결 될 거야….”
가히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하고 눈을 감고 있자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와장창!
적어도 창문이 깨질 때까지는 그랬다.
“꺅!”
가히는 큰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 우시준?”
가히는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는 창문을 깬 게 드라마 허깨비의 주인공 우시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몇 번 비볐다.
“가히 씨! 빨리! 이리로 와!”
우시준이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진 대사를 읊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우시준이 아니었다. 허깨비 애청자 입장에서 우시준의 맑은 테너 음색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가히에게 말하고 있는 우시준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를 금속으로 긁는 것처럼 가늘고 거칠었다.
“…대표님?”
허깨비 애청자이기 이전에 가히는 햇살 용역 직원이었다. 매일같이 들어 온 대표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히 씨. 지금 거기 있으면 죽어! 빨리 와, 이리로!”
우시준과 똑같이 생긴, 그러나 대표와 완전히 같은 음색을 가진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시 들으니 이건 틀림없는 진짜 대표 목소리였다. 말투도 대표와 똑같았다.
“대표님, 혹시 우시준 몸속으로 들어간 건가요? 그 왜, 있잖아요 영화 말코비치인지 뭔지, 뭐 그런 영화처럼…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우시준하고 영혼 바뀐 건가요? 그런 드라마 있었는데, 그 뭐더라….”
우시준과 똑같이 생긴 사내는 가히가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는 드라마의 제목을 떠올리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
“가히 씨!”
남자는 밧줄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가히의 허리를 안고는 그대로 어깨에 둘러메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가히는 우시준의 힘이 이렇게 셀까, 아니면 대표님의 힘이 원래 이렇게 셌던 걸까, 이런 생각을 했다.
“눈 감아! 내려간다!”
우시준을 닮은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밧줄을 타고 4층에서 지상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히는 사내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대표님?”
눈을 감은 상태로 가히가 대표에게 물었다.
“내 부하를 살리고 있는 거지, 뭘 물어봐?”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
같은 시간, 학철은 창고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계속되던 총성은 멎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짜 내가 머리만 좀 작았어도….”
학철은 도저히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환풍구를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에 침입한 자들이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공간치고는 꽤 넓은 곳이었다. 아마도 학철과 오툴을 감금한 것과 같은 용도로 자주 사용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넓은 공간에 몸을 숨길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감금된 창고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모여 있고, 그곳에 주인공은 숨기도 하고, 또 잡동사니를 활용해서 탈출 도구로 쓰기도 하던데 그럴 여지를 없애려고 한 것인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고정된 의자 두 개뿐이었다.
‘환풍구로 나가는 게 불가능한 건 확실하니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볼까?’
실내조명이 없어서 어둡기는 하니까 그러고 있으면 확실히 눈에 덜 뜨일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창문 틈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살핀다면 들키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때 여기를 수색하러 들어온 사람이 대충 훑어보고 나가는 걸 기대하는 건… 복권 당첨되길 바라면서 복권 사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일 거야.’
학철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창문을 통과하면 밖일 거였다. 다만 창문이 거의 3cm는 될 거 같은 강철판으로 용접이 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공구가 있다면 뜯어낼 시도를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기는 해도 강철판은 튼튼하게 설치되어 있어서 맨손으로 어떻게 한다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구가 있다면? 아마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날 거였다.
‘지금 밖에는 총을 든 놈들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는 게 분명해. 그런데 공구를 가지고 큰 소리를 내면 바로 여기로 들이닥치겠지. 그렇게 되면….’
물론 좋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는 것을 걱정하기에는 지금 공구가 없다는 분명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진짜 내가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쾅!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다. 학철은 소리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쾅! 쾅!
큰 소리는 몇 번 더 반복되었고, 이윽고 용접되어 있던 두꺼운 강철판이 떨어졌다. 역시나 큰 소음과 함께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지며 피어오르는 먼지를 또렷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 빛을 등지고 눈에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뛰어 내려왔다.
“세, 세이라!”
학철은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엉덩이를 땅에 깔고 있는 자세 그대로 이렇게 소리쳤다.
“시간 없어요! 빨리!”
세이라가 학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학철은 그 손을 얼른 붙잡았다.
“자! 먼저 올라가요.”
세이라가 말했다.
“여, 여길요?”
“팔을 뻗어요. 쭉!”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학철의 허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학철이 창문에 손이 닿자, 세이라는 학철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밀었다. 학철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창문을 올라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학철은 몸을 돌려 세이라의 팔을 잡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세이라는 혼자서 너무나도 쉽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숙련된 암살자란 게 원래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학철은 머쓱해졌다.
“세이라, 고마워요. 그런데 리얀 님은요?”
학철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물었다.
“위에 있어요. 아마 곧 내려오시겠죠. 그런데 보니까 환기구가 뚫려 있던데….”
세이라는 뭔가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학철은 무슨 질문이라도 대답해 주겠다는 진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빈 의자, 다른 누가 잡혀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사람은 환기구를 뚫고 도망친 거고요. 혹시 오툴? 맞나요?”
세이라가 물었다.
“맞아요. 고양이 한 마리를 불러서 자기 팔 풀고 여기서 나갔어요. 절 버려두고요.”
“그 변태 꼬맹이…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세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꼬마,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요? 용기사단장이라고 하던데요.”
“예, 맞아요. 용기사단장. 킬타스라고 엄청나게 큰 용을 타고 다녔어요. 그게 그 변태 꼬맹이 오툴의 능력이거든요. 동물하고 이야기 나누는 거. 계약인지 뭔지 해서 서로 돕는 거. 그게 오툴이 잘하는 거였죠.”
세이라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학철의 팔목을 잡았다.
“아무튼 그 꼬맹이 다시 만나게 되면 절대로 믿지 마세요. 절대로.”
세이라가 이렇게 말하는데, 밧줄을 타고 두 사람이 내려왔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학철도 아는 얼굴이었다.
“어? 우, 우시준?”
학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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