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33)
  • 잡는 김에 대가리까지 (2)

    불법 비자금을 이용해 MJ 엔터테인먼트 지분을 사 모은 것이었지만, 해당 지분을 바탕으로 한 권리를 금하려면 법적으로 절차가 까다로웠다.

    썩어도 준치라고 비록 유죄가 확실시되는 현 상황에서도 그의 추종 세력은 남아있었고, 그에게 겁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여정남 회장을 확실하게 은퇴시키려면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띠리링- 띠리링-

    “응.”

    -대표님, 법무법인 해결에 서지우 변호사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서지우는 <에이스인베스트먼트> 차병호 대표를 만나러 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여가네 식구 다음으로 MJ 미디어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창업투자사 <에이스인베스트먼트>.

    그곳의 대표, 차병호.

    여정남 회장과의 인연으로 MJ 미디어에 투자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인연에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솔직히 차병호는 여정남의 경영에서 손을 뗐으면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래서 작년에 여정남이 투옥될 때 여 씨 남매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문제는 큰아들 여혜성이 잘나가는 회사를 유지할 정도의 능력만 있을 뿐 지금 같이 위기의 순간에 헤쳐나갈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또한, 여정남 회장이 이번에 중원시 시의원에 출마하는 동생을 볼모로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압박을 넣고 있는 상황.

    차병호는 이참에 아예 MJ 미디어에 한 투자금을 회수할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그를 찾아온 남자가 제안했다.

    “여혜린 대표를 밀어주시겠습니까?”

    차병호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확실히 오빠 여혜성보다는 강단이 있고 회사 대표로서 자질도 있어 보인다. 현재 그녀가 수장으로 있는 MJ 엔터테인먼트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그녀가 과연 MJ 미디어 그룹 전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장악력이 있느냐였다.

    엔터테인먼트 자회사 하나를 운영하는 것과 그룹 전체를 운영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비록 여혜성이 여동생보다 자질은 떨어질지언정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여정남에게 경영인 훈련을 받은 사람.

    8, 90점을 노리고 70점짜리 카드를 버리기에는 망설임이 있다.

    “내가 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죠?”

    차병호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생각이나 한번 들어보자는 취지.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부탁을 하러 온 줄 알았다.

    “동생분께서 이번에 중원시 시원에 출마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여정남 회장이 쥐고 있는 것이 많은가요?”

    어투는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이미 그렇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협박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래, 협박이 아니다. 방금 한 말은 자신이 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레벨 1짜리 질문에 답을 레벨 9짜리 질문으로 대신한 것이다.

    “재미있는 변호사님이시네요.”

    “그럼 하려던 말을 계속해도 될까요?”

    잠깐 경직되었던 차병호는 표정을 풀고 그러라는 눈짓을 보냈다. 달라진 게 있다. 처음에는 ‘웬 변호사가 나를 찾아와서···’라는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미소속에서도 진지함이 엿보인다.

    서지우가 할 말이 궁금하다.

    “창업주가 저런 꼴을 하고 있는데, 당장 그룹 경영자 자리를 바꾸면 주가나 경영 모두에 있어 좋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건, 몇 년 뒤,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를 여혜린 대표를 믿어봐 달라는 의미입니다.”

    “변호사라면서 그런 의미 없는 제안을 하러 온 건가요?”

    “때로는 계약서를 내미는 것보다 이런 식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으니까요.”

    차병호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변호사라고 해서 법이라는 테두리에 꽉 막혀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여정남 회장 다시 구속될 겁니다.”

    “마치 정해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불가피한 일이니까요.”

    “내가 여정남 회장이 무서워서 여정남 회장 편에 선 거로 생각하는 건가요?”

    “그랬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변호사이시니까 더 잘 아시겠죠. 여정남 회장이 구속돼도 그분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통한 권리 행사를 막을 방법은 없어요. 비자금을 모은 지분을 제외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혜성 사장은 4~5년 뒤, 여정남 회장이 나왔을 때 지금처럼 또 휘둘릴 거니까요.”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래서 차병호는 여혜성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늙은 호랑이가 돌아왔다고 자신의 굴을 내주는 새끼는 왕좌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

    “여혜린 대표는 그렇지 않을 거다?”

    “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애초에 여정남 회장 비자금 파일을 넘긴 사람이 그녀이니까요.”

    흠칫.

    차병호는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내부자, 그것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소행이라는 것쯤은 그도 추측했지만, 딸이 그랬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번에 여 회장을 다시 구속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검찰에 넘긴 것도 여 대표입니다.”

    차병호는 말을 끝낸 서지우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여혜린이 한 게 아니다. 이 남자다. 결정적인 증거를 검찰에 넘긴 거도, 이 판을 짠 것도.’

    차병호는 자신 앞에 찾아온 남자가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드바이저, 앞으로 진행될 그림을 그에게 보여주고 무슨 수를 두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

    그는 조언을 하러 온 것이었다.

    “서 변호사님.”

    “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여혜린 대표를 미는 이유가 뭐예요? 아, 여 대표가 ‘여혜성 사장보다 낫다.’ 하는 설명은 건너뛰죠. 그런 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니까. 나는 서 변호사님의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지우의 이유···.

    전 부인이라서?

    아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해서?

    아니다.

    “여정남 회장이 성추행한 피해자 중 한 명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의뢰인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저를 믿고 싸워달라고 했는데, 법원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직접 요리하는 수밖에.

    “그래서 지금 여정남 회장을 잡으려고 여혜린을 이용하는 거다?”

    “이용이 됐든, 공조가 됐든, 그건 조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조언을 받아들이실지 말지는 대표님에게 달린 것처럼요.”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해봤지만, 통하지 않는다. 젊은 나이치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대담하면서도 차분하다.

    “좋아요. 고려해보죠.”

    “감사합니다.”

    “약속은 아니에요. 비록 싹이 보인다고 해도 여혜린 대표가 그룹 대표 자리에 앉으려면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주들에게도 증명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렇다면 증명할 기회를 대표님께서 주시는 건 어떨까요?”

    드디어 나왔다.

    서지우가 차병호를 찾아온 이유.

    “하하하. 지금 나더러 MJ 엔터에 투자해서 여혜린 대표의 경영권을 보호해달라고 하는 건가요?”

    “여정남 회장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획득한 지분은 일단 MJ 엔터가 자사주 형태로 회수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신규 OTT 사업 확장 및 콘텐츠 확보를 하느라 회사 내 보유금이 부족한 상황이라···.”

    “새 투자자가 필요하고, 여 대표 지분만 가지고는 방어가 쉽지 않으니까, <에이스인베스트먼트>가 MJ 엔터의 백기사가 되어주는 거 는 게 어떻겠느냐?”

    기막힌 프레젠테이션이다.

    처음부터 와서 MJ 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해달라고 했으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변호사는 그가 걱정하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는 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MJ 엔터로 이끌었다.

    걱정하는 미래를 대비하려면 MJ 엔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

    지독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좋아요. 서 변호사님의 조언 받아들이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동생분 선거에 여정남 회장이 개입하지 못할 겁니다.”

    고작 작은 법무법인의 대표로 있는 변호사가 무슨 수로 이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지만, 차병호는 그를 믿어 보고 싶다.

    “솔직히 그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기대는 할게요. 만약···.”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제가 오늘 드린 조언들도 다 신뢰성을 잃게 되겠죠.”

    서지우가 돌아가고, 차병호는 그가 남긴 명함을 유심히 내려다봤다. 참, 갖고 싶은 변호사다.

    ---*---

    띠리링- 띠리링-

    -어떻게 한 거야?

    차병호 대표와 만나고 돌아가는 길, 여혜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기된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가 떠나고 차 대표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나자고 했을 때는 바쁘시다고 연락도 안 됐는데. 진짜 어떻게 한 거야?

    “이제 기회를 얻은 거뿐이야. 아버지 없이 그 자리 지키려면 지금부터 진짜 잘해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어디야? 사무실이야?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혜린은 서지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버지를 끊어내야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오빠와도 경쟁해야 하는 순간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혜린은 만나서 듣고 싶었다.

    “내일 회사로 찾아갈게.”

    -바빠? 이따 저녁에는? 저녁에 그 바에서 볼까? 네가 자주 가는 바(bar)?

    바쁘다. 마지막 양념이 남았다.

    “내일 오전에 찾아갈게.”

    잘라 낸 문어 다리를 요리 해야 한다.

    ---*---

    「구 변호사, 지금 아주 중요한 순간이야. 구 변호사가 어떻게 하느냐 따라서 앞으로 구 변호사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동기를 기다리던 구현탁은 며칠 전 밤 황재수 변호사가 갑자기 불러서 한 말을 떠올렸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구현탁은 파트너 변호사의 말에 설렜다.

    항상 자신이 엘리트라고 생각하면 살아왔는데, 막상 국내 최대 로펌에 들어오니, 자신은 그저 그런 평범한 존재보다도 밑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집안, 학벌, 성적, 그 어떤 면에서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인생 처음으로 자괴감이 들었다.

    그럴 때 받은 숙제.

    그런 그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의지 따위는 없었다.

    「김아인을 잡아야, 서지우를 잡을 수 있고. 서지우를 잡아야, 회장님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들겠어?」

    구현탁은 김아인을 기다렸다.

    그런데···.

    “구현탁 변호사?”

    “어···어···.”

    동기 대신 나타난 서지우를 보고 당황한 구현탁은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네. 누구시죠?”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한다. 전략적인 행동은 아니다. 그저 당황했을 뿐.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네? 어···잘 모르겠는데···누구시죠?”

    “좋을 대로.”

    서지우는 피식 웃고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준비해간 태블릿 PC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걸 왜 제게···?”

    태블릿 PC에는 구현탁이 김아리가 통화하러 간 사이 서류철에서 계약서를 꺼내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이 플레이되고 있다.

    구현탁은 이제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다.

    얼어붙은 얼굴 속 두 눈이 눈에 띌 만큼 떨리고 있었다.

    “구현탁 변호사.”

    “······네.”

    “앞으로 계속 변호사 일을 하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예요.”

    “······.”

    “들을 준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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