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홍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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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용사들이 세계를 구했다. 흑마법사가 12대륙 8대양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지 17년 만이었다.
최후의 전장.
흑마법사를 호위하는 최후의 병력이 용사들 앞에 섰다.
“돌격!”
적진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마침내 남아 있던 모든 흑마법사의 부대가 마지막 돌진을 시작했다.
돌진하는 병력의 맞은편에는 키가 큰 여자 마법사가 홀로 서 있었다. 핏빛 붉은 머리가 바람결에 일렁이는 것이 멀리서도 눈에 뜨였다. 이 여자가 바로 전투마법사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 리얀이었다.
“의미 없는 저항이다.”
리얀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콰콰쾅!
땅이 울리고 하늘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리얀의 마법이 작렬했다.
흑마법사의 부대 위로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거대한 폭음이 땅을 울렸다. 그리고 리얀이 마법을 쓴 후에 늘 그랬듯, 부서지고 찢어진 피와 살점이 폭발의 후폭풍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이것이 리얀의 별명이다. 그리고 지금 사방에 흩날리는 피와 살점이 리얀의 별명이 그저 머리색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군단장 리얀. 그대의 마법이 흑마법사의 최후를 장식하는구나.”
용사들을 이끌어온 총사령관이 리얀에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리얀은 담담하게 말했다.
최후의 병력이 사라지자 이제 남은 건 흑마법사를 향해 진군하는 일뿐이었다.
사방에서 용사들의 병력이 홀로 남은 흑마법사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들어라, 흑마법사여!”
목소리가 닿을 거리에 도달했을 때 즈음, 총사령관이 흑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흑마법사여!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최대한 고통 없이 단칼에 목을 베는 자비를 베풀 것을 약속하노라.”
“사령관! 그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마법사는 기필코 살아남는 법. 그걸 모른단 말인가?”
흑마법사는 자신의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동원하여 마법을 시전했다.
번쩍!
강렬한 빛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며 차원이동문이 허공에 열렸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흑마법사는 이렇게 외치고는 차원이동문을 통과해 사라져버렸다. 17년간 이어진 싸움의 종지부였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흑마법사가 통과한 차원이동문을 바라보면서 대마법사가 선언했다. 하지만 전투마법사 군단 군단장인 리얀의 견해는 달랐다.
“아닙니다! 흑마법사의 목을 베기 전까지, 이 싸움은 끝난 게 아닙니다!”
리얀은 목청껏 소리쳤다.
“전쟁은 끝났네!”
“아닙니다, 사령관님!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흑마법사는 다른 차원으로 도망치지 않았는가? 이제 흑마법사가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네.”
“애초에 흑마법사가 12대륙을 위협할 가능성도 희박했습니다.”
리얀은 단호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제가 흑마법사를 끝까지 추적해 숨통을 끊겠습니다.”
“추적을 한다고 가정해 보세. 돌아올 차원이동문은 어떻게 열려고 하는가?”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흑마법사의 숨통만 끊어 놓을 수 있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리얀의 뒤를 따르겠다는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흑마법사에게 가족을 잃거나 동료를 잃은, 복수심에 불타는 용사들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 차원문이 사라지기 전에….”
리얀은 흑마법사가 만든 차원문을 향해서 달려갔다.
“안 돼! 잠깐!”
리얀은 총사령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흑마법사가 만든 차원이동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뒤를 용사들이 따랐다. 하지만 차원이동문은 곧 닫혀버렸고, 리얀의 뒤를 따른 용사는 몇 되지 않았다.
총사령관은 리얀과 몇몇 용사들이 사라져버린 허공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리얀… 이 어리석은…!”
***
‘지루하다. 정말 지루해.’
홍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오학철은 카운터에 앉아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밖은 축제였다. 홍대는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학철은 축제의 한 복판에서 언제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학철도 나가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둘 있지. 하나는 돈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덕분에 학철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 진짜! 지루해!”
학철은 이렇게 고함을 치면서 자신을 차버리고 간 여자친구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텅 비어 있었다. 손님들은 모두 외출 중이었고, 사장은 오늘 늦게 돌아온다고 했다.
“뭐 재미있는 일 좀 안 생기나….”
학철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로비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탕! 탕탕! 쾅!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하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자동차 펑크 나는 소리, 혹은 뭔가가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사장이 있었다면 나가보라고 했겠지만 학철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휘청거리면서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큰 외국인이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로브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차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브를 적시고 있는 선명한 핏자국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 저기, 피!”
학철은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낯선 방문객은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새하얀 얼굴의 여자였다.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외국인이었다. 아마 북유럽, 아니면 동유럽 쪽일 것 같았다.
그리고 로브를 적시고 있는 핏자국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학철은 전에도 붉게 염색한 머리를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붉은빛은 아니었다.
“저기, 저기요? 괜찮으세요?”
“괜찮다. 잠깐 쉬었다 가겠다.”
붉은 머리 여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로비에 놓여 있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상당히 유창한 한국어였다.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학철은 황급히 달려갔다.
“피, 많이 흘리시는데요. 저기….”
“잠깐이면 된다.”
발음은 유창했지만 말투는 이상했다. 꼭 무슨 사극을 보면서 한국어를 배운 게 아닐까 싶은 어투였다.
“저기….”
학철이 뭔가 더 물어보려는 순간, 여자가 입고 있던 후드를 그대로 벗었다. 후드 아래 입고 있는 것은 옷이 아니라 흰 천이었다. 처음에 학철은 특이한 디자인의 브라와 팬티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분명 속옷이 아닌 그냥 흰색 천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배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뭔가에 찔렸는지 배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서 검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심했다. 다른 세계로 왔으니 당연히 다른 무기를 사용할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여자는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상처 부위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학철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여자의 상처부위에서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게다가 튀어나온 물건은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는데, 빨간 머리의 여자는 그것을 물끄러미 무표정한 얼굴로 살펴보았다.
‘저, 저게 뭐지? 초, 총알인가? 그럼 좀 전에 그 타이어 펑크 나는 소리, 그게 총소리였던 거야? 총성? 서울 시내 한복판, 홍대에서 총격전?’
학철은 이런 생각을 하며 뭘 어째야 좋을지 알지 못해 당황했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허공에 떠 있는 시커먼 금속물체를 손을 뻗어 잡고는, 이어서 자신의 배에 뚫린 구멍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피가 흘러나오고 있던 구멍에서 살이 돋아나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막혔다.
“어, 어라?”
학철은 눈앞에서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나 묻겠다. 이곳은 지금 축제가 열리고 있느냐?”
여자가 학철에게 물었다.
“추, 축제요? 음. 축제는 아닌데, 밤이면 보통 축제 비슷한 상태가 되죠.”
학철은 빨간 머리 여자가 던진 예상 밖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매일 이렇게 저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닌단 말이냐?”
“예, 그렇죠. 그런데 초면에 왜 반말을….”
학철의 이 기본적인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섰기 때문이다.
“잡았다! 피바람을 부르는 마녀!”
덩치가 커다란 사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손에 영화에서나 보던 물건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권총이었다.
지은이 : 김상현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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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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