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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은 조금 전 리얀이 전화를 걸었을 때보다 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 정신은 내일 차리고, 오늘은 푹 자거라.
리얀이 보낸 것이 분명한 문자메시지였다. 발신인은 ‘발신자 제한’ 이었다.
“뭐, 뭐야? 이제는 마법으로 도청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학철은 등줄기를 따라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좀 이른 타이밍이었다.
- 놀라지 마라.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데 글자를 못 전하겠느냐?
“노, 놀라지 마라?”
카메라. 학철은 핸드폰에 카메라가 달려 있다는 걸 떠올렸다. 지금 리얀은 도청을 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학철의 핸드폰을 통해서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학철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어서는 그대로 모텔 화장대 서랍에 쳐넣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학철은 마치 거대한 바퀴벌레를 집어 든 기분이었다.
“으아아아아!”
학철은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크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학.철. 방.으.로. 와.라.”
서랍 속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아마도 스피커폰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아주 이제 맘대로, 자유자재로 다 하시네.”
학철은 주먹을 꽉 쥐고 방을 나선 뒤, 조금 전에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던 지하철 테마 방으로 들어갔다.
“거 봐라.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짜네요? 와. 대단해요.”
학철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리얀과 세이라는 신이 나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들어가서 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전화로 사람을 괴롭혀요? 예?”
학철은 성난 목소리로 분노를 표현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해맑게 웃고 있는 리얀과 세이라에게 그 분노가 전달되기는 어려웠다.
“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게요. 리얀 님이 문자로 푹 쉬라고 하셨다면서요.”
“아니, 쉬라고 해 놓고는 전화로 감시하는 게 어디 있어요? 엿듣고, 엿보고, 그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범죄에요, 범죄!”
“범죄라니, 죄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하기에 아주 적절한 말이네요.”
세이라가 농담을 하자 리얀이 껄껄대며 웃었다. 농담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학철은 악당 두목처럼 웃는 리얀의 웃음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얀 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저는요, 지금부터 저쪽 방 가서 잘 거고요. 이제부터 아침까지는 제발 건드리지 마세요. 예?”
학철은 정색을 하고 리얀에게 말했다. 리얀과 세이라의 얼굴에 미안한 감이 떠올랐다.
“학철. 미안하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새로 확인하게 된 능력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시험해 보다 그리 된 것이다. 이해해라.”
“이해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학철.”
학철은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리얀이 학철을 불러 세웠다.
“하나만 묻자. 학자금 대출이 무엇이냐?”
“그건 또 어떻게 알게 된 단어인가요?”
학철은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네 핸드폰에 남아있는 문자를 보았다.”
학철은 뭐라고 화를 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야기해 봐야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빨리 대화를 끝내고 자는 게 이익일 것 같았다.
“제가 학비가 없어서 나라에서 빌렸어요. 그게 학자금 대출이에요.”
“그런데 대출 이자를 받는단 말이냐?”
“나라에서 하는 건 아주 싸게 받아요. 2.5%니까요.”
“이렇게 부유한 국가가 어린 학생을 상대로 사채업을 하는구나.”
“저, 대한민국에서 사채는 이자율이 27.9%에요. 법정 최고 이자율이 그렇다고요.”
“이렇게 높은 건물을 짓고, 이렇게 많은 차가 다니고, 이렇게 많은 경찰을 두고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이자를 받는다니. 물론 그게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니 부유한 국가의 문제는 다들 비슷했다. 국가가 부유하면 부유한 만큼 가난한 자들의 삶은 더 고달파지기 마련이다.”
리얀과 대화를 하다 보면, 무슨 말을 해도 리얀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학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낮은 금리라고 할지라도 이자를 받는다면 학자금을 받는 학생과 받지 않아도 되는 학생 사이의 격차가 더욱 커질 터. 그렇게 되면 결국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게 될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
학철은 이자를 받지 않으면 생기게 될 모럴 해저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저, 무슨 말인지 알겠고요, 들어가서 잘게요.”
“학철. 잘 들어라. 이건 이자를 받고 안 받고, 혹은 이자율을 낮게 책정하고 높게 책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학생이 빚을 지지 않고는 공부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건 심각한 사회문제다. 나는 이곳의 정치가들을 국민이 투표로 뽑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다. 태어날 때부터 오직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왕족과 귀족이 다스리는 사회가 아닌, 모두가 다 똑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그 어떠한 소명의식 없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
“예. 그렇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학철은 진짜로 대화를 마무리할 생각으로 인사를 했다.
“학철. 내일 학자금 이자와 카드 요금, 가스, 전기… 합쳐서 26만 3천 원을 내야 하던데. 맞느냐?”
“…정신감응 마법으로 고지서도 볼 수 있어요? 혹시 제 예금 잔고도 확인했어요? 그런 건 사생활이라고요. 진짜, 자존심 상하게….”
“그 돈으로 내거라.”
리얀이 학철의 말을 끊고 말했다.
“예?”
학철이 리얀이 한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되물었다.
“세이라가 준 현금 말이다. 오늘 고생했으니 내가 지급하는 보수라고 생각하거라. 일을 했으면 정당하게 보수를 받아야지.”
“…고맙습니다.”
학철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훔친 돈이고 나발이고 돈은 다 같은 돈이다.
다만 리얀과 세이라의 손에 죽어 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학자금 대출이고 카드값이고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죽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충전!”
학철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리얀이 소리를 쳤다. 학철은 화들짝 놀랐다.
“충전 잊지 마라. 배터리가 15%밖에 안 남았다.”
“학철! 충전율이 사채 이자율보다 낮으면 곤란하지 않아요?”
리얀과 세이라가 번갈아가며 학철을 놀렸다. 학철은 핸드폰을 들고 배터리를 확인했다. 남은 용량은 리얀이 말한 그대로 15%였다.
“이제 돌아가서 자라. 세이라. 너도 잘 준비하고.”
“예, 리얀 님.”
세이라는 침대 밑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군단장과 암살자는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학철은 더블 사이즈 침대에 혼자 눕는 리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국적인 외모 때문인지 꼭 패션 화보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뭐하느냐? 불 끄고 나가라.”
멍하니 있는데 리얀이 핀잔을 주었다. 학철은 불을 끄고 도망치듯 방에서 나왔다.
감옥 테마 방으로 돌아와 학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충전을 하는 것이었다. 비록 급하게 자취방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핸드폰 충전기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학철은 선을 늘여서 핸드폰을 서랍 안에 넣고 닫아버렸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이 방을 엿보지는 못할 것이다.
침대에 눕고 나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잠시 잊었던 피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런데 잠이 올까 모르겠네.’
학철은 전에도 낯선 곳에서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여자 친구와 모텔에서 밤을 함께 보낸 적도 있긴 했지만 그때도 푹 잠들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하물며 이렇게 감옥 테마의 모텔방에서, 리얀이 언제 부를지도 모르는 상황에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서랍 안에 넣어두어서 그런지 소리는 더 크게 울렸다. 학철은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 이유 없이 리얀이 자신을 부른 것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째다. 사람의 인내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이게 뭡니까!”
학철은 서랍을 열자마자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침.이.다.”
스피커폰으로 바뀐 핸드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침?”
학철은 핸드폰을 보았다. 오전 9시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가리고 있는 쇠창살 문양이 그려진 커튼을 열었다. 환한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식.사.준.비.해.라.”
“아니, 무슨 마법 썼어요? 어떻게, 눈을 좀 감았다 싶었는데 아침이네.”
“식.사.준.비.를.하.라.고.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 개운하기는 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잔 모양이었다. 배도 고팠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모텔 앞에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편의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편의점 수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맥도날드 숫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학철은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은이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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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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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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