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캉스에서 벌어진 일 (2)
“내가 한 말 기억해?”
푹신한 호텔 침대 위,
남자를 향해 돌아누운 여자는 그의 가슴 위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물었다.
“다음번에 또 우연히 마주치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는 말.”
어젯밤, 서지우는 바(bar)에서 레이철을 만났다.
“이것도 우연인가?”
“왜? 내가 그 바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해?”
“회사에서 맨날 만나는 사람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뭐? 하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못된 남자네.”
“그 말도 했었어.”
“기억하는구나!”
“로맨티스트는 아니지만,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서.”
여자는 순간 남자 위로 올라탔다.
적당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 가려 더 자극적이다.
“우리 만나보는 건 어때?”
예전 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서지우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궁금하기도 했고.
운명 따위를 믿지는 않지만, 세 번의 ‘하룻밤’을 통해 뭐가 맞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 결혼한 적이 있어.”
남자의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지금까지 재치 있었던 여자는 적당한 대답을 바로 찾지 못했지만, 실망하거나 놀란 것은 아니었다.
“진실을 털어놓는 시간인가? 그러면, 흠···, 나는 두 남자랑 해본 적 있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서지우는 그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다.
“누가 결혼하자고 했어? 만나보자고 했지.”
“가끔 이렇게 만나자는 게 아닌 거 같아서.”
“여자랑은 결혼 아니면 섹스, 둘 중의 하나만 하는 거야?”
돌이켜보니 그래 온 거 같다.
“하하.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런가 보네.”
뭐가 그녀를 동하게 했는지, 갑자기 눈이 반짝거린 그녀는 서지우의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못 움직이기 게 만들었다.
“나 당신이 맘에 들어. 유부남이 아니라면 계속 만나고 싶은데, 확실하게 말해. 결혼한 적이 있는 거지, 결혼한 상태는 아닌 거지? 이혼 중이거나 별거 중. 이런 것도 안 돼. 구질구질한 거 딱 질색이야.”
“그런 너는?”
“결혼? 약혼도 해본 적 없어. 아, 청혼은 받아봤다. 자, 이제 대답해.”
“싱글이야.”
“오케이. 그러면 오늘부터 1일?”
피식-
“왜 웃어?”
“그냥. 이런 자세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겨서.”
“그럼, 이 자세는 어때?”
레이철 고는 잡고 있던 팔을 풀고 밑으로 내려갔다.
---*---
치익-.
맥주캔 따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짠-.”
꼴깍, 꼴깍, 꼴깍-
“캬-. 좋다.”
호텔 방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
수영장에서 마셨던 칵테일에서 느낄 수 없는 청량함이 있다.
“야, 그냥 같이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정인은 수영장에서 말을 걸어온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지 그랬어? 남자 못 만난다고 투덜대더니만.”
“그러는 너는? 너는 왜 아무 말 안 했는데?”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하려고 했지.”
“뻥치시네. 자기도 안 가려고 했으면서.”
둘 따 쑥스러워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리가 놀리면서 말했지만, 아리한테 말을 걸었어도 결과는 똑같았다.
“우리는 왜 이런 것도 못 할까? 남들은 잘만 하던데. 내 동기는 남자 만나고 싶으면 그냥 클럽 같은 데 혼자 간대, 그러면 남자가 와서 말 건대. 솔직히 나더러 하라고 하면 못하겠는데, 그런 이야기 들으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자유로움이. 넌 안 그래?”
“부러우면 해보면 돼지.”
“무서워. 이 나이 돼서 그렇게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렵고.”
“이 나이가 어때서?”
“그렇지? 우리 나이가 어때서! 가즈아-!”
“짠-!”
다시 한 모금 넘기는 시원한 맥주.
좀 전만큼 얼어붙는 듯한 청량함은 없지만, 맛은 더 좋다.
“우리 짝은 어디 있을까?”
얼굴의 발그스레해진 정인이 창밖의 달을 보며 물었다.
“너 진짜 결혼하고 싶은가 보다.”
“아니, 사랑이 하고 싶어. 가슴 떨리는 거.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만 나서 5초마다 전화기 체크하는 거. 그런 거 하고 싶어. 우리 언니 보니까 결혼하고 2년 만에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변하더라.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인데도 저렇게 되는 거라면, 나도 결혼 전에 찐하게, 정말 찐하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냥 ‘조건 맞춰서 우리 결혼하죠’ 하는 거 말고.”
“그런 애가 아까 훈남의 제안을 거절하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 사람 만나는 거야?”
“내 말이. 근데 그거 알아? 막상 그런 만남의 기회가 오잖아 두렵다. 이 사람이 누구지? 나한테만 이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겠지?”
“결혼정보회사 등록한 사람이라고 다르겠냐?”
“알아. 근데 거기는 생년월일도 확인해주고 부모, 집안, 직장, 학벌 다 확인해주잖아.”
“뭐어? 생년월일? 야!”
“나도 알아. 근데 아까처럼 갑자기 다가와서 말거나 남자가 몇 살인지, 유부남인지, 애인이 있는지, 심지어 전과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야, 도정인, 너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됐어?”
“몰라. 늙었나 봐. 예전에는 얼굴만 봤는데, 나도 이렇게 됐다. 그래서 어렸을 때 많이 만나 봤어야 했는데···. 의사 되겠다고 머리 빠지게 공부했더니 벌써 서른이야. 흑흑. 내 젊음 돌려줘.”
“왜 자꾸 나이 타령이야. 벌써 취했어?”
“외로워서 그래, 외로워서.”
“야, 너 자꾸 나 옆에 두고 외롭다고 할래?”
“미안. 내 친구.”
“마시기나 하셔.”
“그래, 마시자. 짠-.”
“짜안-.”
그냥, 친구 앞이니까 하는 넋두리일 뿐.
말은 외롭다고 해도 오랜만에 친구와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참 좋다.
“야, 너 또 이런 거 다 기억해서 나중에 내 남편 앞에서 말하지 마라.”
“할 건데.”
“너 그럼 죽어.”
“어디 보자, 니가 중학교 때, 이정수랑 결혼하겠다고 정수 머리카락을 뽑아서 한밤중에 물 떠넣고 식칼이랑···.”
“야! 김아리!”
까르르-
온종일을 같이 있었는데도 이야깃거리가 멈추지 않는다.
아리는 오랜만에 자유롭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제는 도시도 어느 정도 어두워졌다.
시티라이트에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운명도 저렇게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
“그러다 이렇게 깜깜해지면 나타나겠지?”
“···그렇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
띠리리라라랑- 띠리리라라랑-
휴대폰 알람 소리.
침대 머리맡 어디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든다.
한쪽 눈을 겨우 떠 시각을 확인한다.
“정인아, 나 가봐야 해.”
“몇 신데?”
“여덟 시.”
“으으- 오늘 정말 출근해야 하는 거야?”
“응.”
아리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정인도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너는 더 자.”
“싫어. 나도 그냥 갈래. 혼자 체크아웃하는 것도 싫고. 지금 같이 나가면 아침 같이 먹어줄 거지?”
“당연.”
“그럼, 씻어. 나는 너 다 씻으면 그냥 나갈래.”
“알았어. 그럼 나 씻고 나올게.”
---*---
같은 시각,
같은 호텔.
다른 방.
“몇 시야?”
남자가 옆에 누워있지 않은 걸 눈치챈 여자는 실눈을 뜨고 방안을 확인했다.
“여덟 시.”
“Oh My God. Seriously?”
“더 자.”
“그리고 도망치려고?”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의도가 아닌데 꼭 그렇게 언제든 도망갈 사람처럼 다 입고 있어야 하는 거야?”
“습관이라서.”
“오케이, Got it. 얼리버드 타입이라 이거지? 난 아닌데.”
“커피 사 오려고 했어.”
“음-. 커피 맛있겠다.”
“자고 있어. 사 올 테니까.”
“좋은데. 스위트한 면도 있고. 가지 마.”
“흠- 난 커피가 필요한데···.”
“같이 가.”
여자는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뭐지?”
“왜?”
“그냥 분위기가 달라진 거 같아서.”
“내 남자 앞에서는 부끄러움 탈 줄도 아는 여자야.”
외모만으로 분명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알아보면 다른 매력도 있을 것 같다.
“오 분만 기다려줘. 금방 씻고 나올게.”
어쩌면 그녀랑 연애라는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호텔 방을 나서려던 지우는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
조선팰리스호텔,
엘리베이터 앞.
“잘만 어울리는구먼, 뭘.”
아리를 따라 나온 정인은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고마워.”
“아리야.”
“응?”
“너 진짜 등록 안 할 거야?”
“안 해.”
“하자. 하면 좋겠구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정인은 어제 하던 결혼정보회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설마, 너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없어.”
“하긴 있었으면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동안 문자가 왔겠지. 그니까, 하자. 응?”
“싫어.”
“에잇, 나쁜 기집애.”
“뭐야, 갑자기 왜 또. 내가 브런치 사줄게.”
“진짜? 헤헤.”
그렇게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가자···.”
라고 신나게 대답하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던 순간, 아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는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
조선팰리스호텔,
엘리베이터 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레이철이 그의 볼에 키스하자, 서지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이런 거 싫어하나?”
“싫어한다고 하면?”
“안 하지.”
싫어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좀 어색할 뿐이다.
“하지만 생각 잘하고 말해. 한번 싫다고 하면 영원히 안 해줄 거니까.”
“그럼, 생각하고 말해줄게.”
이제 레이철이 그를 바라봤다.
“왜?”
“흥미로워서.”
흥미롭다는 말에 왜냐고 묻지도 않는다.
“어쩌지? 네가 많이 좋아질지도 모르겠어.”
“결혼하자고만 하지 않으면 돼.”
“하하하. 전 부인에게 얼마나 데었길래 그러는 거야?”
“전 부인들.”
“전 부인···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원하면 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각자 갈 길로 가도 돼.”
“흠···.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네.”
레이철은 서지우에게 더 바싹 붙었다.
온몸이 붙은 채로 그에게 키스하려는 순간,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그리고,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아리를 보고 그 역시 얼어버렸다.
“김···변호사?”
부른 것이 아니었다. 놀란 나머지 그냥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아리야, 안 타?”
뒤에 서 있던 정인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묻자, 아리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모르는 척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서지우는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아리의 얼굴을 살폈다.
“Who? 아는 사람이야?”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레이철이 물었지만, 서지우는 대답 없이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닫기 전에, 아리를 향해 물었다.
“김아리 씨이신가요?”
“네?! 아, 네···. 누구시죠? 저를 아시나요?”
“혹시 쌍둥이 오빠가 있으신가요?”
“네···. 오빠를 아시나요?”
아리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