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33)

남과 여 (2)

태이의 말대로 아침저녁으로 알콩달콩한 문자를 주고받는 그런 평범한(?) 연애는 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복잡한 인생을 살면서 단순한 연애를 원하는 사람.

영화 ‘인 디 에어’에서 베라 파미가가 연기한 알렉스 고란 같은 여자.

그런 여자처럼 보였다.

“Surprise!”

레이철이 LA로 찾아왔다.

“어어···.”

“반응이 왜 그래?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리액션이 딱 그건데.”

진짜로 의심해서 묻는 건 아니었지만,

“뭐야 그 표정은? 반갑지 않은 거야? 차라리 누구랑 같이 있었으면 나았을 것 같을 정도인데.”

“반가워.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그랬을 뿐이야.”

“깜짝파티 같은 건 절대 하지 말아야겠네.”

“어떻게 왔어? 일은?”

“석 달에 한 번씩 LA 본사에 나와서 보고해야 해.”

“보고?”

“내가 말 안 했던가? 파견 나와 있는 거라고?”

첫 만남에서 말했던 것 같기도.

“회사가 웨스트포인트 인베스트먼트?”

“오- 기억하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오늘 도착한 거야?”

“방금.”

갑자기 찾아온 침묵.

더 어색하기 전, 레이철은 서지우에게 다가갔다.

대화보다 다른 게 훨씬 더 익숙한 관계.

짧게 끝나면 대화해야 할 시간이 길어질까 봐, 둘은 길게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또 찾아온 대화 시간.

“한국은 내일 돌아가?”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묶을 곳은 있고?”

“내가 말 안 했어? 엄마가 벨 에어에 산다고?”

말 안 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좋은 데 사시네.”

“당신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두 분 모두?”

“아버지가.”

“어머니는?”

“몰라. 살아계셔.”

그의 대답에서 레이철은 대충 눈치챘다.

“아버님은?”

이번에는 지우가 물었다.

“이혼하셨어. 나보다 열 살 많은 여자랑 살아.”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건가?”

“아니야. 전에는 다섯 살 많은 년이랑 살았어. 그년은 진짜 싸가지가 없었지.”

“물어봐서 미안해.”

“자, 그럼 내 차례. 당신 전 부인은?”

관심 없는 척했어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서지우는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이에 관해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

“흠. 그럼 같은 업계에 있다는 말이네. 그건 좀 마음에 안 드네.”

“파견이라고 하면 언젠가는 여기로 돌아온다는 말인가?”

“왜?”

“장거리 연애 타입처럼 안 보여서.”

“헤어질 때를 벌써 걱정하는 거야?”

“끝이 정해진 연애를 할 타입도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다는 거지? 장거리 연애도, 끝이 정해진 연애도.”

“들켰네.”

“계약이 내년이야. 내년에 연장할지 말지 결정해.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어때? 내년까지 해보고 그때 결정하는 건?”

‘좋을 대로’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좋아.”

진짜 그래볼 생각이다. 연애의 끝이 결혼이 아니라는 점에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큐피드는 그에게 그런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 내일 친구랑 식사하기로 했는데, 같이 볼래?”

“친구?”

“불편하면 거절해도 돼. 내가 한국 남자를 만난다고 하니까, 걔가 하도 궁금해해서. 아, 친구긴 한데 학교 때 친구는 아니고 직장에서 만난 친구.”

“점심?”

“아니. 저녁.”

“그럼 오케이.”

“Okay, then.”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나가고 싶었다. 그런 게 운명이다. 딱히 이유도 없이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마주치는 상황.

*

다음 날, 저녁.

LA의 힙한 라운지 바.

일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한 서지우는 소연을 만났다.

“요새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소연. 인사해, 여기가 내가 말한 남자.”

“······.”

“혹시 둘이 아는 사이야?”

강소연.

세 번째···아니, 이제 두 번째 부인이었던 여자.

---*---

[아리: 그래서 느낌이 어때?]

[정인: 한번 만났는데 어떻게 알아.]

[아리: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정인: 음···첫 느낌은 일단 괜찮아. 대화하기가 편하다고 해야 할까.]

[아리: 또 만날 거야?]

[정인: 시사회 같이 가기로 했다니까.]

[아리: 결혼정보회사 통해서 만난 사람은 세 번 만나면 정해지는 거 아니야?]

[정인: 너 잘 안다. 세 번 만나고 더 만나기로 하면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 주선을 안 해주고. 어디는 성혼비인가 하는 것도 낸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계약 조건은 없어.]

[아리: 그럼 세 번 만나보려고?]

[정인: 야, 그건 두 번째 만나고 결정해야지. 왜 니가 나보다 더 급한 거 같냐.]

[아리: 신기해서. 아, 근데 그분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정인: 응? 내가 이름 말해준 적 있어? 없는 거 같은데. 왜?]

[아리: 이름 점 봐주게 ㅎㅎ]

[정인: ㅎㅎㅎ 아, 이름 점. 언제적 하던 거냐···. 윤정도. 아, 아인이한테 한번 물어봐 줘, 혹시 아는 사람인지.]

설마 했던 것이 확실해졌다.

‘윤 변호사님과 정인이가 만난다.

어쩌지?

정인이는 호감이 있는 거 같은데···. 변호사님도 같은 감정일까?

만약 둘이 사귄다고 한다면 어떡하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만난 거니까, 어느 정도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일 텐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인이한테 솔직하게 고백할까?

미쳤어? 이제 고작 한번 만났는데, 잘 안 될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시사회에 같이 가면 아인이가 다닌다는 걸 같은 로펌에 다니는 걸 알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확률이 높아질 텐데···.’

아리는 그나마 다시 좋아진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정인이가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그냥 지켜보자.’

[아리: 알았어. 물어볼게.]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 너무 예뻐요.”

“감사해요.”

여의도 CGV.

VIP 시사회를 마친 남수지는 송세연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팬들을 향해 한없이 밝게 웃던 그녀는 밴에 오르자마자 울상이 된다.

“뭐야, 언니. 다른 사람이랑 왔잖아. 힝-. 설마 날 피하는 거는 아니겠지?”

그녀는 윤정도 변호사가 고대했던 김아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데려온 것에 실망했다.

“아니야. 누가 널 피해.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못 오신 거라고 했잖아.”

“근데 사건도 넘기고 시사회도 안 온 거 보면 좀 이상하지 않아?”

“안 이상해. 너 왜 그래? 10년 넘게 무명도 버텨온 애가.”

“그거랑 이거랑 같아. 몰라. 근데 이제 만날 기회도 없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기회 만들어 줄게.”

“어떻게?”

“아까 못 들었어? 윤 변호사님 데이트가 동생이랑 친구라는 말.”

“그렇다고 그분한테 연락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동생분 공부 중이라며.”

“피부과 의사라시잖아.”

“응? 그게 무슨 상관인데?”

“쌍둥이면 같이 학교 다녔을 거 아니야. 그리고 그분하고 친해지면 자연스레 아리하고 친해질 수 있고, 그러면 김 변호사님하고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겠니? 같은 또래인데.”

“진짜 그럴까?”

“당연하지. 그리고 윤 변호사님이 그분이랑 잘 만나면 더 좋아. 아무튼 넌 내가 만들어 놓은 밥상에 짜잔 하고 나타나기만 하면 돼.”

“진짜지?”

“내가 언제 너한테 허튼소리 한 적 있니?”

세연의 다독임에 수지는 다시 한번 희망을 품어본다.

---*---

시사회 직후 정도와 정인은 근처 카페를 찾았다.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재미있게 봤어요. 정도 씨는요?”

“저도요.”

“수지 씨랑 그렇게 친하신 줄 몰랐어요. 수지 씨 변호사라는 건 왜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저희 로펌에서 맡은 케이스 중 하나에요. 친하다고 할 것까지는···.”

정인은 정도의 겸손이 마음에 든다.

“친하신 거 같던데.”

“그냥 성격이 좋으세요. 누구에게나 친절하시고.”

“그렇구나. 아무튼 덕분에 수지 씨한테 사인도 받고. 아, 근데 처음 알았어요, 아인이가 다니는 로펌에 계시는 줄. 법무법인 해결? 이름도 되게 특이해요.”

“저도 정인 씨가 김 변 동생분하고 베프인 줄은 진짜 몰랐네요. 참, 신기하네요.”

우연치고는 기막힌 인연. 정도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인도 비슷하게 여겼다.

“우리 다음은 언제 만날까요?”

“글쎄요. 근데 제가 개인 병원이라서 일요일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조금···.”

“저도 일요일이 편하기는 한데···. 그럼 우리 다음 주 일요일에 볼까요?”

“그럴까요?”

“아, 아니면 평일에 병원 언제 끝나세요?”

“병원은 8시까지기는 한데, 6시면 진료는 끝나요. 왜요?”

“혹시 술 좋아하세요?”

“술이요. 네, 뭐···싫어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

“그럼, 만약에 술 드시고 싶은 날에는 전화 주세요. 번개는 언제는 환영입니다.”

“술 잘하시는 봐요?”

“네. 조금 하는 편입니다. 하하하. 아! 물론 김 변만큼은 아니지만.”

“아인이요?”

“네. 아우- 저도 술 좀 한다고 하는데, 김 변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죠.”

“아인이도 술 잘 마시는구나.”

“아, 혹시 그러면···.”

“아리도 술 진짜 잘 먹어요. 남녀 통틀어서 아리가 누구한테 술로 직전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아, 그러시구나. 하긴, 쌍둥이니까. 만나보고 싶네요.”

“그러면 넷이 같이 한번 만날까요?”

“저야 좋죠. 김 변 동생분 얘기만 많이 들었지, 한 번도 뵌 적이 없거든요. 실력 좋은 헤어스타일리스트시라고.”

“네. 그럼, 아리랑 얘기해보고 다음 주 평일에 즘에 한번 콜?”

“콜!”

“오늘 재미있었어요.”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어쩌면 ‘곤란한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올지도 모르겠다.

---*---

LA의 한 라운지 바.

“어색하다. 오늘은 둘이 만나야겠다. 나 먼저 갈게.”

“아니야, 소연아. 잠깐만. 원래 너 만나려고 한 자리였잖아. 오 분만 기다려 줘. 지우 씨랑 잠깐만 이야기하고 갈게.”

레이철의 부탁에 소연은 지우에게 목례를 하고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말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친구한테 듣는 게 나을 듯싶은데.”

레이철은 지우의 대답을 잠시 곱씹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에게 모르는 게 많네, 우리.”

이제 갓 만난 사람들이니 서로 모르는 게 많은 건 당연한 일.

그게 불만 아니다.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룻밤 사랑으로 끝내기 아쉬워 좀 더 알아보려고 했는데···.’ 뭔가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든다.

레이철은 서지우를 만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처음으로 의심했다.

“알 필요 없을 수도 있지.”

레이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하나만 더 물을게. 나랑 진지하게 만나볼 마음은 있었던 거야?”

서지우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억지로 그럴 수 있는 상대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나? 실패해도 상처받지 않는 여자를···.’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친구 기다리겠네.”

“What a surprise. 돌아갈 때는 같은 비행기로 갈 줄 알았는데···.”

“I am sorry. 기대를 저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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