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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철. 이 시간에 누구 찾아올 사람이 있느냐?”
리얀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없…는데요?”
학철이 답하자 리얀은 세이라에게 눈짓을 보냈고, 세이라는 소리 없이 문 옆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학철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저 옆집인데요, 낮에 택배가 왔었거든요?”
문밖에서 여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택배요?”
학철은 문으로 향하면서 리얀의 눈치를 살폈다. 리얀은 손으로 그냥 열어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파바박! 퍽! 쿵!
다음 일어난 일은 거의 순식간이었다. 학철은 그저 문만 열었을 뿐인데 문 앞, 바닥에는 두 사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여자 하나가 세이라에게 목을 잡힌 상태로 제압당했다.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 한 번 치지도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빨라서 학철은 알지 못했지만 세이라는 학철이 문을 열자마자 학철의 머리를 넘어서 뒤에 서 있는 사내 하나의 머리통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다른 사내의 머리를 발로 가격했다. 그다음 바닥에 착지하면서 문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목을 팔로 조른 것이다. 이 세 동작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평범한 인간인 학철 눈에는 그저 뭔가가 번쩍, 한 것 정도만 보였을 뿐이었다.
“누가 보냈지?”
세이라가 여자에게 물었다.
“좆까, 씨발.”
여자가 답했다.
“누가 보냈는지 알겠구나.”
리얀이 여자의 대답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학철도 이미 몇 번 들어본 욕설이었다.
“좆까라고 욕하는 거, 교육받은 걸까요, 아니면 마법일까요?”
학철이 리얀에게 물었다.
“침묵의 서약일 것이다. 불리한 말을 하게 될 상황이 되면 저절로 욕설을 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서약은 마법이라기보다는 서로 간의 약속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생식기와 관련된 욕설은 ‘개’와 관련된 욕설만큼이나 전 문화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욕설이다.”
리얀은 학철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어떻게 할까요?”
리얀은 학철을 흘깃 보았다.
“죽였으면 좋겠지만 이것들을 죽이면 이곳 경찰이 학철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그냥 재워라.”
리얀이 명령하자 세이라는 팔에 힘을 주어 여자의 경동맥을 막았다. 여자의 의식은 곧 끊어졌다.
“이 세 사람 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잠들어 있을 거 같네요.”
“우선 셋 다 안으로 옮겨라. 그리고 셋에게 독을 주입해서 오늘 밤, 아니 내일까지 완전히 잠들어있도록 조치해라. 무장은 완전히 해제하고. 그리고 우리는 여기를 떠나야 한다.”
리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이라는 세 사람을 집어 들어서는 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의식을 잃은 사내 둘과 여자 하나가 마치 공깃돌처럼 힘없이 학철 방 매트리스 위에 떨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놈들이 이곳을 알아낸 거지…?”
세이라가 세 사람에게 독침을 주사하는 사이, 리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기요, 리얀 님. 리얀 님은 아까 정신감응 마법으로 컴퓨터 내용을 알 수 있었잖아요.”
학철이 말했다.
“그랬지.”
“만약 그랬다면 흑마법사는 더 강력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음….”
학철의 말을 들은 리얀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세이라가 권총 두 정과 지갑 세 개를 들고 리얀을 보며 물었다.
“알아서 해라. 학철. 이 컴퓨터는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느냐?”
리얀은 세이라의 질문은 대충 넘기고 학철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죠.”
“그렇다면… 이 컴퓨터는 전 세계의 컴퓨터와 이어져 있다는 소리냐?”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우리는 흑마법사와 관련되었다고 믿을만한 정보를 컴퓨터를 사용해서 찾아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정신감응 마법으로 컴퓨터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 낮은 수준의 정신감응 마법으로 컴퓨터를 읽을 수 있다면, 흑마법사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정보를 찾는 자들을 추적하는 일.”
리얀의 말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햇살 용역 등기부 등본 찾아보는 걸….”
“그래. 흑마법사는 그걸 이용해서 우리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자들은 이 근방을 순찰하다가 흑마법사의 지시를 받아 여기로 온 것일 테고.”
“그렇다면….”
“학철. 이동해야 한다. 안전한 곳으로.”
“안전한 곳….”
학철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이번에도 답은 바로 나왔다.
“학철. 흑마법사가 결코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흑마법사는 적이지만 존경할 만큼 강력한 존재다. 작은 틈 하나만 있어도 그 틈을 이용해 군단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이 흑마법사에게는 있다.”
“빨리 출발해야 해요, 학철. 어쩌면 이놈들의 동료가 벌써 이곳을 향해 출발했을지도 모른다고요.”
리얀과 세이라의 다급한 음성을 들으니 학철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결국 나올 답은 하나였다.
“모텔 가죠.”
학철은 이렇게 말했다.
“모텔?”
“그러니까… 숙박업소요. 저하고 아무 관계도 없고, 익명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이에요.”
“좋다. 학철. 지도에 좌표를 찍어라.”
학철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신촌의 모텔촌을 떠올렸다. 연인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신촌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부르기도 하는 신촌역 3번 출구 부근. 그 부근만 가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홍미해.
헤어진 여자 친구다.
여자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냉정하게 카톡 한 줄로 결별을 선언했던 일도 떠올랐다.
“일단 이쪽으로 가면 모텔이 모여 있어요. 가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죠.”
학철이 세이라에게 지도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알았어요.”
세이라는 지도에서 좌표를 확인한 뒤, 학철을 둘러메고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아예 지붕에서 지붕으로만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리얀도 그 뒤를 따랐다.
연희동의 상공에서 바라본 신촌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학철은 이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대신 야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학철은 뒤따라오는 리얀을 돌아보았다. 리얀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세이라가 도약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포물선을 그리며 이동한다면, 리얀은 건물 옥상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날고 있었다.
‘밤이니까 다행이지 낮이었으면 사람들이 보고 막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난리도 아니었을지 몰라.’
학철은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중으로 이동하는 편이 CCTV에는 덜 찍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차도 두 개를 건너서,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세이라는 사람들 이목을 생각해서인지 건물 옥상에 먼저 내린 다음,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으로 내려갔다. 리얀은 세이라가 택한 지점으로 천천히 착륙하듯 내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신촌에도 사람이 많았다. 홍대만큼은 아니어도 외국인도 드물지 않게 보였다. 학철은 남자 하나, 외국인 여성 둘이 있는 일행이 그리 눈에 뜨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리얀이 행인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언제나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곳이 얼마나 부유한 곳인지, 얼마나 강대한 곳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학철. 너는 네가 얼마나 강대하고 부유한 곳에 사는지 알고 있느냐?”
“저는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자랐거든요. 잘 몰라요. 그리고 우리나라보다 더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 많아요.”
“그래. 그렇겠지.”
리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철은 뭐라 말을 덧붙이려다가 관두고 그냥 자신이 아는 모텔촌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모텔촌까지 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을 잡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학철이 애용했던 곳은 이미 빈방이 없는 상태였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몇 군데를 돌고 나서야 간신히 빈방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테마 모텔이었다. 새로 생긴 곳이어서 아직 홍보가 덜 된 탓에 빈방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여자 두 사람 있는 셋이면 방 두 개 잡아야 해요. 아시죠?”
모텔 카운터에서 학철이 들은 소리였다.
여자 두 사람과 모텔에 온 적이 없으니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사기를 치는 건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빨리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쓸데없는 마찰을 빚어서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학철은 방 두 개를 잡았다. 방 하나에 7만 원. 보통 모텔보다 비쌌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행히도 세이라가 학철에게 현금을 내밀었다. 언뜻 봐서 100만 원 정도 될 것 같은 1만 원짜리와 5만 원짜리 뭉치였다.
“알아서 하라고 하셔서 챙겼어요.”
세이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학철은 돈을 받아 지갑에 넣은 뒤, 14만 원을 모텔비로 지불했다.
“지하철하고 감옥, 어디가 더 좋아요?”
학철이 리얀과 세이라에게 카운터에서 받은 모텔 열쇠 두 개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상관없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
리얀이 제안했다. 학철은 지하철 테마 방을 열었다. 학철 역시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지만 감옥 테마 방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찜찜했다.
“방이 두 개니 세이라는 옆방을 쓰거라. 나는 몸종을 데리고 자겠다.”
지하철 테마로 꾸며진 방에 들어서자마자 리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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