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브레이커 로펌 [완결]
빠바바밤- 빠바바밤-
“와- 신부가 너무 예쁘다.”
“예쁘지?”
“신랑하고 열두 살 차이 난대.”
“진짜? 몰랐어!”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혜린은 목에 주름 하나 없이 고왔다.
그녀가 무대 위를 지나갈 때 그녀의 미모에 하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저런 분하고 왜 이혼했어요?”
아리가 묻자, 서지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됐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자기가 물어놓고는 아리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듣고 싶지 않다는 뜻.
신부의 미모에 감탄해 순간 그냥 나온 말이다.
서지우는 그제야 무대 위 여혜린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곳의 있는 하객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번이 그녀의 첫 번째 결혼식이다.
그와 혼인을 하고 살았지만, 결혼식다운 결혼식을 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미있는 인연.
10년여 전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뜨거운 사랑을 했다.
그리고는 헤어졌다.
서로를 죽을 만큼 미워했다.
그리고 또 이제는 서로의 사랑을 축복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
「“나 임신했어.”
“아···.”
“왜? 애 갖기는 너무 늙어서?”
“아니. 배부른 여혜린이 상상이 잘 안 돼서. 축하해.”
“진심?”
“진심이야.”
“···나 사실···이걸 지금 고백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나 사실 유산이었어.”
“···.”
“사실 이 말 하려고 만나자고 했어. 평생 말 안 하고 살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말해야 할 것 같아서·········미안해.”
이제 와서 하는 고백에 대한 미안함.
새 생명이 태어나기 전 십여 년 지고 있던 짐을 덜고 싶은 심정.
하지만 사과할 필요 없었다.
“···혹시 알고 있었어?”
“응.”
“!!!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그런 결정을 나한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했을 것 같지 않아서. 알아봤어.”
“언제?”
“너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찾는 데 시간이 걸렸어. 네가 하도 꼭꼭 숨겨서.”
“그런데 왜 그때···?”
“알았을 땐 이미 늦었어. 사과도. 오해를 풀기에도.”
“······.”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그날 뉴욕행 비행기처럼.
“지난 일은 잊어버려.”
“···잊어버려도 괜찮은 걸까?”
“응.”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능력이 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슬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행복해라.”
“뭐야. 결혼식장에 안 올 것처럼.”
“내가 거기에 가서 뭐 해.”
“서지우.”
“왜?”
“꼭 와줘. 네가 축복해줘. 그랬으면 좋겠어.”
그때 깨달았다.
그건 그녀에게도 슬픈 순간이었다는 걸.」
*
“근데, 첫 번째 결혼은 그렇다고 치고 두 번째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두 번째? 알···.”
‘알고 있잖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제는 기억에서 삭제된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그녀는 ‘세 번째’ 결혼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아니면 괜히 떠보는 거야?”
“진짜 궁금해서.”
대답하기 전 지우는 아리의 표정을 살폈다.
“저기 앉아 계신 분의 따님.”
“저기? 저 테이블?”
“응. 저 테이블, 머리 희끗희끗하신 분.”
“희끗희끗하신 분이면···! 윤의섭 장관님? 지금 법무부 장관 딸이랑 결혼했다는 거예요?!”
“목소리 좀 낮춰. 듣겠네.”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좀 전까지는 호기심 반, 질투 반이었다면, 지금은 호기심 백 퍼센트다.
“그때는 대전지검 차장검사셨어.”
“아무리 그래도. 혼인 신고만 한 거였다면서요? 어떻게 하면 까마득한 선배의 딸과 그렇게 엮일 수가 있어요?”
아닌가? 질투 백 퍼센트인가?
---*---
“소연 씨가 선배님을 엄청나게 따라다녔지.”
“진짜?”
“응.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어.”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윤정도와 도정인도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제멋대로 혼인 신고를 해버렸어.”
“뭐?!”
“목소리 좀 낮춰. 다 보잖아.”
“그래서,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난리가 났지. 이제 막 대학교 들어간 여자애가 남자한테 미쳐서 사기로 혼인 신고를 해버렸는데. 선배님 그 일 때문에 김앤강 나오신 거야.”
“왜? 변호사님 잘못이 아니잖아.”
“그렇지. 근데 뭐 잘못이 아니라고 눈엣가시가 아닌 건 아니지. 그 시절에도 장관님이 검찰에서 잘나가는 분이셨어. 그런 분 딸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 정치적인 조직에서 맘에 들어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소연 씨뿐만이 아니었어. 몰래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어쩌면 나오시는 게 맞았어.”
“와- 서 변호사님 도화살 지대로네. 옴므 파탈이었네. 하긴 저 정도 인물이면 뭐···.”
“인물이면 뭐?”
“지금 질투하는 거야?”
“누가? 내가?”
“질투도 급이 비슷한 사람한테 해야지 귀엽지. 무슨 상대도 안 되는···.”
“야! 도정인!”
“근데, 그렇게 멋대로 혼인 신고한 거면 취소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러려면 법원에 혼인 신고 무효 소송을 해야 하는데, 사유로 혼인 신고가 사기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 그녀는 미국 아이비 로스쿨을 목표로 김앤강에서 (아버지 백으로) 인턴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사기 기록이 남는다면 로스쿨 진학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나중에 미국 변호사 바 어드미션 인터뷰 때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뭐야? 그래서? 무효 소송을 한 게 아니고 그냥 이혼을 한 거라고?”
“응.”
“지우 오라버니는 그걸 동의했고?”
“지우 오라버니?”
“서 변호사님이 왜?”
“나도 모르지. 이미 한번 다녀온 몸, 그냥 구제해 준 게 아닐까?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심리상태를. 근데, 갑자기 지우 오라버니는 뭐야?”
“와- 그렇다고 그걸 무효가 아니라, 이혼 처리한다고? 그리고, 그 아버지도 대단하시네. 커리어 때문에 딸을 이혼녀로 만드셨다고? 그 나이에? 어렸을 거 아니야?”
“자신 있으셨겠지.”
“뭐가?”
“그때도 차차기 검찰총장이라는 말이 나돌았으니까. 그런 과거쯤이야, 문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그런 황당한 일 때문에 당신 딸이 별 볼 일 없는 로스쿨에 들어가는 건 못 참으셨나 보지.”
“아- 그렇게 들으니 또 그렇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이비 로스쿨 갔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들어갔대.”
“헉. 엄청 똑똑했나 보네. 그런 애가 왜 그렇게 또라이 짓을 했대?”
“모르지. 아무튼 선배님 주위에 이상한 여자들 많았어. 따로 보면 정말 멀쩡한데, 선배님만 보면 머리가 회까닥. 저기 여 회장님도 그런 분 중의 하나였지.”
“아- 하긴. 그럴 만하지. 우리 지우 오라버니가.”
“그럴 만하지? 잠깐. 아까부터 그 추임새 너무 마음에 안 드는데. 왜 선배님이 자기 오라버니야?”
“내 친구의 남자친구니까.”
“그럼 서지우 씨지. 왜 오라버니가 되지?”
“나이가 많으니까.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
“아니. 그건 더 존심 상해. 그냥 서지우 대표님이라고 불러.”
“에이- 그건 아니다. 누가 절친 남자친구를 대표님이라고 부르냐.”
“그럼······그냥 ‘그분’?”
“뭐래.”
---*---
“그렇다고 그걸 이혼 처리하는 데에 동의한다고요?”
“어차피 그때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지금도 그렇고. 의미 없는 기록일 뿐이니까.”
“의미 없는 기록?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정을 다 들은 아리는 입을 빼죽 내밀었다.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누구랑 결혼할 마음 없었으니까.”
“흥. 그럼 나랑은 왜 만나요?”
삐죽 내민 입술이 작고 귀여운 콧날을 넘어갈 듯 더 나온다.
“그러게 왜 이제 나타나?”
“뭐래. 3년 전에 나타났을 때는 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보고 있어도 불가사의하다.
어떻게 여자인 걸 몰랐지?
사람의 인연이랑 참 오묘하다.
3년 전에는 대표와 신입으로 만났다.
그리고 지금은 연인이 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빰 빰 빠바- 빰 빰 빠바-
빰 빰빠밤 빰바 바바바 바바바바-
“근데 변호사님 첫 번째 아내 정말 예쁘시네요. 질투 날 정도로.”
서지우는 테이블 아래에서 아리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더 예쁘다는 의미였다.
---*---
띠리링- 띠리링-
“작가님!”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이제 아예 연락을 안 할 셈이야? 우리가 같이 보낸 세월이 얼마고, 사연이 몇 갠데. 이 노인네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체크는 해줘야 하는 게 도리 아니야?
“아이- 참 저는 집필하시는 데에 방해되지 말라고···.”
-핑계는.
“헤헤- 죄송해요. 조금 바빴어요.”
-로스쿨 들어갔다며?
“네.”
-내려와야, 축하를 해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말에 내려가겠습니다!”
-내려와!
“네, 그러겠습니다.”
-알지?
“아이, 그럼요. 세 짝? 네 짝?”
-네 짝! 네 짝은 돼야 간에 기별이 가. 알지? 나 저번 달에 건강검진 받은 거. 쌩쌩하대. 의사가 간이 삼십 대보다 더 좋대.”
“축하드립니다. 그럼 다섯 짝?”
-오바는···. 예끼, 이놈아.
“그럼, 그날 봬요.”
*
며칠 뒤, 아리는 예정대로 중기를 찾았다.
“자, 그럼, 오랜만에 고삐 풀어볼까요, 할아버니?”
“잠깐. 술 먹기 전에. 이것부터.”
“이게 뭐예요? 아! 작품 다 쓰셨어요?”
“아니. 그건 아직 막혀있고. 하도 글이 안 나와서 다른 걸 끄적거리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 쓰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어.”
“영화? 드라마?”
“아니. 이건 그냥 책으로 내려고.”
“아, 정말요? 소설 안 쓰신지 진짜 오래되셨잖아요.”
“오랜만에 쓰면서 참 재미있었어.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펜 가는 대로. 처음에는 영화 시나리오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썼는데, 다 쓰고 보니 아무래도 책이 나은 것 같아.”
이중기는 두툼한 원고지 뭉치를 아리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정중하게 원고를 받아든 아리는 맨 앞장에 쓰인 제목을 읽었다.
“하트브레이커 로펌? 로펌 이야기에요?”
“응.”
원고를 건넨 이중기만큼이나 받아든 아리의 손도 떨렸다.
묘한 기분이다.
안에 담긴 내용이 뭔지도 모르는데, 가슴이 떨린다.
쿵쾅쿵쾅.
아리는 첫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대표님, 큰일 났어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삼십 대 여배우 중 한 명이자 케이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스타인 윤시연이 사고를 쳤다.
“왜?”
“시연 씨가 어젯밤에 술 먹고 홧김에 머리카락을 잘랐대요.”
“뭐! 이 미친···. 얼마나?”
“완전 쇼트커트를 한 모양이에요.”
“아- 씨발.”
데뷔 때부터 찰랑거리는 천연갈색 긴 생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녀. 케이 엔터테인먼트 남혁 대표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타도 인간이니까. 홧김에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특히나, 몰래 사귀고 있던 남자 동료 배우가 자기와 사이가 제일 안 좋은 여자 후배랑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 그런 거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공감할 수 있다고.
물론이다. 자기가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인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자르고 싶으면 자르는 거지.
하지만!
“하아- 로레알이랑 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건 머리카락이 온전히 자기 것일 때 해당하는 말이다. 세계 최대 화장품회사와 30억짜리 샴푸 모델 계약을 체결하고 이제 막 광고를 해대기 시작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어쩌죠, 대표님?”
“미치겠다, 진짜. 위약금이 얼마야? 계약서는 봤어?”
“세 배···요.”
“세 배? 그럼, 뭐야? 90억!”
“네.”
“하아아—.”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남혁의 입에서 나왔다.
“일단 스케줄 다 취소했고.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기는 했는데, 오 원장님 보내서 붙임머리라도 해볼까요?”
“그걸로 해결이 되겠니? 이 바닥이 어느 바닥인데. 오 원장을 집으로 부르는 순간 소문이 나지.”
“그럼 어떻게···?”
한참을 고민한 남혁은 결정을 내렸다.
“후우— 안 되겠다. 지 변호사한테 연락해.”
“지서우 변호사님이요?”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어? 비싸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야지. 자그마치 90억이 걸린 문제인데.”
“네, 알겠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네, 법무법인 솔루션 지서우 변호사 사무실입니다.”
······.」
“할아버니, 설마 이거······.”
“맞아. 서지우, 그놈 이야기야. 그리고···.”
김아리, 그녀의 이야기.
「하트브레이커 로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