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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홍대 가다-29화 (2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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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철야를 한 것이 분명한 알바생이 피곤에 쩐 얼굴로 학철을 맞았다. 학철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있어서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학철이 도시락을 고르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햄버거는 어제 먹어봤으니, 다른 것으로 준비하거라.

‘까다롭기도 하지.’

학철은 짜증이 났지만 이미 받은 돈을 생각하면서 꾹 참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

도시락 세 개를 고른 학철은 계산대 앞에 섰다. 계산대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마셰라.

마셰라는 편의점에서만 파는 포장 바나나 모델이었다. 학철은 마셰라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이국적인 마셰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맛있다고 환하게 웃을 법도 한데, 광고에서도 신비주의 컨셉이었다.

‘그래. 리얀을 따라가다 보면 진짜로 마셰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학철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나나 두 개가 들어있는 봉지도 하나 집어 들었다.

“만 이천 원요.”

알바생이 계산을 마친 후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바생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과 짜증을 보니, 교대시간이 되었는데도 다음 알바가 오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학철은 지금 자신의 표정도 그럴지 모르겠다 싶었다. 난생처음 보는 알바생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계산은 당연히 현금으로 했다. 남은 돈도 세어 보았다. 100만 원 가까운 돈이었다. 학철은 5만 원짜리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돈을 보고 나니 간밤에 리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학자금 이자와 카드 요금, 가스, 전기 요금을 내라는 말이었다.

‘오늘 고생했으니 내가 지급하는 보수라고 생각하거라. 일을 했으면 정당하게 보수를 받아야지.’

리얀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단 밥 먹고 잠깐 짬 내서 은행 다녀오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철은 천천히 걸어 모텔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 학철은 지하철 테마 방의 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아침이라 자칫하다가는 민망한 광경을 보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들어오거라.”

리얀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학철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리얀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조금 전 머리를 감은 모양이었다.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아마도 세이라가 샤워를 하는 것이리라.

“그 위에 놓거라.”

리얀이 턱으로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학철은 비닐봉지에서 도시락 세 개를 꺼내 차례로 내려놓은 뒤, 마지막으로 포장 바나나를 올려놓았다.

“마셰라.”

학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바나나 포장지에 인쇄된 마셰라의 얼굴을 리얀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여기에 일리스 공주 얼굴이 있는 이유가 뭐지?”

리얀이 물었다.

“이게 맛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죠. 유명한 사람 얼굴을 통해서요.”

“그래… 알리기 위해서로군.”

“예, 광고죠. 편의점 바나나 모델. 우리는 그런 식으로 불러요.”

학철이 말했다.

“그럼 일리스 공주는 이 나라에서 유명인인 것이냐?”

리얀이 물었다.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아요. 이 바나나는 특정한 편의점에서만 팔거든요. 진짜 유명한 모델은 소주 모델을 하죠. 아니면 핸드폰 모델이나.”

리얀은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서 보여주면서 말했다.

“널리 팔리는 상품의 모델일수록 유명하다는 말이로구나. 그렇게 되면 유명인은 더욱 유명해지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유명해질 기회를 잃을 터. 돈이 많은 자는 돈을 벌 기회가 더 많고, 돈이 없는 자는 돈을 벌 기회가 적어. 이것 또한 너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따르는구나.”

“…뭐, 그렇다고 해 두죠.”

학철은 굳이 반박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죠, 일리스 공주님, 그러니까 마셰라를 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물론이다.”

“어떻게 구하실 건가요? 여기, 햇살 엔터테인먼트 찾아가서? 아니면 마셰라 일정표를 구해 공연장 찾아가서?”

“둘 다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구나.”

리얀은 마셰라의 사진을 뚫어지게 보면서 고민을 했다. 학철은 리얀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세이라가 나왔다.

“여기는 진짜 궁궐 같네요. 욕조에 뜨거운 물까지 있고 말이죠. 나는 모텔이 정말 좋아요.”

세이라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샤워가운을 걸친 상태로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오해받기 딱 좋은 말이긴 했지만 별로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세이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는 어쩐지 훔쳐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애를 써 리얀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아, 진짜예요. 하루 전만 해도 나무 위에서 망토를 두르고 별을 보면서 잤는데, 간밤에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좋은 이불을 덮고 잤잖아요.”

“간밤에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잔 사람도 있는데요, 뭘 그 정도로.”

학철은 리얀을 보면서 말했지만 리얀은 못 들은 척하며 도시락을 먹었다.

“이것 좀 먹어라.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틈이 났을 때 잘 먹어 두어야지.”

“맞아요. 틈이 나면 먹고, 틈이 나면 자야죠. 전장의 기본 상식이잖아요?”

세이라는 밝게 미소 지으며 학철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더니 침대에 걸터앉아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학철이 한 이야기, 들었느냐?”

리얀이 세이라에게 물었다.

“예. 마셰라. 일리스 공주님. 광고모델. 다 들었어요.”

“…귀가 좋으신가 봐요?”

학철은 샤워할 때 누가 방문을 두드려도 모르곤 하는데, 세이라는 정말로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물었다.

“학철. 세이라는 숙련된 암살자다.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하는 걸 듣고, 보지 못하는 걸 본다.”

“그렇네요.”

학철은 세이라를 흘낏 훔쳐보았다. 탄력 있는 짙은 갈색 피부가 물기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피부를 본 적이 있었던가? 학철은 현실에 존재하는 게 아닌, 다른 차원에나 존재할 법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세이라는 진짜로 다른 세계에서 온 게 맞잖아?’

기묘한 경험이었다. 이국의 여성을 보며 이국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세이라를 볼 때와는 달랐다. 마셰라를 볼 때도 이런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마셰라는 연예인이고 세이라는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물론 세이라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연예인보다 훨씬 더 희귀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하는 쪽이 좋으시겠어요? 햇살 엔터테인먼트로 쳐들어가서 구한다, 혹은 일리스 공주님의 공연 계획을 알아낸 다음 그곳에서 구한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둘 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것 같아요.”

세이라는 도시락 반찬을 우물거리면서 편하게 말했다. 뭔가를 씹으면서 말하는 건 아무래도 보기 흉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세이라는 아름답기만 했다. 학철은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세이라를 보았다. 그러다가 세이라가 학철 쪽으로 눈을 돌리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자신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흑마법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공주를 구하는 일은 흑마법사를 제거한 뒤로 미뤄도 된다.”

“그건 안 돼요!”

학철은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침착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흑마법사가 마셰라 공주를, 그러니까 일리스 공주를 납치한 뒤에 협상을 시도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협상이 결렬되었지만 흑마법사는 공주를 죽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생각을 바꿔보면 흑마법사에게 일리스 공주는 생각보다 훨씬 의미가 있는, 가치가 있는 존재일 수 있단 말이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찾아올 리얀 님을 기다리고 있을 흑마법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과….”

“공주를 미끼로 흑마법사를 꾀어내는 것.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냐는 말이로구나. 그렇지.”

리얀은 학철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정작 학철은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이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역시 학철. 금화 1천 개의 가치가 충분하구나. 군대에서 행정병을 했다고 했지? 내 그러지 않았느냐. 군대 경험을 통해서 쌓은 전략 전술 지식이 도움이 될 거라고.”

‘그냥 마셰라가 보고 싶어서 해 본 소린데.’

물론 이 생각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리얀 님. 제 생각에는 마셰라, 일리스 공주님의 일정을 알아낸 다음에 공연장에서 구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햇살 엔터테인먼트는 아마 요새처럼 방비가 잘 되어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공연장은 외부니까 요새보다는 상대적으로 쉽지 않겠어요?”

세이라가 반찬을 한 조각 집어서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일정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편이 낫겠지. 학철, 일리스 공주의 일정을 구할 수 있겠느냐?”

“예. 저, 마셰라 팬클럽 회원이거든요. 팬클럽 사이트 들어가면 매일 일정 나와 있어요.”

학철은 핸드폰으로 마셰라의 일정을 찾아보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 계획을 홍 대표에게 알려야겠네요.”

세이라가 말했다.

“예, 제가 일정만 찾으면 바로 전화할게요.”

“그럴 필요 없다.”

“저, 제가 전화로….”

“내가 할 수 있다.”

리얀은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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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736300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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