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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얀 님은 잘 아는 전화기만 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다.”
“홍 대표 전화는 잘 모르시잖아요?”
“학철. 너의 전화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리얀은 이렇게 말하더니 학철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핸드폰은 잠금이 해제되고 카톡으로 넘어갔다.
- 홍 대표. 리얀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카톡에 문자메시지가 저절로 쳐졌다. 학철은 그저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학철. 핸드폰을 여기 내려놓아라.”
식탁 대용으로 쓰고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리얀이 말했다. 학철은 그 말을 따랐다.
- 지금 경찰서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저는 조사가 끝났습니다. 리얀 님은 안전한 곳에서 잘 계시지요?
스피커폰으로 홍 대표의 음성이 전해졌다.
“그렇소. 사장은 어찌 되었소?”
- 사장님은 좀 더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사할 게 남았다고 하네요. 조사 끝나면 사장님은 바로 게스트하우스로 갈 겁니다. 가서 오브라이언 만나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볼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겠소. 그럼 우리, 안전한 곳에서 만나서 이야기 나눠야 할 것 같소.”
- 그래야죠. 그런데 그 전에 잠깐 집에 들러서 샤워 좀 하고 나오겠습니다. 1시간 뒤. 어떻습니까?
“좋소. 그럼 1시간 뒤에 연락하겠소.”
전화는 끊어졌다.
“그럼 그사이에 전화 기다리면서… 할 일을 해 놔야겠네요.”
학철은 마셰라의 일정을 확인했다.
“마셰라, 그러니까 일리스 공주는요, 오늘 강남 코엑스에서 저녁 8시에 행사가 있네요. ‘내 고향 먹거리 대잔치’ 전시 행사.”
링크된 행사 설명에 따르면 ‘내 고향 먹거리 대잔치’는 올해로 5년 차를 맞는 유서 깊은 행사로, 전국 향토 음식을 발굴하고 전시해서 프랜차이즈를 여는 등 대중화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학철은 그 설명을 따로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녁 8시에 강남 코엑스라는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말이냐?”
“그렇죠. 그런데 딱 8시에 시작하지는 않을 거예요. 초대가수 공연은 항상 밀리기 마련이니까요.”
학철은 포장 바나나를 뜯어 리얀과 세이라 앞에 하나씩 놓았다.
“맛이나 보세요. 전 많이 먹어봤어요, 바나나.”
두 사람은 바나나를 먹으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제대로 된 식사에 후식으로 과일까지. 훌륭하구나, 학철. 수고했다.”
리얀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편의점 식사가 꽤 괜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의 질은 형편없었다. 하필 그 시기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안주를 출시했던 연예인 하나는 그 이름이 ‘내용과 질이 형편없다’라는 의미로 지금도 쓰일 정도다.
하지만 어머니 역할을 자주 해서 친근한 이미지의 중견 연기자와 각종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요리연구가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건 도시락을 출시하면서부터 양상은 달라졌다. 값이 싸면서도 질 좋고 맛있는 도시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진짜 괜찮아요? 도시락?”
학철이 리얀과 세이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제만 해도 전쟁터에서 말린 육포를 씹고, 빗물을 받아먹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부드러운 것을 먹는 데 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다. 나는 만족한다.”
리얀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이 음식들, 너무 짜고 너무 매워요.”
하지만 세이라의 평가는 냉정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짜거나, 달거나, 매워야 맛있다고 하거든요. 이 도시락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음식이 다 그래요.”
“음식으로 경쟁을 하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보다 자극적인 것을 찾다 보면 이렇게 더 짜고 더 매워지기 마련이지. 다른 경쟁도 비슷할 것이다. 더 강하게. 더 세게.”
학철은 리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쟁을 통해 더욱 강해지는 것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학철이 한 일은 다 먹은 도시락통을 치우는 동시에 리얀과 세이라에게 물을 떠주는 일이었다.
“학철. 그 사이, 공과금을 내고 오거라.”
“예?”
뜻밖의 말이었다. 물을 마시면서 리얀이 한 말에 학철은 조금 당황했다.
“학자금 이자와 카드 요금, 가스, 전기 요금 말이다. 그런 걸 공과금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렇…지요.”
학철은 리얀이 자신을 챙겨주는 게 좀 어색했다. 분명 리얀은 학철에게 돈을 주겠다고 한 고용주이고, 챙겨주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학철은 고용주가 이렇게 잘 챙겨주는 경험을 별로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색했다.
“그럼 다녀오거라. 그리고 그거.”
리얀이 학철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이거요?”
“그래. 핸드폰은 두고 가거라. 내가 이곳의 정보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인터넷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네가 나간 사이에 홍 대표가 연락을 한다면 내가 달리 받을 방법도 없지 않느냐?”
“그야 그렇지만….”
“이리 와라.”
리얀은 손가락으로 학철을 불렀다. 학철이 다가가자 세이라가 학철의 허리를 강제로 접었고, 리얀은 학철의 목 뒤에 손가락을 댔다.
“징표다. 기억하느냐? ‘내 눈’이라고 말했는데.”
“예. 기억하죠.”
학철은 징표를 지니고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정찰하다가 명치를 맞고 바닥을 굴렀던 기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른 다녀오거라.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겠다.”
리얀이 가보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학철은 머뭇거리다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의 신촌 모텔촌은 한가했다.
‘가만있자. 일단 입금되는 ATM을 찾아야 해. 입금만 되면 다 자동이체 될 테니까.’
학철은 길 건너편에 있는 입금 되는 ATM 위치를 기억한 다음,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진짜로 오늘 8시에 코엑스로 가면 마셰라를 직접 볼 수 있는 걸까?’
학철은 길을 건너기 위해 큰길 쪽으로 걸어가면서 마셰라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마셰라의 직캠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단 한 번도 마셰라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한 번은 홍대 앞에서 게릴라 공연이 있었는데도 게스트하우스 일 때문에 놓치기도 했다.
‘만약 마셰라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인받을까? 아니, 같이 사진 찍어야지. 그런데 납치됐다가 풀려난 사람하고 셀카 찍는 것도 좀 그런데.’
학철이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학철의 앞을 막아섰다. 학철은 자신을 막아선 상대를 보자마자 몸이 굳고 말았다.
“자, 자이스 장군!”
학철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랑 한패 녀석! 내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크크크.”
자이스 장군은 비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학철은 그대로 돌아서서 다시 모텔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징표! 나한테는 징표가 있어!’
“리얀 님! 들리세요! 자이스 장군! 자이스 장군이 여기….”
하지만 학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학철을 따라잡은 자이스 장군이 그대로 학철의 오금을 걷어차서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으아악!”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고 학철은 비명을 질렀다.
“목 뒤에 리얀의 징표로구나. 어이. 리얀.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듣고 있나?”
자이스 장군이 학철의 목을 붙잡고 말했다.
“저, 잡혔어요! 리얀 님! 리얀 님!”
하지만 학철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듣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어떻게, 여기서 바로 죽여줄까? 응?”
“아아아악!”
자이스 장군이 학철의 목을 살짝 틀면서 말했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학철은 그대로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크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학철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자이스 장군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아 뜯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자이스 장군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그런데 이거 사람 피부 같지가 않은데… 뭐지? 비늘인가?’
학철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팔뚝의 촉감이 이질적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래. 이깟 놈 하나를 위해서 나하고 맞서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로군. 그렇지?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크크크.”
자이스 장군은 이렇게 말하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학철의 목을 비비기 시작했다. 처음에 학철은 자이스 장군이 뭔가 끔찍한 짓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움찔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징표는 지웠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어디 한번 해 보자! 내가 널 찾는 게 빠를지, 아니면 내가 이놈을 잡아먹는 게 빠를지! 크하하하핫!”
자이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학철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학철은 발버둥을 쳤지만 자이스 장군의 힘은 세이라와 비교해도 훨씬 더 강했다.
“아니, 저….”
학철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자이스 장군은 그대로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가만히 있어라. 떨어지면 죽을 테니까. 크크크.”
다음 순간, 학철은 자이스 장군의 등 뒤에서 날개가 돋는 것을 보았다. 깃털은 없었다. 영화에서 본, 마치 익룡의 날개와도 같은 날개였다. 그리고 날갯짓을 시작하자, 자이스 장군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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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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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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