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3)

문어 다리 잡기 (2)

“김 변 어디 갔어? 어제부터 안 보이는 거 같은데.”

거미줄 위에 천 개의 물방울과 백 개의 기름방울을 떨어뜨린 후, 기름방울이 지나간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외부 출장 중이세요. 서 변호사님이 무슨 일을 부탁하신 것 같아요.”

“그래? 서 변호사님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중이고.

“대표님도 출장 중이세요.”

“무슨 건으로?”

“그건 저도 잘···.”

“뭐야, 나만 빼놓고.”

아리는 지금 국제전자센터의 어느 방에서 여정남의 비자금이 움직인 경로는 추적 중이다.

수백 통의 이메일과 수백 장의 엑셀 시트.

그리고 수천 개의 SWIFT 메시지.

눈이 빠질 것 같지만, 분명 그 안에 답이 있었다.

아리가 국전 창고에서 문서과 고군분투하는 동안, 서지우는 발에 불이 날 정도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다.

수십 명의 관계자.

대부분은 헛수고로 끝나지만, 분명 그중 증인이 있다.

둘은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백 퍼센트를 사용 중이다.

‘찾았다!’

---*---

일주일 뒤, 서초동 골목 어딘가에 숨어있는 장인의 중식당.

서지우는 유성재 검사를 만났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우리 사무실 변호사가 찾아낸 거야?”

유성재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서지우를 바라봤다.

“이걸 찾아냈다고? 혼자?”

사실 아리가 전부 찾아냈다고 했을 때 서지우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한두 개 정도만 찾아내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정남 회장의 비자금 500억 원의 행방을 모두 찾아냈다.

“쓸 거지?”

“당연히 써야지.”

서지우가 건넨 건 증거가 아니었다. 답안지였다.

이제 검찰은 아리가 찾아낸 경로를 따라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덕에 여정남 잡겠네.”

“내 덕이 아니야.”

서지우는 막내 변호사의 공로를 하나라도 빼앗을 맘 없다.

“그 친구 소개 좀 해줘. 검찰로 스카우트해가게.”

“죽어도 못 보내.”

“그냥 해본 말이야.”

두 친구가 농담을 주고받으면 웃는 순간, 주방에서 시킨 음식이 방으로 들어왔다.

새우 향과 기름 향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올라오는 볶음밥.

당장 한술 푸고 싶지만, 서지우는 식사 전 하나를 더 친구에게 건넸다.

「“네가 지금 만나러 가는 분이 어떤 분인 줄 알아?”

“···.”

“대한민국 방송을 쥐고 있는 분이야. 그분이 쟤 방출시켜 그러면 손정아, 이아인, 이런 애들도 바로 다음 날부터 TV 못 나와.”

“···.”」

예전 김진수의 꼬임에 넘어가 여정남 회장 술자리에 따라간 여성으로부터 건네받은 녹음 파일. 현(現)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이사 김진수의 육성이 담겨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 방송을 쥐고 있는 분’이라는 사람이 여정남 회장을 가리키는 거야?”

유성재의 질문에 서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사람은?”

“김진수.”

“포주?”

“응.”

“흠···.”

잠시 생각을 하던 유성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이건 사용하기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증언대에 서겠대.”

“진짜?”

“응. 근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증인한테 전과가 있어.”

“전과?”

“마약.”

바늘을 찾기는 찾았다. 다만, 녹이 좀 슬어있다.

“흠···. 그러면 우리가 증언대에 세워도 김앤강이 가만히 안 둘 거야. 마약만 있는 거 확실해? 사기 같은 게 있으면 그땐 이런 녹음도 증거력 전혀 인정되지 않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서지우가 하려는 것이···.

“김앤강 이 사건에서 손 뗄 거야.”

친구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한 유성재는 이유를 물었지만,

“어떻게? 왜?”

서지우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손 떼게 될 거야.”

드디어 문어 다리를 끊을 때다.

“뭘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김앤강이 사임한다고 해도 다른 로펌이 맡을 거고 그러면 상황은 똑같아.”

그때는 모래사장에서 찾은 바늘이 아니라 진검을 꺼낼 거다.

“그건 김앤강부터 끊어내고 나서 말해줄게.”

---*---

서울 근교 골프장.

딱!

경쾌한 소리 함께 아이보리색 골프공이 하늘로 치솟았다.

“나이스샷!”

짝짝짝.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밴 움직임이라서 그런 것일까,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도 허리가 부드럽게 돌아간다.

대한민국의 ‘그림자 정부’ 김앤강의 절대권력 김성무가 친 공이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젊은 프로들하고 붙어도 전혀 밀리지 않으시겠는데요.”

“하하. 이 사람들이, 왜 비행기를 태우고 그래.”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 존경합니다, 변호사님.”

“어허- 그만 하래도.”

아마도 골프장 전체를 빌린 듯하다. 그들 말고는 사람이 없다.

김성무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그들이 이제 공이 떨어진 페어웨이로 가려는 순간, 잠시 전화를 받기 위해 옆으로 비켜있었던 남자가 돌아왔다.

“장 프로, 어떻게? 칠 거야? 아니면 한 홀 쉴 거야?”

모두 낄낄거리고 웃는 표정과 대조적으로 전화를 받고 돌아온 남자는 표정이 어둡다.

“변호사님.”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김성무는 곧바로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자네들끼리 가고 있어. 나는 장 프로랑 얘기 좀 하고 따라갈게.”

김성무의 말귀를 알아들은 무리가 페어웨이 쪽을 움직이자, 장세준은 방금 전해 들은 보고를 시작했다.

“서울지검에 있는 후배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여정남 회장 비자금 경로가 다 들통났다고 합니다.”

“이미 다 들통난 거 아니었어.”

“1심 당시, 돈은 대부분 다 빠져나가고 계좌들만 있는 상태라서 여정남 회장하고 엮기가 힘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여 회장님이 MJ 엔터테인먼트 지분 획득하는 데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정황과 증거를 찾은 모양입니다.”

보고를 들은 김성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제 각각의 사건을 직접 관리하는 그가 아니다.

MJ 미디어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보고 몇 마디만 들어도 대충 파악이 가능하다. 40년 넘게 변호사 일을 하면서 그냥 쌓인 경력이 아니다.

괜히 대한민국 ‘그림자 정부’라 불리는 곳의 수장이 아니다.

“덮을 수는 없고?”

“워낙 명백하고 많아서, 이번에는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흠···.”

김성무는 상황을 가늠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여 회장님이 오래 하셨지. 저번에 만났을 때 조심하시라고 했건만···쯧쯧. 어쩔 수 없지. 적당한 시점에 손 떼.”

“네, 알겠습니다.”

“너무 끌지 않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황재수가 하고 있었지?”

“네.”

다음 말을 잇기 전 김성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련하다고나 해야 할까?

“황 프로하고도 오래 했는데 말이야. 그 친구, 늘 운이 없어. 욕심은 있는데.”

---*---

싱가포르, PSG 캐피탈 사무실.

“MJ 엔터테인먼트 건은 어떻게 하고 있어?”

“그거 안 됐어.”

재무 이사 해롤드 스미스 방을 지나치던 로건 폴슨이 그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 묻자, 해롤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왜?”

“몰라. 갑자기 관심이 없어졌대.”

“왜?”

“모르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라 로건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MJ 엔터테인먼트가 괜찮은 물건이라고 하지 않았어?”

“괜찮은 물건이지. 잘하면 MJ 미디어까지 잡을 수도 있고.”

“그럼 그냥 물고 들어가는 거는 안 돼? 꼭 그 여자가 필요한 건가?”

“블록딜이 아니면 매집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무리 몰래 하려고 해도 우리가 발을 담그면 주가도 올라갈 거고. 매력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그쪽 회장 변수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거 다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아이린이 자기 지분을 한 번에 넘기면 참 매력 있는 딜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리스크가 높아.”

“그렇군. 근데 그 여자 마음이 왜 변했는지는 모르고?”

법무 쪽 일을 맡고 있는 로건이라 재무 쪽 일은 자세하게 팔로우업하고 있지는 않았다.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딴 여자 마음을, 20년 산 내 마누라 속도 모르는데.”

“크크큭. 알았어. 이따 끝나고 맥주나 한잔하자고.”

“아, 로건.”

“응?”

“너 김앤강에 아는 변호사 있잖아.”

“있지.”

“한번 물어봐.”

“뭘?”

“혹시 다른 투자자를 찾은 건지? 아니면 뭐 자기 아빠랑 화해라도 한 건지. 궁금은 하네, 그 여자가 왜 우리 딜에서 발을 뺐는지. 우리 쪽 제안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오케이. 알아보고 말해줄게.”

---*---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황재수입니다. 방어 지분 다 확보했습니다. 여혜린 대표가 PSG 캐피탈에 지분을 넘긴다고 해도 이젠 문제없습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그러면 내일쯤 찾아뵙고 자세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딸깍.

통화를 마친 황재수는 구현탁이 가져온 NDA 계약서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PSG 캐피탈이 들어왔을 때···.’

똑똑-

그가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순간, 투자팀 이용현 변호사가 그의 사무실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황 변호사님.”

“이 변이 여길 웬일이야?”

“개인적으로 뭐 좀 여쭤보려고요?”

“뭐?”

“MJ 그룹 대리하시잖아요? 혹시 MJ 엔터 쪽 일도 보시나요?”

“응? 응. 뭐 보고는 있지. 왜?”

“아니. 이건 그냥 사적으로 묻는 건데요. 제가 PSG 캐피탈이라고 하는 해외 헤지펀드의 인하우스 카운슬이랑 좀 친한데, 그 친구가 뭐 좀 물어와서요.”

“뭘?”

“MJ 엔터 여혜린 대표가 원래는 자기네 쪽이랑 뭔가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안 한다고 해서 혹시 다른 파트너가 생겼냐며 저한테 물어왔어요.”

“뭐?!”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PSG 캐피탈이 꽤 큰 펀드 회사라···.”

“여혜린이 안 한다고 했다고?”

“네?”

딜이야 언제나 깨질 수 있는 거지만, 타이밍이 너무 기막히다.

오프쇼어 비밀 계좌들에 있었던 자금을 국내로 들여와 주식을 산 직후에 딜이 깨졌다. 마치 누군가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황재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띠리링- 띠리링-

-네, 변호사님.

“구현탁이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용산, MJ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여혜린을 찾은 서지우는 PSG 캐피탈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동안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혜린은 끝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미리 말해줄 수 있던 거 아니었어?”

“그럼 진짜 같아 보이지 않으니까.”

“그 정도 연기는 해.”

“이 회사에 당신 아버지 스파이가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

어느 조직에든 쥐와 새들이 있다.

“많겠지. 내가 모르는 쥐와 새들···.”

“알겠지만,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이제 겨우 다리 하나 잘라 낼 수 있게 된 거니까. 이때 잡아야 해.”

문어가 약해졌을 때.

“그럼 이제 해야 하는 건가? 네가 그때 부탁한 거?”

혜린의 질문에 서지우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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