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33)

잡는 김에 대가리까지 (1)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회사 얻으려고 아버지 감옥까지 보냈던 사람이. 막상 아버지 진짜 민낯을 고발하는 건 못하겠어?”

“그때는···그래서 그때도 너한테 넘긴 거잖아.”

“지금 안 하면 당신 아버지 몇 년 안에 나와서 당신이 다 일궈놓은 빼앗으려 들 거야.”

“······.”

“내가 이걸 해도 사람들이 날 제대로 봐줄까? 더러운 아빠 딸이 아닌 진정한 경영인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그 어는 때보다 확신에 찬 서지우의 대답에 여혜린은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자기 아버지의 추태를 고발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

서초동 골목 어딘가에 숨어있는 장인의 중식당.

서지우는 여혜린이 사인한 진술서를 유성재에게 건넸다.

“이거 진짜야?”

“그럼 검사한테 위조 서류를 건넬까 봐.”

“이거 증거로 써도 되는 거야? 여혜린이 정말 제 아버지 성추행 사건 증인으로 나선다고 했어?”

“써도 돼. 단, 조건이 있어.”

“조건?”

“법원에 내지는 마.”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법원에는 내지 말라니?”

“그걸로 여정남 회장한테 자백받아.”

딸의 진술로 여정남 회장을 압박해 박선후 변호사의 사촌 동생인 박은영 성추행 사건의 자백을 받아내라는 의미.

“여혜린이 법정에 설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야?”

그런 수모까지 겪게 할 생각은 없다.

“응.”

“좋아. 대신 이 진술서 번복하지는 않겠지? 믿는다?”

“검찰이 언제부터 진술서 번복이 두려워서 일은 안 했어?”

“그냥, 그렇다고 해줘. 그래야 나도 위에 가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할 거 아니야.”

“조사도 부르지 마.”

“조사도? 야, 한 번 정도 조사는 해야지. 이런 종이 한 장 가지고 움직일 수는 없잖아.”

“지금까지 내가 준 거로만 움직였잖아.”

서지우의 말에 유성재는 할 말이 없다.

“여정남이 자백 안 하면, 조사는 그때 고려해볼게.”

“진짜지? 그럼 그렇게 보고한다.”

“설마 이미 준 것들하고 그리고 그 진술서 가지고도 자백 하나 못 받아내지는 않겠지.”

“에이- 약 주고 병 주는 새끼.”

“그러니까 일 좀 똑바로 해. 나 같은 영세 변호사 일 시키지 말고.”

“야, 우리는 보는 눈도 많고 규칙도 많아서 못 하는 거고, 너는 인마 자유롭잖아. 솔직히 우리가 어떻게 여혜린을 만나서 이런 걸 달라고 하겠냐?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상대가 김앤강이라서 쉽지 않아. 회장님 한번 부르기가 어찌나 힘든지.”

“살아있는 권력도 성역 없이 수사하는 검찰이라며?”

“그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오냐?”

틈새를 잡아 슬쩍 비꼬아 본다. 친구끼리니까 하는 이야기다.

“김앤강 사임할 거야.”

“지난번에도 그 얘기 하더니···. 진짜야? 무슨 수로? 쉽지 않을 텐데.”

김성무가 그렇게 결정할 것이다.

---*---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길래 정보라고 가지고 오는 것이 다 그 모양이야! 황 프로, 정말 일 이렇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혜린과 PSG 캐피탈의 거래가 페이크였다는 것을 깨달은 황재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단순한 변심인 건지, 아니면 다른 백기사가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왜 그런 페이크를 한 건지 알아내야 다음 수를 둘 수 있었다.

“강 프로, 어떻게 된 건지 좀 알아낸 거 있어?”

“담당 검사실에서 새로운 증거를 구한 거 같습니다.”

“새로운 증거?”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잘은 모르겠는데, 최근에 여 회장님께서 자금을 움직인 걸 포착했다는 것 같더라고요.”

황재수는 자신의 이마를 쳤다.

함정이었다.

이런 리스크가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복잡하게 설계해놓은 걸 누군가가 파악할 수 있을 줄이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 한 불가능했을 텐데···.’

“강 프로, 그 새로운 증거라는 게 뭔지 꼭 좀 알아봐. 중요해.”

황재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아는 인맥을 총동원했다. 검찰에 있는 후배부터 구정택 의원까지.

그러나,

똑똑똑-

그가 어떻게든 상황을 돌려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난 뒤였다.

*

“황 프로.”

“변호사님···.”

늦은 시각, 김성무가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요새도 이렇게 늦게까지 일해?”

“네? 아, 네. 급한 일이 좀 생겨서······.”

“이 사람 참, 젊었을 때도 그러더니만. 나이 생각해야지.”

“···네.”

지난 세기 유명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에 그런 대사가 있다.

「‘안녕’이라고 말한 순간, 당신은 이미 나를 설득했어요.」

우습게도 그 순간, 그 어울리지도 않는 그 대사가 떠올랐다.

“황 프로가 나랑 일 한지가 올해로 몇 년이지?”

황재수는 김성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여 회장님하고도 참 오래 알고 지냈는데 말이야.

시대가 많이 변했어.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바지 아랫도리 일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시대가 바뀌는 걸 우리 같은 노인네가 어찌할 수 있나. 바뀌면 바뀌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한번 바뀐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해봤자, 배만 뒤집힐 뿐이야.

그래도 여식 하나는 잘 두었잖아. 거기가 여장부야. 그렇지 않아?

이제 후배들을 위해 물러나야 할 때가 된 거지.”

황재수는 김성무가 지금 여정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 곤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황 프로.”

“네, 변호사님.”

“자네가 회장님 일을 얼마나 하고 있지? 혹시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관련된 거는 아니지?”

“······.”

황재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듣자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김성무가 모를 리 없었다.

애초에 그가 소개해준 의뢰인이었다.

자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지는 않았어도 여정남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여정남이 어떤 일들을 시켜왔는지 모를 리 없었다.

모른 척하고 있을 뿐.

“그래, 황 프로 자네가 그렇게까지 무모하지는 않다는 걸 내가 잘 알지.”

황재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좀 전 김성무가 한 말이 비단 여정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없는 이 조용한 시각, 김성무는 협박하러 온 것이었다.

조용히 나가라는 협박.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건물에서 보이는 경관이 참 좋아. 규제가 바뀌어서 지금은 높은 건물들이 많아졌지만, 그 시절만 해도 경복궁 안이 이렇게 잘 보이는 건 이 근방에서 이 건물이 유일했는데···. 그럼, 수고해, 황 프로.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고.”

걱정 아닌 걱정의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수장에게 차마 조심해서 들어가시라는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통했다.

거의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황재수는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지난 몇 주간의 결정들을 돌이켜봤다.

분명 최근에 오프쇼어 계좌들에서 자금을 빼내어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여혜린이 PSG 캐피탈에 지분을 넘기려는 정황을 발견해서였다.

‘그게 허수였어!’

허수((虛數)에 당한 거다.

그렇다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허수였을까?

“서지우···.”

황재수는 왜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한심스러웠다.

모든 전략이 그렇듯이 게임이 끝나고 나면 패배자가 할 수 있는 건 후회뿐이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다.

검찰이 보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많은 계좌 거래 중에서 진짜를 찾아내려면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 인력이 검찰 내에서 동원되었으면, 그의 귀에도 들어왔어야 한다.

‘후배 녀석이 정보를 주지 않은 걸까?’

그럴 리 없다. 녀석이 아니라도 그런 정보를 줄만 한 ‘귀’는 있으니까.

아무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서지우 혼자 했다는 것인데···.

“설마 해킹?”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의문들.

황재수는 아직 게임이 끝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지금 당장 사무실로 와.”

딸깍.

퇴근한 구현탁에게 다시 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린 황재수는 전화 한 통을 더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아이코- 변호사님-. 변호사님이 웬 일십니까? 이 시간에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어디 있나? 사무실인가? 잠깐 만나지.”

-지금이요?

“그래, 지금.”

-지금은 자주 가는 술집에 와 있는데···. 그럼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변호사님-?

“주소 문자로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변호사님하고 한잔하게 되네요. 그럼 바로 보내겠습니다-.

황재수가 통화한 사람은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진수였다.

어찌나 경황이 없었는지, 평소 존댓말을 쓰던 그에게 반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

대한민국이 완전히 부패한 게 아니라면 자신이 건넨 자료만으로도 여정남을 구속하기에는 충분했다.

횡령 및 배임 혐의는 물론이고, 성추행 혐의에도 순순히 자백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딸이 자신의 추행을 고발하는 역대급 사건이 일어날 텐데, 그거야말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행위였다.

이쯤 해서 백기를 들어야 5~6년 뒤 특별사면으로 나왔을 때, 그나마 재벌 그룹의 창업자답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김앤강 역시 황재수를 내칠 수밖에 없다.

비리 변호사 하나 감싸 안으려다가 로펌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

서지우는 김성무가 황재수를 버릴 거로 추측했고, 그의 추측은 맞았다.

다만, 그가 확신할 수 없는 건 과연 황재수가 순순히 포기할 것이냐였다.

똑똑똑.

“어, 들어와.”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왜?”

서지우가 황재수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막내 변호사가 들어왔다.

“구현탁 변호사한테서 문자가 왔는데요. 오서윤 씨가 다시 한번 저를 좀 만날 수 있냐고 연락해왔다고 하는데요.”

“김 변 동기가?”

“네. 이번에는 구 변호사도 함께 참석하겠다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게 된다.

서지우는 곧바로 느낌이 왔다. 지금 황재수가 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하는지 물어봐.”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이번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에 보자고 답이 왔습니다. 장소는, 저번에 커피숍은 옆 테이블 사람들 눈도 있고 그래서 불편했다고, 이번에는 조금 조용한 데서 봤으면 한다고···.”

무슨 수를 두려는지 빤히 보인다.

잠시 망설인 서지우는 결정을 내렸다.

잘려 나간 문어 다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을 것 같네. 김 변.”

“네, 변호사님.”

“구현탁 변호사랑 약속 잡아. 오서윤을 만나기 전에 상의할 게 있다고.”

“언제, 어디로 잡을까요?”

“당장 오늘 저녁. 그게 힘들면 내일이든, 모레든 아무 때나.”

“알겠습니다.”

“장소는 대충 아무 데나 편한 데로 정해. 금방 끝날 거니까.”

“···혹시 대표님도 가시나요?”

“내가 갈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