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33)
  • 비자발적 커밍아웃 (1)

    까톡.

    [정인: 아리야! 우리 병원에 수지 씨 왔다!]

    [아리: 대박!]

    답문은 그렇게 보냈지만, 아리의 심장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정인: 대박이지? 관리도 봤고 사진도 찍어주고 갔어.]

    [정인: 너랑도 아는 사이라며?]

    [아리: 아는 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예전 샵에 있을 때, 수지 씨 매니저분이랑 조금.]

    [정인: 그 매니저분은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너랑 친했다고 하던데? 너 데뷔시키고 싶으셨다고 하시던데?]

    [아리: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ㅎㅎ 옛날 일이야.]

    [정인: 근데 너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아리: 그걸 왜 얘기해.]

    [정인: 얘기해야지. 그럼 우리 병원에서 관리받게 하지.]

    [아리: 너 병원 개업 전에 일이거든요.]

    [정인: 지금은? 지금도 할 맘 없는 거야?]

    [아리: 됐어.]

    [정인: 아, 맞다. 근데 너 언제 가게 그만뒀어?]

    [아리: 응?]

    [정인: 그분 말씀이 너랑 최근에 통화했을 때, 너 일 그만뒀다고 들었다던데? 진짜야?]

    일이 또 이렇게 꼬일 줄이야.

    [아리: 아 ㅎㅎ 응.]

    [정인: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아리: 최근이야. 하려고 그랬어.]

    [정인: 그럼 너 진짜 대학 준비하려고?]

    상세히도 이야기를 전했다.

    [아리: 그래볼까 생각 중이야.]

    [정인: 나는 응원. 내가 뭐 도와줄까? 도와줄 거 없어?]

    [장인: 이를테면 술 같은 거?]

    [아리: ㅎㅎ 그래, 필요하면 말할게.]

    [장인: 라이크 롸잇 나우?]

    [아리: ㅎㅎ 나 공부해야 해.]

    사실은 일해야 했다고 쓰는 것이 정확했지만, ‘공부’로 바꿔썼다.

    [정인: 그래 ㅠㅠ 알았어 ㅠㅠ]

    [정인: 나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만학을 응원해주기 위해서 번개를 하려고 했지 ㅠㅠ]

    [아리: ㅎㅎ 네가 마시고 싶은 건 아니고?]

    [정인: 노노. 순수하게 너를 위한 나의 마음.]

    [아이: 그 마음 나중에 받을게. 오늘은 힘들 것 같아. 미안, 대신 내일은 어때?]

    [정인: 그건 번개가 아니잖아.]

    [아리: 기상예보, 내일은 번개가 칠 예정입니다. 마구 칠 예정입니다.]

    [정인: ㅎㅎ좋아. 내일 콜]

    [정인: 아리야.]

    [아리: 응.]

    [정인: 내일 볼 때, 우리 정도 씨랑 아인이랑 다 같이 볼까?]

    [아리: ??]

    [정인: 아니, 정도 씨가 언제 다 같이 한번 보자고 해서.]

    [정인: 왜 불편해? 그냥 너한테 한번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쌍둥이 오빠 상사를 만나는 게 어색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아인이 빼고 따로 만나자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아리: 정인아, 그냥 오늘 만나자.]

    [정인: 응? 오늘 바쁘다며.]

    [아리: 갑자기 해 줄 얘기가 생겼어.]

    더 미룰 수 없었다.

    ---*---

    잠실, 한적한 카페.

    “어? 아인아, 니가 여길 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갈까 했다가 그냥 바로 만남 장소로 향했다. 열 마디 말보다 한번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포마드로 머리를 넘기고 양복을 입은 아리를 보고 정인은 아인이라 불렀다.

    “아리는?”

    “정인아.”

    “?”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이야기 놀라지 말고 들어.”

    아리는 오빠와 엄마가 당한 교통사고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고, 긴 설명이 끝났을 때, 정인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일이 그렇게···.”

    “그렇게 됐어.”

    “그러면 지금 그 로펌에 다니는 게···너라고? 그래서 머리를 그렇게 짧게···.”

    “응.”

    “지금도 회사에서 오는 길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래도 오래된 친구였다.

    “미안···아리야···너 고생 많았구나···.”

    친구의 사정을 받아들이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

    같은 시각, 압구정 술집.

    정도는 오랜만에 동기를 만났다.

    “그래서? 결혼하게?”

    “모르지. 그걸 두 번 만나보고 어떻게 알아.”

    “결혼정보회사 통해 만났다면서?”

    “응.”

    “그건 세 번 만나면 끝인 거야. 선하고 똑같아 세 번 만나면 오케이 한 거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당장 결혼 날짜를 잡고 그런 건 아니라고 해도, 세 번 만난다는 거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

    정도는 순간 친구의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뭐, 상관없지.”

    “오오- 이 새끼, 그분이 마음에 드나 보네.”

    “응. 거의 처음인 거 같아. 여자랑 편하게 대화한 적이.”

    “대화 중요하지. 아주 중요해. 그냥 사귀는 거면 말 좀 안 통해도 괜찮아. 말이 안 통할 때는 몸으로 대화하면 되니까. 근데 결혼? 결혼은 무조건 말이 통해야 해.”

    “왜? 결혼하면 몸의 대화는 못 하냐?”

    “못해.”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진짜야, 못해. 몸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발이 떨어져.”

    “니 정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고?”

    “니 정력은 안 떨어질 것 같냐? 몸의 대화는 새로운 사람하고 할 때만 잘 통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경험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너. 아서라, 큰일 난다.”

    “그렇다고. 아무튼 말 통하는 거 매우 중요해.”

    농반진반이 섞인 기혼자 친구의 충고.

    정도는 다시 정인을 떠올린다.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 내가 말했나? 지금 만나는 사람이 우리 회사 막내 파트너 쌍둥이 동생의 절친이라고.”

    “너희 변호사가 쌍둥이 동생이 있어?”

    “응.”

    “근데 그럼 진짜 조심은 해야겠네.”

    “뭘?”

    “네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분 귀에 들어갈 거 아니야.”

    “에이- 우리 김 변 그런 스타일 아니야, 집에 가서 동생에게 막 할 말, 못 할 말 가려 하지 못하는 남자. 상남자야, 완전.”

    “설사 그렇다고 해도 실수로 툭 튀어나오는 수가 있어. 그리고, 아마 저쪽에서 벌써 다 물어봤을걸, 너 어떤 사람인지.”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듣다 보니 살짝 걱정되기는 한다.

    “어쩌면 지금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몰라.”

    ---*---

    같은 시각, 잠실 카페.

    “그러면 정도 씨랑 일하는 것도···.”

    “나야.”

    “아, 그럼, 윤정도 씨 어떤 사람이니?”

    정인이 묻는다.

    ---*---

    다음 날, 법무법인 해결.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날씨 너무 좋아.”

    “그러게요.”

    휴게실에서 막내 파트너를 기다리는 정도는 그가 출근하자, 살며시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김 변.”

    “네.”

    “나 김 변 동생 친구분 만난다고 했잖아.”

    “네···.”

    “솔직하게 말할게. 나 정인 씨가 꽤 마음에 드는 거 같아.”

    “아. 네.”

    “김 변은 상관없지?”

    “그럼요.”

    “오케이. 그러면 동생에게 잘 말씀드려줘.”

    “뭘요?”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그걸 왜 동생한테···.”

    “그래야 정인 씨한테도 들어갈 거 아니야.”

    “하하하.”

    “왜 웃어?”

    “변호사님 남수지 씨 좋아하셨던 거 아니셨어요?”

    “그거야, 그냥 팬으로서. 야, 나 순수해. 그런 더티 마인드 아니야.”

    “근데, 정인이한테 남수지 씨 닮았다고 했다면서요?”

    “헉? 그걸 김 변이 어떻게 알아? 설마 동생이 말했어? 진짜 그런 것까지 다 공유하는 사이야? 동생하고 별로 안 친한 줄 알았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재미있다고 그냥 그것만 얘기해 준 거니까.”

    “진짜지?”

    “아, 그것도 있다.”

    “뭐?”

    “정인이가 변호사님 마음에 들어 한대요.”

    “진짜?!”

    ---*---

    송파, <정인피부과>.

    “어, 수지 씨! 또 오셨네요.”

    “저번에 받고 가서 피부가 너무 좋아진 것 같아서요.”

    남수지가 또 찾아왔다.

    정인은 살짝 의아했다. 강남 럭셔리 피부과 병원들에 비교하면 자신의 병원은 그냥 동네 피부과였다. 실력이 없는 건 아니었어도 유명 스타가 다닐만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고.

    “아리 씨는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하고 계세요?”

    “아리요?”

    처음에는 아리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길래, 정말 스카우트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더 이야기하다 보니 그녀의 관심이 아리가 아닌 아인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김 변호사님하고도 친하셨어요?”

    “아인이요? 아인이하고는 뭐 그냥 학교 다닐 때 인사하는 정도.”

    “아, 그렇구나.”

    “그럼 요새도 만나세요?”

    “아인이요? 아니요. 바쁜 거 같던데, 로펌 들어가서.”

    “그렇죠. 진짜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아, 혹시 김 변호사님 누구 사귀시는 분 있으신가요?”

    ‘아, 이걸 어쩐다···. 유명 배우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표하는 거 보면 이미 상당히 빠진 거 같은데···.’

    비밀을 알고 있는 정인의 심장이 콩닥거린다.

    ‘그러다 걸리면···. 사귀자고 고백이라도 해버리면? 설마···아니지, 설마가 사람 잡지. 방송 같은데 보면 연예인이 먼저 고백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잖아. 아, 그럼 진짜 곤란해지는데. 어쩌지···.’

    “아인이 게이에요.”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모르겠다.

    그냥 싹을 잘라야겠다는 일념하에서 그만···.

    “네에?”

    “아인이 성향이 그쪽이에요. 아시죠? 그쪽.”

    “아니···그런···설마···.”

    “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여자한테 관심 없고, 대신 남자한테 관심이···.”

    “아···저런···.”

    “원래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안 되는데, 제가 수지 씨 팬이라서 말씀드려요. 곤란한 상황 생기면 곤란하잖아요. 배우신데···.”

    “아···고맙습니다.”

    “수지 씨만 알고 계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어찌 됐건 그런 성향인 게 밝혀지면 아인이가 직장에서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요.”

    “물론이에요. 말 안 할게요.”

    “감사합니다.”

    “근데···진짜인가요?”

    “네. 찐이에요. 양성도 아니고. 완전 그쪽.”

    졸지에 비자발적으로 커밍아웃하게 되어버렸다.

    ---*---

    동인천, 신포동의 한 골목 안으로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가 덩치 한 명과 들어갔다.

    네온사인도 걸려있지 않은 술집.

    이 방, 저 방을 문을 마구잡이로 열어본다.

    늙은 마담이 나와 누구시냐고 항의해보지만, 소용없다.

    주방에 있던 사내들이 나왔다가 덩치를 보고는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다.

    “아이, 씨발년 여기 있었네.”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가 드디어 찾고 있던 사람을 찾았다.

    “씨발년아, 남의 돈 떼먹고 숨어있다가 이런 데 나오면 돈 빌려준 사람이 ‘아이고, 재수 없었네’하고 잊어버릴 줄 알았냐?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짝!

    남자는 여자가 휘청거릴 정도로 따귀를 날렸다.

    “악! 살려주세요! 제발요. 갚을게요. 살려주세요.”

    “돈은 당연히 갚는 거고. 언제 갚는 게 중요하지.”

    “지금은 돈이 없어서···.”

    짝!

    “아악!”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콩팥이라도 하나 팔아야지. 눈 같은 거보다는 그게 낫잖아. 너한테도.”

    “죄송해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가 진짜 꼭 다 갚을게요. 살려주세요. 흑흑.”

    “살려주려고 지금 이렇게 제안을 하잖아요. 죽일 거면 이렇게 가게로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씨발련씨.”

    “살려주세요···. 흑흑.”

    “어이, 명준아.”

    “예, 사장님.”

    “종길이 형한테 전화해서 찾았다고 해. 어떻게 할 거냐고.”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우지만은 테이블 위에 맥주를 집어 들어 마셨다.

    “뭘 봐. 씨발놈들아, 눈깔아.”

    몇 개월 사이에 많이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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