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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아마 배신자를 찾는 조사가 시작된 걸 알고 자신의 죽음을 조작했던 것 같구나. 흑마법사가 그때 이미 이쪽 세계로 빼돌렸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흑마법사는 적어도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준비를 했다고 봐야 하겠네요.”
학철은 대화 내용을 들으며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리얀이 노리고 있는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요, 리얀 님. 세이라 님.”
학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 말해 보거라.
“리얀 님은 여기 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서 여기에 거점도 마련하고, 또 사람들도 모았잖아요. 아까 세이라 님도 그 점에 감탄했고요.”
“그래서요?”
세이라가 말을 재촉했다.
“그렇다면 그 흑마법사는 3년이나 이곳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 도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학철은 자신에게 떠오른 의문을 리얀과 세이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마 이곳이 평범한 국가였다면 국왕이 되었을 거예요. 흑마법사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봐요.”
세이라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 나도 공감한다. 다만 이곳은 우리가 지금껏 보아 온 나라보다 월등히 크고 부유하다. 거기다가 인구도 많고… 지금 주어진 정보만으로 흑마법사가 어느 정도 준비를 했는지, 이곳을 어느 정도 장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져가면서 싸웠나요? 싸우다 보면 이기는 거죠. 안 그래요?”
세이라는 예의 그 명랑한 목소리로 밝게 말했다.
- 그래. 세이라의 말이 옳다.
“그럼 일단 자이스 장군부터 상대해야겠네요. 싸우다 보면 답이 나올 거예요.”
- 알겠다. 학철! 눈을 뜨거라.
학철은 눈을 떴다. 더 이상 겹쳐 보이는 건 없었다. 시야를 공유하는 걸 중지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정찰해 봐야 녀석들을 전부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생각보다 범위가 너무 넓고, 사람도 너무 많아요. 하지만 자이스 장군 한 사람이라면 추적해서 잡을 수 있어요.”
세이라가 설명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추적해서 잡을 거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요?”
“아니, 지금도 그, 자이스 장군이란 사람은 움직이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야죠. 자! 얼른 가요!”
세이라는 학철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바로 어깨에 둘러멨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내려가는 건 그냥 엘리베이터 타고….”
역시나 세이라는 학철의 말은 무시하고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학철은 그냥 포기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세이라는 그대로 난간을 향해 달려갔다. 얼핏 보면 투신자살을 하려는 사람 같았다. 다음 순간 세이라는 벽을 타고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이라는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뛰었다. 학철은 엄청난 속도감과 지면을 내려다보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눈을 꽉 감았다.
“으….”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니 절로 사지가 꼬였다. 학철은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내려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건물을 본 것 같긴 했지만 다들 별일 아니란 듯이 제 갈 길을 갔다. 설마 사람이 뛰어서 내려왔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세이라는 학철을 내려놓았다.
“어휴, 정말 빠르네요.”
학철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며 어깨를 푸는 시늉을 했다.
“지금부터는 좀 더 빠를 거예요. 움직이는 자이스 장군을 추적해야 하니까.”
“엑?”
학철은 세이라의 말에 놀라서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이라의 손에 이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딛기도 전에 학철은 세이라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학철도 나름대로 달리기 좀 한다는 편이었지만 세이라의 속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휴, 학철! 정말 너무 느리네요! 아니지. 이곳 사람들 평균보다는 좀 높은가? 모르겠네.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세이라는 학철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잠깐만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세이라는 이렇게 말하곤 그대로 힘을 주어 학철을 어깨에 둘러멨다. 지나던 행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세이라와 학철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핸드폰을 들어 그 광경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오늘 유튜브에 홍대 ‘짐짝남’ 되겠어요!”
물론 세이라는 학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혹시 들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겠지 싶기는 했다.
세이라가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건물이! 건물이 스쳐 지나가고 있어!’
학철은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환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다 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린 경험은 예전에 오토바이를 탔을 때뿐이었다.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세이라는 그 많은 행인 중 누구와도 충돌하지 않고 달렸다. 가끔은 벽을 타고 달리기도 했고, 낮은 장애물은 그대로 뛰어넘었다.
차도에 도착했을 때, 학철은 횡단보도 신호등이 붉은색인 것을 보았다.
“잠깐만요! 빨간불! 빨간불!”
세이라가 빨간불의 의미를 아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학철은 이렇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세이라는 무정하게도 그대로 차도에 뛰어들었다.
“으아아악!”
참고 참았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이라는 비명을 듣기나 한 것인지 승용차 한 대를 뛰어넘고 트럭의 정면을 밟은 뒤,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택시의 차체를 밟고 끝으로 배달 오토바이의 배달통을 딛고는 결국 반대편 길에 도착했다.
“소리 좀 지르지 마요!”
세이라는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사람들 사이를 뛰기 시작했다.
“아냐, 괜찮아, 괜찮아. 나는 보호마법을 둘렀어. 다치지 않을 거야. 안 다칠 거야. 그리고 100억을 받을 거야….”
학철은 두 눈을 꼭 감고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세이라는 건물 하나를 뛰어넘은 다음에서야 멈춰 섰다. 엄청난 속도감이 사라지자 학철은 순간적으로 어지럼과 울렁증이 동시에 찾아오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학철은, 세이라가 학철을 내려주었을 때 꼴사납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요, 학철.”
세이라는 강제로 학철을 일으킨 다음 팔짱을 꼈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세이라와 학철은 처음 출발했을 때처럼 다정한 연인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학철. 표정 좀 펴요. 사형장 끌려가는 죄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위장이 안 된다고요.”
세이라가 말했다. 학철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서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원래 겁이 그렇게 많아요? 마법사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님이 직접 보호마법을 걸어줬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세이라가 장난치듯 학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아, 그렇죠. 보호마법….”
“자, 이제 정신 차려요.”
세이라가 눈짓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비록 학철은 누군가를 미행하는 법을 훈련받은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 두 개 정도는 높게 솟아오른 대머리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목표에요. 아까 위에서 봤죠?”
“예, 보이네요.”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전투의 기본, 알죠?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그 말은 이렇게 미행하다가 적당한 곳에서 공격하겠다는 거죠?”
“맞아요. 학철은 내가 이곳 문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면 돼요.”
“그러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전 좀 피해있어도 되지요?”
학철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피해있어야지요. 전투에 휘말려 들었다가는 죽어요, 죽어.”
세이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명랑해서 학철은 세이라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경고하는 건지도 구분하기가 힘이 들었다.
달리다 보니 도착한 곳은 홍대를 벗어난 신촌의 주택가였다. 거리를 걷는 행인의 수는 줄어들었고, 자이스 장군은 주택이 밀집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쉿.”
세이라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학철은 고개를 끄덕했다. 특별히 할 말도 없었다.
자이스 장군이 골목으로 돌아들어 가자 세이라는 손에 뭔가를 쥐고는 학철에게 대기하고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학철은 알겠다는 뜻으로 역시 고개를 끄덕인 뒤, 골목 벽에 붙었다.
세이라가 자이스 장군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학철은 아주 조심스럽게 세이라가 들어간 골목길 안쪽을 고개만 내밀어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쥐새끼가 하나 따라붙었다 했더니, 오늘 내 부하들 여럿 보내버린 분이시로군.”
자이스 장군은 세이라를 정면으로 보고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자이스 장군님. 오래간만에 뵙네요. 그런데 3년 전 대평원 전투에서 전사하시지 않으셨어요? 흑마법사하고 내통한다는 소문만 남겨두고 말이죠.”
“자이스 장군은 그날 죽었지. 나는 여기서 햇살용역 현장 팀 팀장, 제임스로 다시 태어났고.”
자이스 장군이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현장 팀 팀장 제임스는 여기서 죽는 거예요.”
“크하하핫! 내가 그렇게 순순히 죽어줄 것 같으냐?”
자이스 장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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