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33)

호캉스에서 벌어진 일 (1)

“이모님, 죄송해요. 염치없게 또 주말에 부탁드리고.”

“아우, 아니야. 어차피 할 일도 없었어. 집에서 드라마나 보려고 했는데, 여기 와서 보면 나야 좋지. 돈도 벌고 드라마도 보고.”

“그럼 편히 보세요. 아, 그리고 라면 드시지 말고 시켜 드시고 싶은 거 시켜 드세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친구랑 잘 놀다 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저 서울에 있으니까, 금방 올 수 있어요.”

“일은 뭐가 있어.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한테. 오빠 걱정말고 편히 다녀와. 알았지?”

“감사합니다.”

토요일 오후, 아리는 이모님께 오빠를 맡기고 정인을 만나러 홍대로 향했다.

---*---

“아리야, 여기!”

젊은 학생들과 커플들이 북적거리는 홍대의 한 카페 안으로 아리가 들어오자, 이미 와 있던 정인이 손을 흔들었다.

“어우- 기집애,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예쁘긴 무슨···.”

“근데 머리는 계속 염색하는 거야?”

“응? 아니. 이거 가발이야.”

“진짜?”

“응.”

“와- 완전 감쪽같다. 나 진짜 속았어. 요새 가발 진짜 잘 나오는구나.”

오기 전 고민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데, 가발을 계속 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밤에 잘 때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들키게 되면 상황이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냥 말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판단이 섰다.

“근데 가발은 왜? 패션?”

“단발병이 와서 머리를 잘랐는데 아무래도 별로인 거 같아서.”

“왜? 너 단발 잘 어울리잖아.”

“그냥.”

“좀 있다가 호텔가서 보여줄 거지?”

“응.”

뭐랄까, 고작 헤어스타일 하나 고백했는데 마음이 편하다.

오랜만에 아리 자신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자, 이게 내가 오늘 짠 플랜.”

“헉, 이걸 다 오늘 안에 다 가자고?”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고, 힘들면 뺄 거 빼고.”

“호캉스라며? 호텔에서 쉬는 거 아니었어?”

“어차피 체크인 세 시 넘어서라서 목표는 다섯 시쯤 들어가서 풀사이드에서 시켜 먹는 거야. 어때?”

“뭐어? 그러면 여기 있는 가게들을 네 시간 안에 다 돌아보겠다고?”

“말했잖아. 움직이다 지치면 바로 택시하고 호텔로 고고.”

“그래, 해보자.”

“자, 일단 여기서는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먹어봐야 한대. 점심 안 먹고 왔지?”

“응.”

---*---

토요일 오후, 서지우는 이동주 대표를 만나러 케이 엔터테인먼트 빌딩을 찾았다. 배우 한윤정의 할리우드 진출 건 관련으로 급하게 법률 자문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었다.

“추가 촬영 조항을 제외하고는 다른 조항들은 괜찮습니다. 현재 몇 번의 추가 촬영이 있을지 모르고, 향후 스케줄 조정이 어려울 수도 있는데, 현재 계약서 문구는 스튜디오의 추가 촬영 요청이 있을 시, 그러한 요구에 무조건 응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가능한 한 요구에 응한다.’ 정도로 바꾸는 것이 좋은 듯싶습니다.”

계약서 수정 사항을 검토한 서지우가 말했다.

“고마워, 서 변. 쉬고 있었을 텐데,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고.”

“아닙니다.”

“윤정이 지금 LA에 있어. 작년에 오디션 테이프 보낸 게 안 될 줄 알았는데, 됐다고 연락이 와서 며칠 전에 갔어. 내가 같이 갈까 하다가 박 팀장이랑 보냈는데, 덜컥 계약하자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역시 믿을 때는 서 변호사밖에 없어. 우리도 볼 계약서가 많아져서 사내 변호사를 뽑았는데, 영 믿음이 안 가. 검토하라고 줬더니, 스펠링 체크를 하고 앉아있더라고.”

일 년 전쯤 사귀던 남자 동료 배우에게 배신당하고 머리를 쇼트커트를 친 것이 화근이 되어 로레나 사(社)로부터 90억 손해배상을 당할 뻔했던 그녀.

배우로서는 천운이 따르는 여자였나보다.

마블 픽처스(Marble Pictures)에서 새로운 히어로물 시리즈에 출연할 머리가 짧은 동양 여자배우를 찾고 있었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처럼 이 대표가 그냥 한번 보내본 사진이 발탁되어, 계약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한윤정에게 배우자로서 기본기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전 세계 수백 명이 보낸 사진 중에서 그녀의 사진이 뽑힌 건 분명 운이 따라서였다.

“아무튼 계약 체결되면 추가로 물어봐야 할 것들이 있을 것 같아. 어찌 됐건 우리가 그쪽 매니지먼트 일까지 봐줄 수는 없어서, 아마도 에이전시 계약도 체결해야 할 거고.”

“언제든 연락해주십시오.”

“언제나 든든하단 말이야. 확실히 돈값을 해.”

이동주는 대형 로펌보다도 서지우를 신뢰했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근데, 서 변호사는 연애 안 해?”

“하는데요.”

“아, 해? 나는 또···. 하긴 하겠지, 서 변호사 같은 사람이 연애를 안 할 리가 없지. 누구? 설마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은 아니겠지? 그러면 곤란해?”

농담이었다.

서지우도, 이동주도.

신인 가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이제 막 데뷔한 사람이라 인지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관계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 연예인은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불편함이 싫은 서지우였다.

그 신인 가수는 지금 대한민국이 다 아는 유명 가수가 되었다.

“농담이야. 솔직히 서 변호사 같은 사람하고 사귄다고 하면 내가 무조건 잡으라고 하지. 근데 왠지 느낌이 서 변호사는 유명인하고 사귀는 걸 안 좋아할 것 같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 참 재미없기는···. 알았어. 또 연락할게.”

“네.”

서지우가 케이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나왔을 땐 땅거미가 슬슬 깔리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갈까 했던 그는 방향을 돌려 그가 좋아하는 바(bar)로 향했다.

---*---

조선팰리스호텔, 수영장.

“주문하신 칵테일하고 케이크 나왔습니다.”

깔끔하게 생긴 호텔 직원이 벤치 옆 테이블 위에 술과 디저트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정인은 아리의 팔을 툭 쳤다.

“잘생겼다.”

“누구?”

“방금 나간 직원.”

“왜? 말이라도 걸어보게?”

“걸어볼까?”

“미쳤어.”

“아, 진짜 미치겠어. 그냥 대학병원에 있을 걸 그랬어.”

“일 많아서 싫었다며?”

“싫었지. 교수도 싫고 선배도 싫고. 요새 사람들은 대학병원 하면 다들 무슨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떠올리던데, 야, 나도 그런 병원 있으면 다니고 싶다. 99즈 같은 교수님 중의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내가 뼈를 묻었다. 근데, 조정석 너무 귀엽지 않니? 나도 그런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 잔망미 넘치는.”

“병원 얘기하다 말고 잔망미는 또 뭐야?”

“아니, 다 싫었어도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남자 사람이라도 좀 만났는데, 이건 개인병원 하니까 일주일 내내 보는 사람이 병원 직원들 아니면 환자밖에 없어. 미치겠어. 이러다가 나 연애도 못 하고 죽을 건 가봐. 아- 진짜 사랑이 하고 싶다. 미치도록.”

“풉.”

“왜? 왜 웃어?”

“누가 떠올라서.”

“누구?”

“우리 회사 사람.”

“왜 너희 샵에 나 같은 사람 있어?”

“응? 응.”

아리는 정도를 떠올렸다.

“야, 나 진지해.”

“환자 만나.”

“그건 노.”

“왜?”

“병원 의사가 환자한테 추파 던진다고 소문 나봐라. 그건 절대 노.”

“송강이 피부관리 받으러 오면?”

“그러면 무조건 잡지. 병원 접는 한이 있어도 잡지.”

“남주혁은?”

“나 울어버릴 거야.”

“송중기는?”

“어우야- 상상만 해도 행복해 죽을 거 같아.”

꺄르르-

오랜만에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

그 철없던 시절 세상 눈치 보지 않고 낼 수 있던 웃음소리가 나온다.

“아- 좋다.”

“여기 좋지?”

“응. 여기도 좋고, 너랑 있는 것도 좋고.”

“나도.”

이것저것 떠들던 정인은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아리야.”

“응?”

“그때는 내가 미안해.”

“응? 뭐가?”

“그때 도와달라고 했을 때, 못 도와줘서.”

“아니야. 너도 여유가 없었잖아.”

“그래도 네 오빠랑 엄마가 사고를 당해서 그런 거였는데···. 내가 이기적이었어. 미안해.”

“됐어. 저번에 사과했잖아.”

“그래도···계속 마음에 걸려.”

“그때는 나도 이상했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 그 일은 잊자.”

“고마워.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고맙기는 뭘.”

“그럼 이제 아인이는 괜찮은 거지?”

“응? 응.”

“로펌에 다닌다고 했나?”

“···응.”

“어디?”

“그냥 작은 데.”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아인이가 깨어서 나서. 안 그러면 네가 진짜 고생했을 텐데.”

“······.”

아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수영장 물에 반사된 빛에 정인이는 눈치채지 못한다.

“나 고백하나 할게.”

“무슨 고백?”

“크크큭.”

“왜 웃어?”

“크큭. 나 사실 결혼정보회사 등록했다.”

“뭐어? 진짜?”

“응. 아는 선배 언니가 거기서 지금 남편을 만났거든. 근데 괜찮더라.”

“선배 언니가 몇 살인데?”

“서른여섯.”

“너는 아직 서른하나잖아.”

“벌써 서른하나겠지. 흑흑, 말했잖아. 남자 만날 때가 없다고. 그 언니가 그러는데, 전문직 여성은 인기가 없대. 웃기지 않냐? 전문직 남성은 인기가 많으면서 전문직 여성은 인기가 없다는 게?”

“전문직 여성은 왜 인기가 없대?”

“몰라. 남자들이 싫어한대.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그래서 삼십 대 미혼 전문직 여성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조건을 맞춰서 만나는 게 훨씬 잘 맞는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그 선배 언니의 조언이었어. 들어보면 은근 설득력 있는 말이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언니는 진짜 괜찮은 형부를 만났고. 그래서 나도 그 언니가 등록했던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했지, 흐흐흐. 너도 할래? 친구 소개하면 30% 디씨해준다고 했는데.”

“나는 패스할게.”

“왜에- 같이 하자.”

“그러다 같은 남자한테 우리 둘 다 꽂히면?”

“에이- 설마.”

“모르지.”

아리와 정인이 정신없이 떠드는 사이, 창밖으로는 어둠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반대편 쪽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던 남자 중의 한 명이 다가왔다.

“저기···, 혹시 두 분이서 오셨나요?”

“네?”

“저희도 둘이 왔는데···.”

이것은 말로만 듣던 헌팅?

---*---

바 어나니머스(Bar Anonymous).

“오랜만이시네요.”

오랜만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돌아온 이후로 처음이니까.

“베스퍼, 한잔.”

주문을 받자마자, 웨이터는 그를 위해 제임스 본드의 칵테일을 만들어 내었다.

삼각형 잔에 담겨나온 투명한 음료. 마지막으로 올린 레몬 껍질에서는 나는 상큼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그 청량한 술을 한 모금하고 주위를 쓱 돌아보는데,

“사람이 많네?”

“요새 좀 손님이 많아졌어요.”

“어디 소문이라도 났나 보지?”

“그런가 봐요.”

아직 이른 저녁이라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다.

고개를 돌려 한 모금 더 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혹시 빈자리인가요?”

아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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