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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은 집중하기가 힘이 들었다. 옆의 남자는 계속 기괴한 소리를 냈고, 창밖에 고양이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아! 진짜!”
학철은 신경질을 내며 발을 굴러보았다. 달리 움직일 수 있는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케이블타이로 묶인 발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학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자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사내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창밖의 고양이도 울음을 그쳤다.
계속되던 소음이 멈추자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저기요….”
학철은 긴장된 음성으로 읍읍 거리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죽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읍읍 거리는 소리는 멈추었지만 숨 쉬는 소리는 들렸다.
‘죽은 건 아닌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이 열렸다. 학철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말했다. 빛이 들기는 해도 역광이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이는 것은 분명 자이스 장군의 실루엣이었다.
우리말에서 호칭 문제는 늘 어려운 문제다. 처음 보는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고민은 누구나 다 해 보았을 것이다.
학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했다고는 해도 호칭문제는 언제나 고민이었다.
학철은 지금 눈앞에 그림자처럼 어둡게 보이는 사람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저기요, 저, 얌전히 있었는데요….”
학철은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말고. 오툴!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뭐 그렇게 소리를 내고 그러나! 응?”
사내가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큰 소리로 학철 옆에 묶여 있는 사내에게 소리를 쳤다. 묶여 있는 사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좋아. 이제 내가 몇 가지를 물어볼 것이다.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나는 너를 가만히 둘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대답을 거부한다면, 나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내 말, 이해하겠나?”
사내가 말했다. 점잖은 투였다. 학철은 세이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철. 아까 자이스 장군처럼 보였던 녀석, 분명 수인족이었어요. 그 도약력, 지붕을 뜯어버리는 악력, 모두 다 수인족의 능력이었다고요.’
그리고 날아오는 총탄을 튕겨낸 것도 수인족의 능력이라고 했다. 학철은 저 사내의 팔뚝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비늘 같은 촉감이 떠올랐다.
“그럼 먼저 하나 묻지. 내가 어제 본 게 전부냐?”
“예?”
학철은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렇게 반응했다.
“내가 어제 차 지붕을 뜯었을 때,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암살자, 너를 보았다. 다시 말해서 리얀이 만난 동료, 이곳 사람 말고 진짜 싸움을 할 수 있는 동료가 그 암살자 하나뿐이냐는 거다.”
“예.”
학철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암살자 이름은?”
“세이라요.”
“소속은?”
“…그런 건 이야기 안 해줬어요.”
“그래. 그랬겠지. 아무튼 지금 리얀이 모은 동료는 암살자 하나뿐이라는 것, 맞지?”
“예.”
사내는 학철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아마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모양이었다.
눈을 보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은 대체적으로 틀린 말이다. 학철은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았다. 특히 이제는 헤어진 전 여자친구, 미해도 그랬다.
“좋아. 그럼 다음 질문. 너, 핸드폰. 어디다 뒀지?”
의외의 질문이었다. 학철이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걸 알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리얀 님 주고 왔어요. 인터넷으로 정보 찾아볼 게 있다고 해서….”
학철은 재빨리 자신이 아는 것을 다 말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이 외모만 사람 같을 뿐, 사람이 아닌 수인족이라고 생각하니 등에 소름이 다 돋았다.
“그래서 지금 핸드폰이 없는 거로군. 알겠어. 그럼 지금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리얀은 어디에 있지?”
“지금 신촌 모텔 방에 있어요. 테마 모텔인데… 지하철하고 감옥 테마 방, 두 개 얻었거든요? 그 두 방 중 하나에 있을 거예요.”
학철은 이번에도 빨리 대답했다.
“그래. 지금 애들 보냈으니까 곧 찾을 거야. 저기 묶여 있는 오툴이야 나와 싸웠던 적이니 나에게 적대적일 수 있어. 난 그런 거 이해해. 하지만 너는 리얀이 고용한 길잡이지? 굳이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계약관계잖아. 계약이라면 나도 맺을 수 있어. 리얀이 얼마를 약속했지? 응?”
사내가 물었다.
“…금화 1천 개요.”
학철은 이 대답은 조금 망설였다. 어쩐지 정직하게 대답해 주면 절대로 금화를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금화 1천 개라니. 아주 세게 불렀군. 하긴. 이번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테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잘 들어. 리얀이 너에게 금화 1천 개를 주는 일은 생기지 않아. 그 전에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는 죽을 테니까. 크크크.”
아주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내의 웃음소리는 자이스 장군의 얼굴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머리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자이스 장군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늘고 거친 음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내가 왜 자이스 장군의 외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저 사람은…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야. 우리나라에서 자기 얼굴로는 돌아다닐 수도 없는 수인족이라고. 그러니 진짜 자이스 장군이 죽었으니까 자이스 장군하고 똑같은 얼굴로 다니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
학철은 이렇게 생각했다.
“좋아, 좋아. 이곳에 에테르가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그렇다면 리얀은 어떻게 에테르를 만드는지 아는가?”
학철은 이 질문에도 잠시 망설였다. 이야기를 했다가는 리얀이 죽을 확률이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화 1천 개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피를 내요. 피 안에 에테르가 있다고 했어요.”
“읍! 읍! 읍!”
학철이 대답하자 읍읍 거리던 사내, 오툴이 큰 소리를 냈다.
“조용히 햇!”
사내가 고함을 쳤고, 오툴은 조용해졌다.
“정직하게 대답 잘 해줬다.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건. 우리도 바보는 아니거든.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렇다면 리얀은 피를 어떻게 내지?”
“단검요. 단검을 가지고 다녀요.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서… 피를 내요.”
학철이 대답했다.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분명 대답을 하면 리얀이 죽을 확률이 올라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살아야지 죽은 뒤에 금화 1천 개고 1만 개가 무슨 상관이야?’
학철은 죽고 싶지 않았다. 사실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주 작은 고통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정보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꽤 좋은 정보야. 단검으로 피를 낸다. 생각해 보라고. 사람이 쉽게 피를 낼 수 있어? 그리고 피를 낸다고 해도 그 피를 가지고 마법을 쓰려면 또 시간이 필요하지. 크크크. 그래. 그거면 충분해. 지금 당장은 말이지.”
사내는 이렇게 말하곤 왼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내가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봐. 너무 겁먹지 말라고. 넌 죽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사내가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했다. 학철은 귀를 쫑긋 세우고 사내의 말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너는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를 잡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리얀은 계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아마 널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다. 그리고 그것이 리얀의 발목을 잡겠지. 크크크. 아무튼 그때까지는 안전할 테니 너무 겁먹을 것 없다.”
학철은 이 말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살아있기만 하면 써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 말도록. 다시 말해서 목숨이야 붙어있겠지만 험한 꼴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여기서 탈출을 하려고 시도한다거나, 다시 내가 왔을 때도 여전히 거짓말을 한다거나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쾌활한 말투이긴 했지만 분명 겁나는 이야기였다. 학철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잘 생각해. 사람은 팔이나 다리가 하나쯤 잘려도 살 수는 있어. 하지만 그렇게 살면 지금보다 훨씬 불편하겠지?”
학철은 이번에는 뭔가 재치 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한 소리 했다가 사내의 협박이 실현되는 걸 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소중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팔과 다리가 두 개씩 있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 또 보자고. 크크크”
사내는 방을 나갔다. 학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지 사이를 살펴보았다. 혹시 오줌을 싸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 진짜 이렇게 쫀 건 군대에서 사고치고 행정실 불려갔을 때 이후 처음이네. 그때 진짜 영창 가서 군 생활 늘어나는 거 아닌가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학철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있는 사내를 살펴보았다. 사내는 더 이상 읍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저기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론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꼭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학철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창밖에서 들리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느새 학철 바로 옆에서 들렸다.
“어라? 어떻게 들어온 거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 없는 고양이었다. 털은 관리를 하지 않아서 지저분했고 왼쪽 귀 끝이 살짝 잘려나가 있었다. 나름대로 거친 삶을 산 고양이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의 눈이 초록색 빛을 내며 반짝였다.
“도와줄 수 있겠니?”
학철이 고양이를 보며 물었다. 고양이는 울음소리로 답했다. 꼭 말을 알아듣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여길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학철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위쪽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꼭 암울한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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