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커밍아웃 (2)
이태원의 시끄러운 번화가 골목에서 살짝 벗어난 곳.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서울의 핫하다는 그 어떤 클럽들보다도 멋지게 되어있다.
언뜻 보면 이상한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있다 보면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클럽 안에 남자들밖에 없다.
종종 여자들이 보이지만 그들마저도 일종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어!”
“혼자 옴?”
“소문이 사실이었네.”
“무슨 소문?”
“안기정이 우리 과라는 거?”
“후훗. 여기 처음인가 보네?”
“왜?”
“여기서는 소문 아닌데.”
이태원의 프라이빗 게이클럽.
그날 밤, 유이헌은 유명 남자배우와 클럽을 나갔다.
---*---
“야!”
“어쩔 수 없었어. 당장이라도 소개해 달라고 할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게 제일 좋은 생각 같더라고. 완벽하게 끊어낼 수 있는.”
“여친이 있다고 할 수도 있었잖아?”
“미안. 근데 남수지 같은 여자가 여친 있다고 그만두겠냐?”
“그만 안 두면?”
“계속 주위에 맴돌겠지. 내가 남수지면 그럴 것 같은데.”
“넌 남수지가 아닙니다요.”
“그러는 너도 여친 없잖아.”
“게이도 아니거든.”
“근데 반쯤 사실 아니야?”
“뭐가?”
“남자 좋아하는 거. 너 남자 좋아하잖아.”
“야, 도정인!”
주말에 아리를 찾아온 정인은 이실직고했다.
아리에게 관심을 표한 수지에게 게이라고 했다고.
“미안. 근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고 했어. 설마 누구한테 이야기하겠냐. 수지 씨 그런 사람 같지 않던데.”
‘만약 게이라는 사실이 회사에 퍼지면 어떻게 될까?’ 아리는 잠깐 생각해본다.
그것도 남자밖에 없는 회사에.
윤 변님은 그래도 아무 일 아닌 척 받아 줄 것도 같다.
서 변호사님은?
도무지 감이 안 온다.
다른 사람들은···.
“근데, 너 거기 계속 다닐 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아인인척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뜻하지 않게 주제가 심각하게 변했다.
일부러 하지 않고 있던 질문.
아리는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돈 때문이면 이제 괜찮아진 거 아니었어? 그러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지 않아?”
정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생활고가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서 시작한 거짓말. 이제 어느 정도 모아둔 돈도 있고 그만두면 완전 범죄가 될 거다.
“아직 회사에 갚아야 할 돈이 있어.”
“얼마?”
“5천만 원.”
“그 정도나 있어?”
사실 그 정도 빚 갚을 돈은 지금도 있다.
‘근데 갚고 나면?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싫다. 그렇다고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아리야, 내가 그 돈 빌려줄까?”
“됐다.”
“진짜로. 원하면 빌려줄 수 있어. 병원이 생각보다 잘 돼서···.”
“됐어.”
단지 그 힘들었던 생활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변호사 일을 계속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해결>에 계속 일하고 싶다. 그의 곁에서···.
“알았어. 근데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법 공부한 적도 없잖아.”
“법전을 다 외웠어. 짬짬이 사건들도.”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친구의 비상한 능력.
“아무튼 그놈의 기억력은 정말 AI급이라니까. 하긴 1년 넘게 일했으면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까, 다닐 수 있겠지. 그 로펌 꽤 잘나가는 로펌이라며?”
“응.”
“근데 진짜 신기하기는 하다.”
“뭐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니가 여자인걸.”
“너도 몰라봤거든.”
“그거야 갑자기 양복을 입고 나타났으니까···. 근데 회식 같은 거 할 때, 남자들 막 어깨동무 같은 거 하고 그러지 않아?”
“아니.”
“그래도 술 먹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나보다 센 사람이 없어서···.”
“아, 맞다. 네 능력이 포토그래픽 메모리만 있는 게 아니었지.”
친구끼리 종종 그렇듯 이야기하다가 주제가 벗어났다.
언젠가는 정인이 한 말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
띵동-
띠리릭-
열린 문을 두고 잠시간 서지우를 바라보던 레이철은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지우는 그녀의 갈망을 받아주었다.
*
“이렇게 좋은데···.”
미국에서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후, 갑자기 나타난 그녀.
관계가 끝난 후, 그녀는 마치 지우가 옆에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어. 아, 그렇다고 계속하겠다고 온 건 아니야.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이라서.”
그도 이미 눈치챘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이어져 있냐.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만나게 된 거. 여자를 미치게 하는 남자라며?”
“소연이가 그래?”
“···소연이가 미안하대. 자기도 그때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대. 그냥 당신한테 미쳐있었대.”
“지난 일이야.”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아, 물론 멋지지만 미치게 할 정도는 아니잖아. 안 그래?”
“나한테 지금 내가 별로라는 걸 인정하라는 거야?”
“응.”
“못하겠다면.”
“해줘. 그래야···.”
널 포기할 수 있겠어.
“그래, 맞아. 그 정도는 아니야. 다 부작용일 뿐이야.”
“부작용?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렇다고.”
레이철은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집어 들었다.
“잡을 생각 없는 거지?”
“질척거리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후훗. 이래서 쿨한 사람들끼리는 오래갈 수가 없다니까. 잘 있어.”
“당신도.”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떠났다.
---*---
법무법인 해결, 대회의실.
월요일 주간 회의가 끝나고, 서지우는 정도와 아리에게 미국에서 진행된 이야기를 공유했다.
“케이 엔터테인먼트가 CAA(Creative Agency for Artists)가 제휴를 맺었어. 일단은 교류 정도지만 향후 지분 스와프를 통해 좀 더 확실한 파트너십을 체결할 예정이야.”
“그거 대박이네요. CAA 정도면 할리우드 탑급 에이전시인데. 그렇다는 말은 한윤정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네요.”
“응. 아마도 한윤정을 필두로 케이 엔터 쪽 배우들이랑 가수들을 차례로 미국 진출시킬 것 같아.”
“와- 이 대표님이 소원 성취하시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정말 극비인데. 바나나 뮤직을 인수할 것 같아.”
“헉! 진짜요? 그것도 대형 딜인데요. 돈이 많으신가 보네요.”
“어쩌면 N사에서 투자할지 모르겠어.”
“와- 진짜 국제급 되는 거 한순간이네요. 이 대표님 파워는 이제 독보적이 되겠는데요.”
“케이 엔터 이 대표님은 원래 영향력이 센 분 아니셨어요?”
서지우와 정도의 대화에 막내 파트너가 끼어들자,
“지금도 센데. 이제는 진짜 더 세지는 거지. 만약 CAA랑 지분 스와프하고 N사 투자받아서 바나나 뮤직도 인수하면, 그때는 정말 국내 아니 아시아 탑5에 드는 거지.”
정도가 얼른 대답해준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계약서랑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을 거야.”
“미국 출장도 많아지겠네요.”
“일단 급한 거는 해결했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해.”
“The Dynasty도 이제 곧 급물살 탈 것 같은데···.”
“충원은 어떻게 되고 있어?”
케이 엔터 관련해서 이것저것 논의하고 있던 서지우는 변호사 채용 진행에 관해 물었다.
“미국 가시기 전에 유 과장한테 말해두기는 했는데···.”
유이헌 과장이 며칠 전부터 출근을 안 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알아는 봤어?”
“네. 연락이 왔는데, 술 먹고 다쳤다고···.”
“술 먹고 다쳐?”
“술도 잘 먹는 사람이 술 먹고 다쳤다고 하니까, 저도 좀 의아하기는 한데. 본인이 전화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정도의 보고에 서지우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많이 다쳤대?”
“다음 주까지는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병원이야?”
“안 그래도 어느 병원이라고 물었더니, 창피하다고 오지 말라고 안 가르쳐주네요.”
“그래?”
“뭐 사실 갈 거는 아니고, 그래도 다쳤다는데 꽃이랑 과일상자라도 보낼까 해서 물은 건데, 극구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더 기울어지는 서지우의 고개.
“알았어. 그래도 다시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그럼, 더 보고 할 일 없지?”
“네.”
*
회의가 끝나고, 정도와 아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 커피를 타가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저는 휴가 갔다고만 들었는데, 다치셔서 출근 못 하시는 거였어요?”
“응.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엊저녁에 문자가 와서 잠깐 통했는데, 그때 들었어.”
“많이 다치셨대요?”
“몰라. 자세하게 말을 안 해. 술 먹고 그렇게 된 게 창피해서 그런가···. 아무튼 다음 주나 돼야 출근할 수 있을 거라는데.”
“많이 다치셨나 보네.”
“전화 목소리는 괜찮았는데, 일주일씩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하는 거면,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근데 느낌이 왠지 싸운 게 아닌가 싶어.”
“싸움이요?”
“응. 아니, 실족했거나 교통사고 같은 거면 그냥 말했을 텐데, 그럼 보험도 되니까 병가 처리하고 일당도 다 받을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닌 거 보면,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은 게 아닌가 싶어서.”
“아···. 유 과장님이 술자리에서 누구랑 시비 붙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워낙 술자리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니까. 그리고 누구랑 마셨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그렇기는 한데···. 아, 변호사님, 병원 어디인지 들으시면 저도 가르쳐주세요.”
“왜? 병문안 가게?”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술 먹고 싸운 거면 안 가는 게 낫지 않아? 쪽팔리잖아.”
“그래도요. 저 쓰러졌을 때, 사무장님도 오셨었고, 유 과장님도 괜찮냐고 문자 많이 보내주셨거든요.”
“그랬구나. 알았어. 들으면 알려줄게. 같이 가자고.”
“윤 변호사님도 가시게요?”
“막상 듣고 보니 가보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가보지 뭐.”
“네.”
---*---
같은 날, 늦은 시각.
똑똑똑-
대표 변호사실 문을 최성태 사무장이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변호사님.”
“급한 거 아니면 그냥 문자로 하셔도 되는데, 굳이 다시 들어오셨어요.”
서지우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최성태는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알아보라고 지시하신 거 말입니다.”
“유 과장 일이요?”
“네. 병원에도 가봤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좀 더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보고를 듣고 있는 서지우의 표정도 진지해진다.
“폭행 사건 같습니다.”
“술집에서 싸움이 난 건가요?”
“아니요. 그게······단순한 폭행 사건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단순한 폭행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
“아···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아무래도 유 과장이 성폭행을 당한 것 같습니다.”
“성폭행이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동성에게요.”
서지우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