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33)

거머리 (3)

민증 나오고부터 한 일이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사람들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안 갚을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숨고, 저리 숨은 인간들을 찾아내는 게 그의 일이었다.

업무가 지긋지긋한 요양병원 원무과장한테 환자 정보 얻어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어머니하고 아드님 둘 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요?”

대화병원 원무과장은 문정숙 환자의 배경에 관해 그녀가 아는 만큼 설명해주었다.

“아- 그래서 아드님이 깨어나시고 나서 병원비를 다 갚고 그러신 거구나. 다행이네.”

“네. 근데, 아까 어느 보험사에서 나오셨다고 하셨죠?”

*

대화요양병원, 주차장.

원무과장으로부터 문정숙 환자의 히스토리를 듣고 나온 우지만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기울였다.

김아리가 술집에 나갈 거라고, 아니면 적어도 나갔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파면 팔수록 그쪽하고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갑자기 밀린 병원비와 1년 치 병원비를 동시에 냈다는 사실.

“명준아, 취직했다고 갑자기 목돈이 생기지는 않잖아?”

“그렇습니다, 형님.”

“대출을 받았나? 그럴 수 있지. 근데 그렇다고 1년 치 병원비를 내? 그것도 몇 개월씩 빌리고 있다가? 로또가 당첨됐나?”

우지만은 돈에 관련된 사람의 심리를 아는 인간이었다. 그의 기준에 있어서 사채까지 쓰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가족이 로또라도 되지 않는 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빚을 해결할 수 없었다.

“아니면 그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는 그 정도로 돈을 잘 버는 건가?”

“돈을 잘 버는 것 같기는 하던데요.”

“그래 보이기는 해.”

쫓다 보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것이 없다.

실망한 우지만은 차를 돌리려는 순간, 그의 시선에 아리가 들어왔다.

---*---

“어디 갔다 와?”

“엄마 보고 오는 길.”

“의정부?”

“응.”

일요일 오후, 요양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아리는 정인을 만났다.

“그럼 아인이는?”

“몇 시간 정도는 혼자 있어도 괜찮아서 두는데, 오늘은 이모님이 오셨어.”

아리의 대답에 정인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

“걱정돼, 너만 보면.”

“걱정 마.”

“이모님은? 이모님도 아셔? 네가 뭘 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시는 것 같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시는 건지···.”

정인은 아리가 안쓰러웠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녀가.

“근데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너도 몰랐잖아.”

“그거야 나는 잠깐 봤을 뿐이고, 그들은 매일 보는데.”

“진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때 봤잖아. 호텔에서.”

서지우와 스친 적이 있었다.

“그건 그냥 지나친 거고.”

“못 알아봐?”

“응. 아, 요새도 수지 씨 와?”

“가끔 오는데, 뭐 네 이야기는 더 이상 안 물어봐.”

“그건 다행이네.”

“응.”

“그런데 아리야?”

“응?”

“너 거기 언제까지 다닐 거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인이 질문을 던졌다. 아리도 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피하고 있던 질문.

잠시 고민한 그녀는 주제를 돌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아, 너는? 너는 선배님하고 어때?”

“좋아.”

“결혼할 거야?”

“그 정도는 아니고.”

“그 정도가 아니라고? 그럼 딴 정도랑 할 거야? 크크큭.”

“야, 재미없어. 아재들이랑 회사를 다녀서 그런가, 너도 아재 개그냐?”

“우리 회사에서 아재 개그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윤 변호사님이야.”

“이미 알고 있다.”

“그래? 크크큭.”

“야, 너 웃음이 나오냐?”

“웃기잖아. 크크큭.”

웃어, 친구야. 나도 겨우 웃을 수 있게 된 거니까.

“아리야.”

“응.”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알았어. 고마워.”

---*---

“왜 우리 로펌에 지원했어요?”

법무법인 해결, 회의실.

서지우와 윤정도가 지원자 인터뷰를 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쪽에 관심이 많아서입니다.”

여성 지원자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것과 해당 산업의 변호사가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데.”

“연예인을 만나고 싶다거나, 막연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원한 것은 아닙니다. 더 크게 될 산업이라고 생각하고, 비전이 있다고 생각해서 지원했습니다.”

정도는 마음에 들었다.

대답이야 평범했지만, 성적이나 이력이 훌륭했기에.

“그래도 이쪽에 관심이 많았나 봐요? 칸 영화제 자원봉사를 할 정도면?”

“네, 사촌 언니가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지원했습니다.”

“영어도 잘하고, 불어도 조금 하고. 이 정도면 대형도 갈 수 있을 텐데···.”

“전 해결에 들어오고 싶습니다.”

“왜요?”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서지우가 묻자, 지원자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방긋 웃으며,

“해결사가 되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하자, 정도는 그녀의 아재스러운 농담이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크크큭-”

정도는 합격을 주었다.

*

법무법인 해결, 카페 같은 휴게실.

“어, 김 변, 미팅 다녀왔어?”

“네. 인터뷰는 어땠어요?”

지원자 인터뷰가 끝나고 휴게실에 들어온 정도는 외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아리와 마주쳤다.

“좋았어.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네.”

“변호사 수가 많아져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그래서, 괜찮은 지원자가 있나요?”

“응. 나는 마지막에 온 여성 지원자가 제일 마음에 드네. 성적도 좋고, 센스도 괜찮은 거 같고.”

“그래요?”

“모르지, 우리 대표님이 정말 여자를 뽑을지 모르겠지만. 아, 맞다. 그 친구 김 변이랑 같은 학교 나왔던데.”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말에 아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정도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

서초동,

성만희 변호사 사무실.

“김 양아, 이게 뭐냐? 하- 아무튼 요새는 4년제 나온 애들도 이런 사소한 일 하나 제대로 못 한단 말이야. 그럴 거면 뭐하러 대학을 가. 그 돈으로 수술이나 하지.”

똑똑똑-

“변호사님, 헤헤.”

“어- 우 사장이 여기 웬일이야?”

비서가 정리해온 정산표를 보며 탄식을 하던 성만희는 갑작스레 찾아온 우지만을 보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잘 지내시죠, 변호사님?”

“어디 시골에 짱박혀서 일수나 떼는 줄 알았더니. 서울에 있었어?”

“에이- 변호사님, 그렇게 죽을 우지만이 아닙니다.”

“수배 중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그건 해결된 거야?”

“아, 네, 뭐. 해결 중입니다. 헤헤”

“사람 넉살은···. 하하, 어이- 김 양아, 여기 커피 좀 타와라.”

오랜만에 방문한 성만희 변호사 사무실.

근황 이야기를 마친 우지만은 슬며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변호사님.”

“왜?”

“혹시 <해결>이라는 로펌 아세요?”

“응. 거기는 왜?”

<해결>이라는 단어에 성만희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니, 뭐 어쩌다가 알게 됐는데···. 거기 처우가 좋나요?”

“개놈의 새끼.”

“아니, 왜요? 혹시 변호사님도 거기하고 얽히셨나요?”

“우 사장도 서지우 그놈하고 얽혔어?”

“아, 네. 그 새끼 그거 유명한 가요?”

“유명하기는 무슨···. 젊은 놈의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쯧. 근데 거기 처우가 좋은지는 우 사장이 왜 궁금해?”

“아- 요새 이 일도 재미없고. 저도 로스쿨이나 들어 가볼까 해서요.”

“뭐? 푸하하하. 실없는 사람하고는···. 요새 변호사도 재미없어, 이 사람아. 변호사 돈 벌었던 시절도 다 옛날이야.”

“그래도 <해결> 같은 작은 사무실도 돈을 잘 주는 것 같던데.”

“거기 작아도, 그 건물도 자가고. 돈 엄청나게 잘 벌어.”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막내도 일 년에 억씩 가지고 갈걸. 내가 작년에 그 새끼랑 얽히고 나서 주변에 좀 물어봤거든. 거기는 사이닝보너스도 주고 1년 차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그렇다고 하더라고. ”

“아- 그래요?”

“근데 진짜 그건 왜 묻는데?”

성만희의 거듭된 질문에 살짝 망설이던 우지만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놨다. 성만희한테 숨길 이유도 없었고, 괜히 숨겨봤자 그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았다.

“저도 거기 대표놈하고 아직 볼 일이 좀 남아있어서요.”

“왜?”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까···.”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채는 성만희.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도 그 새끼 별론데. 그래도 만만케 보지 않는 게 좋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놈 나름 발도 넓고 실력이 좋아.”

“저는 거기 새끼변호사한테 일이 있어요.”

“새끼변호사?”

“네.”

“무슨 일.”

“거기 새끼변호사한테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거기한테 사채 받을 게 있어서요.”

“그래?”

*

성만희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

언제나처럼 없는 사람처럼 옆에 서 있던 명준이 우지만에게 물었다.

“김아리 사채 다 털지 않았나요?”

“응?”

“좀 전에 변호사님께는 사채 받을 게 남아있다고···.”

“아- 그냥 한 소리야. 야, 그리고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면서 돈 받아냈냐?”

꼬투리 잡을 게 있으면 그냥 물고 늘어진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지만은 다시 한번 벽에 봉착했다.

변호사라고 해도 그렇게 큰 목돈이 한꺼번에 생길 일은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왔는데, 사이닝보너스를 준다고 하니, 김아리가 술집에 취직하면서 마이킹을 당겼거나, 다른 사채를 썼을 확률은 더 줄어들었다.

구린내가 나서 들여다봤는데, 착각이었다니···.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기는 우지만이었다.

자기 감이 완전히 틀렸다고 100% 확신을 받을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만큼 복수를 하고 싶었고.

어차피 다른 중요한 할 일도 없었다.

“야, 서류철에서 김아리 주소 좀 찾아서 네비에 쳐봐.”

끝까지 파서 확인하고 나서야 포기할 생각이다.

---*---

똑똑똑-

출근 직후, 누가 아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새로 영입된 이재희 변호사였다.

정도가 ‘성적도 좋고, 센스 있다고’ 칭찬한 그 여자 변호사.

그녀가 <해결>의 공식 첫 번째 여자 변호사가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인가요?”

“아니요. 다음 주부터인데, 미리 나와서 정리 좀 하고 그럴려고요.”

“아, 그랬구나.”

지난번에 잠깐 소개받았을 때도 느꼈지만,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순하게 생겼으면서도 그렇다고 막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아이러니하다.

‘나는 변호사가 아닌데···.’

선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후배에게 변호사 대우를 받으니 순간 죄책감이 몰려왔다.

“···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네? 아 ···네, 천천히.”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인사는 그쯤하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재희 변호사는 그대로 서 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정중했던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드리워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 기억 못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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