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33)

가면 (2)

강남 외곽에 있는 작고 오래된 빌딩.

지어진 지 삼십 년쯤 된 건물이라 겉에서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이동주 대표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넓은 부지 때문이었다.

소속 연예인의 80%가 배우이기에 큰 사무실보다는 넓은 주차공간이 필요한데, 근처는 물론 빌딩 내부에도 공간이 넓었다.

그 공간으로 억 소리 나는 영국제 대형 세단이 들어왔다.

스타 안기정의 차다.

“이 누추한 곳까지···아이고, 어서 와요, 기정 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동주는 괜스레 겸손을 떨어본다.

“우리도 좀 더 복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여기가 땅이 넓어서.”

“그래도 이 건물이 케이 엔터 건물이죠? 제가 기억하기로는 여기 15년도 더 계셨던 거 같은데.”

“20년.”

하일구의 질문에 이동주는 뿌듯한 듯 대답했다.

“땅값 엄청나게 올랐겠는데요.”

“뭐 좀 올랐어. 근데 다른 데도 다 올랐으니까, 이걸 올랐다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다시 너스레를 떠는 이동주.

“내년쯤에는 우리도 이사를 하려고.”

“아, 진짜요?”

“응. 그때 내가 해준 말 기억하지? 복판으로 들어갈 거야. 한복판으로.”

진심이었다.

N사의 투자를 등에 업고 바나나 뮤직을 시작으로 배우에서 가수까지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며, CAA를 이용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회의실로 갈까? 변호사님들이 이미 와 계시는데.”

대표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안기정과 하일구는 이동주를 따라 서지우와 아리가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

“대표님, 다른 조항들은 다 괜찮은데 이 조항이 조금 그런데요.”

“어떤 조항?”

“16조 2항이요.”

하일구는 배상 책임 조항을 가리켰다.

해당 조항 문구에 따르면 소속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포함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소속사는 계약을 해지할 권리를 가지며 손해배상 책임 역시 소속 연예인이 개인적으로 진다는 것이었다.

“아- 이거 근데 당연한 거잖아.”

“당연한 거는 저희도 아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계약서 문구에 들어가 있는 건 처음 봐서요.”

“요새 분위기가 그렇잖아. 모든 지 이렇게 문구로 남기는 추세잖아. 예전에는 고향 후배가 올라와서 일거리 없냐고 물어보면, 운전만 할 줄 알면 바로 로드매니저 시켜줬는데, 요새는 못 그래. 계약서 써야 하고 백그라운드 체크해야 하고. 지난번에는 친구 놈 사촌 동생이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고용했더니만, 알고 보니까 이 새끼가 성추행 전과가 있는 놈이더라고. 나 정은이한테 욕바가지로 먹었잖아. 어디 여자 연예인 로드매니저로 성추행 전과 있는 사람을 쓰냐고.”

이동주 대표의 말이 길어졌다.

“그냥 요식이라고 생각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도 나 우리 소속 연예인 버린 적 한 번도 없어. 계약 해지도 끝까지 다 케어해주고 끝냈지. 그것도 다 그쪽에서 해지해달라고 해서 해준 거야. 그리고 손해배상은 원래 연예인 개인 책임인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석이 새끼 음주 운전해서 포르셰 들이받은 거 내가 다 물어줬어.”

이동주의 설명을 다 들은 하일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대표님.”

“응, 편하게 말해.”

“이 조항 있으면 저희 계약 못 할 것 같습니다.”

계약서 체결이 미뤄졌다.

---*---

회의가 끝나고 내부미팅을 위해 서지우와 아리는 케이 엔터 대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 변, 그 조항 꼭 넣어야 해? 취지는 알겠는데, 저쪽에서 저렇게 안 된다고 하면 좀···. 솔직히 안기정이 지금 핫해서 말이야. 우리 말고도 데리고 가고 싶은 데가 많아. 그렇지 않다고 해도 꼭 데려와야 해. 내 감이 맞다면 정말 크게 될 놈이야.”

다시 말이 길어지는 이동주.

“원래 1인 기획사 차리려고 하는 거를 내가 겨우 설득한 거야. 우리한테 온다는 건 백 프로 할리우드 진출 가능성을 보고 오는 거고, 솔직히 나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고. 조항 빼자고, 응? 회의 때도 얘기했지만, 이 바닥이 변하고는 있어서 아직은 의리로 돌아가는 부분이 많아서. 이 조항이 있다고 해서 이 이동주가 소속 연예인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어때?”

조용히 듣고 있던 서지우 역시 짧게 대답했다.

“대표님 결정입니다.”

“그럼, 뺀다. 빼도 되는 거지?”

“저희가 작성한 계약서 초안에서 빼도 될 조항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해당 조항이 빠질 때 리스크는 저희가 지는 것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가 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님 결정이라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아이 또 왜 그래? 무섭게.”

서지우가 더 이상 부언하지 않자, 이동주는 한참 동안 계약서 문구를 들여다봤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알았어. 내가 좀 더 알아보고 다시 회의하자고.”

서지우의 단호함에 이동주는 결정을 미뤘다.

---*---

미팅 후, 주차장.

“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까부터.”

“네? 아, 네···.”

케이 엔터 회의실 안으로 하일구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 저 사람 어디서 봤더라?

아! 유 과장님 병원. 근데 저 사람이 왜 여기를···.’

안기정의 매니저라고 소개를 받고 나서는 더 아리송해졌다.

‘분명 폭행 사건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았는데···.

설마 가해자?’

“김 변.”

“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다른 생각이 좀 들어서···.”

“무슨 생각?”

아리는 그를 어디서 봤는지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가 왜 하일구에게 관심을 두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고, 게이클럽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녀는 주제를 바꿨다.

“그래도 16조 2항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요새 기획사를 상대로 소송하는 예도 있던데.”

“사업하는 사람들은 마인드가 다르니까. 김 변은 100억을 벌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리스크를 걸 수 있을 것 같아?”

“100억이요? 아···잘 모르겠네요. 갑자기 질문하셔서···20%? 30%?”

“16조 2항을 삭제한다고 했을 때 리스크는 얼마나 있다고 봐?”

“아···솔직히 기획사 상대로 소송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까, 5%? 아니면 그보다 미만이요.”

“그건 그런 경우 발생에 관한 리스크고, 그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 기획사가 입을 수 있는 손해는?”

“그건 예측 불가능인데요. 소속 연예인이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맞아. 예측 불가능이야. 그리고 16조 2항은 같은 조 3항을 연결해주는 조항이야. 기획사에 손해를 입혔을 때, 소속 연예인의 배상 책임이 발생하게 만드는 조항.”

“저도 그걸 뺄 줄 알았는데, 오히려 16조 2항을 빼자고 하더라고요.”

“멍하게 안기정의 얼굴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생각을 아예 안 한 거는 아니네. 16조 2항을 빼면 3항의 배상 책임이 기획사의 자발적인 행동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있어. 보통 연예 사건들이 하루아침에 기사로 터지게 되면 기획사들은 그걸 막으려고 사방팔방 뛰게 되는데, 그때 보통은 연예인에게 직접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면 기획사의 행동이 기획사의 독자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대리인으로서 행동인지 구분이 어렵게 돼.”

“그러면 제삼자의 손해 배상 청구의 주체가 누가 되는지 법적으로 모호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시죠?”

“16조는 그러한 경우, 연예인의 명시적인 지시나 동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기획사가 연예인을 위해 행한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손해를 기획사가 떠안았다면 연예인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조항이야.”

“16조 2항이 삭제되면 기획사의 행동이 어느 때 정당화될 수 있는지 모호해진다는 말씀이신 거죠?”

서지우는 아리를 보고 피식 웃었다.

미팅 내내 딴생각만 하길래 어디에 정신머리를 두고 있나 했는데, 그래도 공부는 해온 모양이다.

“그런데 왜 대표님 결정 사항이라고 하셨나요?”

“이 대표님이 내가 뭐라고 하든 안기정 데리고 올 거야. 아까 100억 벌 수 있으면 리스크를 얼마나 걸 수 있을 거냐고 물었지?”

“네.”

“만약에 연 100억 원을 벌 수 있는데, 한 5% 정도 문제가 생길 확률이 있어. 근데 그 5% 확률의 문제가 발생하면 손해가 막심해. 어때? 김 변이라면 리스크를 걸 것 같아?”

“그러니까 변호사님은 안기정이 연 100억 원짜리 비즈니스라 생각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동주 대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흠···어렵네요.”

“이 대표는 할 거야.”

“진짜요?”

“그래서 김 변이 할 일은 16조 2항 삭제 버전을 만들 돼, 3항을 보완 수정.”

그제야 아리는 왜 서지우가 길게 설명했는지 이해가 갔다.

“저 일 시키시려고···.”

“그거 말고 이유가 있나?”

“아니요. 없죠.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니까.”

“틀렸어. 지분이 많은 파트너와 지분이 쥐꼬리만큼 있는 파트너 사이지.”

처음 보다 많이 편해진 둘.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화가 늘어났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아까 미팅 때 했다는 생각은 뭔데?”

다시 돌아온 주제.

“아, 그거요. 미팅 끝나고 개인적으로 사인을 부탁하면 너무 없어 보일까 하는 고민이요.”

아리는 딴소리를 했다.

아직 의문스러운 게 많았고, 언젠가 대표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

억 소리 나는 영국제 대형 세단이 묵직한 소리를 내자, 도로 위 차들이 슬며시 길을 비켰다.

누가 탄 차일까 궁금해 힐끔힐끔 쳐다보지만, 차창의 선팅이 짙다 못해 검다.

“다음에는 형 혼자 와도 되지?”

뒷좌석에 앉은 안기정이 물었다.

“그래도 네 계약서인데 직접 해야지.”

운전대를 잡은 하일구가 대답했다.

“그럼 퀵으로 보내라고 해. 귀찮게 자꾸 오라 가라야.”

“밀당이라고 생각해.”

“그냥 1인 기획사 차리자니까.”

“너 할리우드 가고 싶다며?”

“1인 기획사 해도 갈 수 있잖아.”

“케이 엔터 이동주 대표 정도면 당장 내년에도 좋은 기회 물어올 거야. 그니까, 일단은 좋게, 좋게 하는 게 너한테도 좋아.”

“그런 사람이 그런 조항을 넣은 계약서를 들이밀어?”

“변호사가 쓴 거겠지. 분명 삭제해서 가지고 올 거야.”

“그러니까 성가시다고. 어차피 삭제해서 가지고 올 거를 두 번 오게 만들고···.”

“너 요새 왜 이렇게 날카로워?”

“어디 스트레스 풀 때가 없어서 그래. 아, 근데 아까 그 변호사 눈빛 봤어?”

“누구? 서 변호사라는 사람?”

“아니, 그 옆. 김아리인가?”

“곱상하게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변호사?”

“응. 우리 과야.”

“진짜? 아닌 거 같던데. 그냥 기집애같이 생긴 애 아니야?”

“아니. 딱 보면 알지. 나 보는 눈빛 못 봤어? 완전히 빠졌어.”

“야, 아서라. 변호사다.”

“그래서 더 당기는데···. 솔직히 내 타입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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