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작대기 (3)
“수고하셨습니다.”
“김 변도 수고했어.”
서울중앙지방법원, 기일을 마치고 나온 지우와 아리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괜찮으시고?”
잠시 말없이 걷던 둘. 문득 며칠 전 막내 파트너가 한 말이 떠오른 서지우가 묻자, 아리는,
“네? 아, 네. 조금 나아지셨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매 증상 외에는 건강한 엄마 핑계를 댄 것이 부끄러워 그런 것이었으나, 서지우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원하면 의사를 소개해줄 수 있어.”
“네?”
“뇌 분야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최고이신 의사 선생님.”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의사 선생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아리의 대답에 서지우는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래, 그럼. 혹시 나중이라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네.”
아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 대답했다.
그리곤,
“아, 이 작가님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얼른 주제를 바꾼다.
“그래? 어디시래?”
“미국이시래요.”
“미국?”
의외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주로 아시아 쪽 나라를 가셨는데···.
“네. 라스베가스요.”
“라스베가스?”
라스베가스라는 말에 서지우는 궁금해졌다.
“왜 가셨는지는 말씀하셨고?”
“그냥 거기 가면 뭔가 떠오를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네.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통 생각이 나지 않으신다면서, 거기 가면 뭐가 떠오를까 해서 가보신대요.”
기억의 잔상 같은 게 남아있는 건가?
처음 겪는 일. 서지우는 이제 기억력 좋은 막내의 머리에 혹시 무언가 남아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김 변호사.”
“네.”
“김 변호사는 혹시 뭐 기억나는 거 없어?”
“기억나는 거요?”
질문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아리는 대표의 눈치를 본다.
“혹시 이 작가님이 김 변에게 뭔가 이야기해준 것이 있나 해서 물었어. 술자리에 같은 데서. 원래 쓰려고 했다던 글에 대해.”
“아···. 있기는 한데···라스베가스 관련된 거는 없었어요.”
“확실해?”
“아···네, 확실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알았어. 혹시나 해서 물었어.”
“네···.”
“아, 참. 내가 해보라는 검사는 받았어?”
“검사요?”
“김 변 몇 개월 전에 쓰러졌었잖아. 뇌 MRI 검사해봤냐고.”
“···네, 했습니다.”
“아무 이상 없고?”
“네. 의사 선생님께서 별다른 말씀은 해주지 않으셨어요.”
“두통 같은 거는 없고?”
“네, 없습니다.”
“팔로우업 잘해. 뇌는 문제가 생겨도 자각을 잘 못 해서 방치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징징- 징징-
때마침 진동하는 서지우의 휴대전화기.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스러웠던 아리는 대표가 전화를 꺼내 받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통화는 일 분도 안 돼 끝났지만, 다행히 같은 토픽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케이 엔터테인먼트 이 대표님을 좀 만나고 들어가야 할 것 같네.”
“아, 넵. 그럼 저는 택시 타고 들어가겠습니다.”
---*---
같은 시각,
법무법인 해결의 휴게실.
“변호사님, 결정사 등록하신 거는 어떻게 되셨어요?”
“결정사?”
“결혼정보회사요.”
“요새는 결혼정보회사를 그렇게 줄여 불러?”
“선배들이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아, 그래. 아직 첫 번째 소개도 못 만나봤어.”
창현의 질문에 정도가 대답했다.
“변호사님은 가입비 같은 것도 무료죠?”
“응. 빼준다고 하더라.”
“역시 전문직은 다르네요. 우리 사촌 형은 가입비도 내고 프리미엄인가 뭔가 그런 것도 내고 하던데.”
“안 그래도 매니저가 그런 말 하더라고. 아우, 이빨들이 장난이 아니야. 나더러 올해 안에 장가갈 준비 하시라고 하더라.”
“솔직히 변호사님이야 원하시면 언제든 가실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전문직에 집도 있겠다, 차도 있겠다. 저는 포기했어요, 결혼.”
“왜? 아직 서른도 안 된 놈이 왜 벌써 결혼을 포기해.”
“아무리 계산해도 마흔 전에는 집 못 사겠더라고요.”
“야, 그렇다고 결혼을 포기해?”
“변호사님은 모릅니다. 아등바등하느니 그냥 비혼주의 할래요.”
“모르기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정도는 그만둔다.
바로 그때, 유이헌 과장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변호사님, 남수지 씨 매니저가 찾아오셨는데요.”
“남수지? 배우 남수지?”
“네.”
“왜?”
“악플러들 대응 관련해서 상담하실 게 있어 김 변호사님을 찾아오셨다는데, 김 변호사님이 지금 서 변호사님하고 법원 가셨어요.”
“그래?”
“약속 없이 찾아오신 거기는 한 건데, 그냥 다음에 오시라고 할까요?”
“음···아니, 내가 만나보지 뭐. 회의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해.”
“네.”
*
5분 뒤,
회의실.
“안녕하세요. 윤정도 변호사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재킷을 걸친 정도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던 송세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송세연 역시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악성댓글 대응 관련해서 상담하실 게 있어 오셨다고요?”
“네. 아, 근데 김아인 변호사님은 사무실에 안 계시나 봐요.”
“네, 지금 법원에 갔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다. 김 변호사 담당 사건이기는 하지만 저희끼리는 사건 공유를 하고 있어서요.”
“아, 네···.”
아쉬웠다.
사실 그녀가 찾아온 진짜 이유는 김아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으로는 실물이 얼마나 닮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고, 수지를 위해서 쌍둥이 여동생이 일하는 곳을 알아가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죄송해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세연은 준비해간 추가 악성댓글 목록을 정도에게 건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을 청했다.
그렇게 30분쯤 건성으로 상담을 받은 세연은 나가기 전 정도에게 물었다.
“혹시 김아인 변호사님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계신가요?”
“네.”
“그러면 그분 성함이 김아리인가요.”
“그렇게 알고 있는데···왜 그러시죠?”
“아, 다름이 아니고, 사실 예전에 수지가 다녔던 헤어샵에 김아인 변호사님 동생분께서 일했었던 것 같아서요.”
“그런 인연이 있으셨구나.”
“네. 저희도 이번에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래서 반가운 기분에 예전 번호로 연락해봤는데, 전화번호가 바뀐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만나 뵙고 직접 여쭈어보려고 했는데···.”
“제가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아, 진짜요?”
“네. 그게 뭐 어려운가요. 김 변 들어오면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수지가 헤어샵을 바꾸고 싶어 해서···. 연락이 닿으면 진짜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들어오면 바로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
같은 날, 오후.
정도는 법원에서 돌아온 아리의 방을 노크했다.
똑똑똑-
“네.”
“기일은 어땠어? 잘했어?”
“네. 저는 그냥 옆에 앉아만 있었어요. 서 변호사님이 다 하셨고.”
“원래 막내는 관찰이 일이야. 근데, 서 변호사님은?”
“케이 엔터 이 대표님 만나고 들어 오신다고 가셨어요.”
“그랬구나.”
잠시 머뭇거린 정도는 원래 하려 했던 말을 꺼냈다.
“김 변, 나 사실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네.”
“남수지 악플러 건 나 주면 안 될까?”
“남수지 악플러 건이요?”
“응. 솔직히 이야기할게. 내가 무슨 사심이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고. 알잖아, 김 변도. 나 남수지 씨 팬인 거.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그게 바로 사심 아닌가요?”
“에이- 내가 또 뭐 만나서 채신없게 치근덕거리거나 그러지는 않지. 그냥 정말 순수한 팬의 마음으로···. 악플들을 읽고 있으니 내가 진짜 마음이 아파서 그래.”
“흠, 불안한데.”
“뭐가? 나 못 믿어?”
“그랬다가 막 고백하고 그러시는 거 아니죠?”
“야, 김! 나를 어떻게 보고 진짜.”
“농담이에요, 농담. 대표님만 오케이 하시면 저는 상관없어요.”
“오케이. 선배님한테는 내가 말할게. 땡큐, 땡큐. 내가 언제 술 한번 살게.”
“됐어요. 사건 덜어주시는 건데요 뭐.”
“에이- 그래도. 김 변이 잘 해결한 일인데. 선배로서 그냥 꽁으로 가로챌 수는 없지.”
“알았어요. 잘해보세요.”
“어허- 아니라니까. 나 진짜 잘해보고 그럴 마음 없다니까.”
“크큭.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사건 잘하시라고 드린 말씀인데.”
“아- 그런 의미였어.”
“네.”
많이 친해진 둘. 가끔 이렇게 놀리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정도의 다음 말에 아리는 더 농담할 수가 없었다.
“아, 맞다. 김 변 동생분 지금 어디서 일하셔?”
“네? 갑자기 제 동생은 왜···?”
“아니, 어제도 최 부장님 따님 오셔서 김 변 동생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은 또 수지 님 매니저가 와서 물으시데. 김 변 동생분이 그렇게 실력이 좋다며?”
“아, 네···뭐···그런가 봐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수지 씨가 찾는대, 동생분을.”
“제 동생을? 왜요?”
“얼핏 들으니까, 헤어샵을 바꾸려는 것 같던데, 동생이 일하는 데로. 매니저분이 물으셨어, 혹시 동생분 연락처 좀 얻을 수 있는지.”
헉.
“김세아 매니저가요?
“아니. 내가 오늘 만난 분은 송세연 실장님. 최근에 바뀌었대. 예전 소속사에서 같이 일하셨던 분이라고 하던데.”
송세연 실장님···.
당연히 기억한다.
“아, 그래요.”
“그래서, 동생 지금 어디서 일해? 연락처 주면 내가 전달할게.”
“아니요. 동생 지금 일 안 해요.”
“그래? 어제 사무장님 따님 말은 샵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최근에 그만뒀어요.”
“그래? 왜?”
“적성에 안 맞는다고.”
“진짜? 그렇게 실력이 좋은데?”
“···네.”
“그럼, 아예 그만두신 거야? 헤어 쪽 일은 이제 안 하는 건가?”
“네.”
“아, 그래···. 쩝.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연락처 좀 줄 수 있어? 송세연 실장이 개인적으로 되게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고.”
예전 샵에서 일할 때 종종 마주쳤던 분.
그때마다 연예계 데뷔할 마음 없냐고 물으셨던 분.
상황이 진짜 안 좋을 때 전화까지 드렸었는데.
좋으신 분이지만 피할 수 있다면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딱히 연락처를 주지 못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실장님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동생한테 연락 한번 드리라고 할게요.”
“그래. 그게 더 낫겠다. 내가 창현이한테 명함에 있는 연락처를 김 변에게 주라고 할게. 오케이, 그럼 남수지 님 사건은 앞으로 내가 하는 거로. 고마워.”
‘아니요, 제가 고맙습니다.’
정도가 나가고 아리는 곧장 케이 엔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다.
송세연 실장의 사진을 찾아보지만, 정말 최근 바뀌었는지 정보가 없다.
‘어쩌지?’
자꾸 아리의 사람들과 아인의 사람들이 엮이기 시작한다.
상황이 난감해질 것 같다.
---*---
결혼정보회사 <세렌디피티>.
“도정인 회원님, 이분은 어떠세요? 키는 좀 작은데, 외모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직업이 변호사라서 같은 전문직이라 두 분이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정인은 매니저가 내미는 프로필을 봤다.
“괜찮아 보이네요.”
“그럼 어떻게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