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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용기사요?”
학철은 잘 모르는 단어를 듣고는 이해가 안 가서 이렇게 물었다.
“예. 용 타고 다니는 기사. 용기사. 뭐, 여긴 그런 거 없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암튼 그래요. 전 킬타스라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빠른 용을 부렸죠. 그것도 부렸다기보다는 설득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요. 학철이라고 했죠? 오툴이라고 불러 주세요. 보통은 ‘용기사단장 오툴’이라고들 불렀지만 용기사단장은 빼고 그냥 오툴, 만요. 제가요, 용기사단장은 맞는데 지금 용이 없어서 용기사단장 소리 듣기가 좀….”
오툴은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알았어요, 오툴. 그런데 저, 이 팔 좀….”
“어휴, 그러게요. 이 팔 푸는 거, 진짜 힘들었어요. 원래 동물들하고 교섭하는 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이 고양이라는 친구들은 도대체가 말이 잘 안 통해요! 진짜 싹싹 빌었어요. 제발 좀 풀어달라고. 제가 평생 은혜 갚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진짜 겨우겨우 간신히 푼 거예요.”
“저도 그렇게 싹싹 빌어야 할까요?”
학철은 오툴의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면서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 할 시간이었다. 괜히 오툴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럴 수도 없고요. 동물 친구들하고 소통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괜히 용기사단장이 아니라고요. 그건요, 타고나야 해요. 소통 능력을 타고나야 한단 말이죠.”
“오툴 님?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 팔을 풀어달라고 제가 오툴 님한테 빌어야 하느냐는 거였어요.”
학철은 알아듣기 쉽게 아주 차분히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은 여전히 꾹 억눌러야만 했다.
“아, 그 이야기였구나. 아뇨. 아니에요. 빌지 마세요. 안 풀어줄 거니까.”
오툴이 말했다.
“엥? 안 풀어준다고?”
학철은 자신도 모르게 꾹 참았던 분노를 목구멍으로 토해내고 말았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메아리가 들릴 정도였다.
“예. 여기, 저 혼자 밖에 못 나가요.”
오툴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냐는 투였다.
“아니 왜….”
“여기 아까 고양이가 들어올 때도 간신히 들어왔어요. 창문을 막아놨거든요. 철판으로. 그래서 저 위에 환기구로 들어온 거예요. 저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에요.”
오툴은 손가락으로 학철의 등 뒤편 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학철은 몸이 묶여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요, 만약에 내가 학철을 풀어주고 혼자 도망쳤다고 생각해 봐요. 아까 그 자식이 돌아와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학철은 조금 전 자이스 장군의 외형을 한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팔이나 다리가 하나쯤 잘려도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지금보다 훨씬 불편하지 않겠느냐?’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오툴의 말은 옳았다. 학철은 굳이 팔다리를 잃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구멍이 작아서 그런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진짜, 여기 킬타스만 있었으면 이까짓 벽쯤 순식간인데! 아, 킬타스가 누구냐 하면요, 제가 타고 다니던 용 이름이에요. 킬타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빠른 용요. 이야기했던가요?”
“예.”
학철은 화가 났다. 하지만 딱히 화를 낼 대상이 없었다. 구멍이 작다면 그 구멍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고, 나갈 수 없다면 팔다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까 그랬잖아요. 안 죽인다고.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자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얌전히 묶여만 있으면 절대로 죽이진 않을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그런데 학철. 아까 했던 말 다 진짜죠? 그, 리얀 님 종자가 아니란 거, 그리고 리얀 님이 만난 용사가 세이라 한 사람뿐이란 거. 진짜죠?”
“그, 그야 그렇죠.”
학철은 자신이 정보를 상대방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역시 그렇죠. 제 능력은 정신감응 마법하고 비슷한 거라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정도는 가릴 수 있거든요.”
오툴은 우쭐거리며 말했다.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딱 중학생, 딱 2학년 느낌이었다.
“그런데요, 제가 가진 동물과 교섭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정신감응 마법하고 달라서 다른 건 못 해요. 그냥 참 거짓만 가린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살려둔다는 건 어디까지나 리얀 님 오기 전까지예요. 그 뒤는 몰라요. 죽일지, 살릴지.”
“…그럼 어쩌죠?”
학철이 물었다. 진심이었다. 만약 오툴이 혼자 이곳을 빠져나가 홀로 남겨지게 된다면 뭘 어째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버티세요. 리얀 님이 구하러 올 때까지요.”
오툴은 놀리는 투로 말했다. 꼭 뒤에 ‘용용 죽겠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학철은 화가 났다. 분명 오툴이 한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혼자만 갈 수 있는 좁은 탈출구가 있고, 그곳으로 자신은 도망칠 테지만 학철은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묶여 있는 편이 안전을 위해 좋을 것이다.
“하필 리얀 님을 만나서 그래요. 쟈론 님을 만났다면 좀 달랐을 텐데요.”
“쟈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예. 내가 있던 곳에서는 최고 칼잡이였어요. 여기 표현으로 하자면… 검의 달인? 검성? 양날이 있는 검을 엄청나게 잘 다루는 기사단장이였어요. 생각을 해 보세요. 리얀 님은 마법을 못 쓰잖아요. 에테르가 없으니까. 저는 말할 것도 없죠. 용 없는 용기사단장이니까… 하지만 쟈론 님은 여기에 자기 칼을 들고 왔다고요. 여기 이런 벽쯤은 한칼에 샥샥! 그리고 몇 명이 덤비건 상대가 안 되죠. 아마 백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다 죽여버릴걸요?”
쟈론이라는 검객이 만약 리얀과 만난다면 엄청난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묶여 있는 상황에서 들은 쟈론이라는 칼잡이 이야기는 그저 놀리는 말의 연장일 뿐이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럼 그 쟈론이라는 칼잡이, 검의 달인, 그분,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학철이 물었다. 조금이라도 오툴을 더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이대로 혼자 남겨지고 싶지는 않았다.
“저하고 같이 있었는데, 제가 붙잡히는 틈에 도망쳤어요. 사실 쟈론 님이 절 구하러 오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이해는 해요. 쟈론 님의 목적은 흑마법사를 베는 것이지, 저를 구하는 게 아닐 테니까요. 지금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 목적은 흑마법사를 죽이는 거예요. 당신을 구하는 게 아니라고요.”
“저, 그럼요….”
“쟈론 님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다른 수라도 내 봐야죠.”
오툴은 자신의 팔을 풀어준 고양이를 안아 들면서 말했다.
“이곳에도 다급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그런 속담이나 격언 같은 게 있나요? 아무튼 그런 심정이라는 거죠. 그럼 갈게요. 살아있으면 다시 보겠죠. 안녕!”
상큼하고 발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자, 잠깐! 잠깐만요!”
학철은 다급한 목소리로 오툴을 불러 세웠다.
“왜요? 더 할 말이 남아 있어요?”
“오른손. 오른손만 좀 풀어주세요.”
학철은 간절함을 담아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오른손만? 왜요?”
“…코가 가려워서 그래요.”
오툴은 잠깐 생각하더니 크게 선심 쓴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는 학철의 옆으로 와서는 간단하게 오른손을 묶고 있는 케이블타이를 끊었다. 단 한 동작으로 끊는 것을 보니 손톱이 아주 단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가요! 행운을 빌게요!”
해맑게 웃는 오툴의 얼굴을 보며, 학철은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애써서 풀린 오른손으로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툴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학철은 콧잔등을 긁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시원하지는 않았다.
***
홍 대표는 10분 만에 도착했다. 리얀과 세이라는 홍 대표의 차에 탔다. 검정 SUV였다.
“학철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홍 대표는 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 않았다. 학철이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납치당했소.”
“그렇군요. 일단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합류해서 이후 일정을 논의해 보죠. 그런데 두 분은 괜찮으신 겁니까?”
차를 출발하면서 홍 대표가 물었고, 두 사람 다 아무 이상 없다고 말했다.
“혹시 놈들이 두 분 계신 곳의 위치를 파악하고 찾아왔습니까?”
홍 대표가 물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간밤에 학철이가 인터넷으로 햇살 용역 관련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홍 대표. 그걸 어떻게…?”
리얀은 홍 대표의 말에 잠시 혼란을 느꼈다.
‘정신감응 마법인가? 아냐. 그럴 리 없다. 만약 홍 대표가 아주 조금이라도 마법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홍 대표는 분명 이곳의 방식으로 학철이 햇살 용역 정보를 찾아보았다는 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사실은 저도 추적당할 뻔했습니다.”
리얀이 생각하는 사이, 홍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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