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33)

함정 (2)

여정남 회장을 만나고 온 황재수는 김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변호사님-.

황재수는 김진수의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다.

누구는 그가 말주변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황재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삼류 사기꾼 같은 면이 느껴진다.

여정남 회장은 왜 이런 부류를 가까이 두는 걸까?

무료한 왕이 저잣거리에서 노는 광대들을 불러 노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황재수는 오랫동안 김진수를 알고 지내왔다.

주로 여정남 회장과 술 먹는 자리에서 만났다.

절대 사적으로 단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따로 보면 엉겨 붙을 것 같은 놈이다.

“연락이 왔습니까?”

-아이고, 변호사님 편하게 말 놓으시라니까···. 네, 연락 왔습니다.

“누구한테 왔습니까?”

그래서 나이로 보나, 서열로 보나 위에 있으면서도 황재수는 존댓말을 유지했다. 벽을 치는 것이다.

-김아인 변호사한테서 왔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했나요?”

-일단은 강남에 있는 조용한 커피숍으로 정했습니다.

“계획은 잘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변호사님. 여부가 있으려고요-.

그래도 쓸만한 건.

눈치 하나는 기막히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회장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다.

이번 계획도 여정남 회장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지난번 여정남 회장의 별장에서 있었던 회동 때, 회장과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캐치했고, 곧바로 적당한 후보의 신상과 함께 먼저 연락해왔다.

“계획이 틀어졌을 때도···.”

황재수의 말을 김진수가 끝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뒤탈 없을 애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겨도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웃는 것도 아닌데, 마치 말끄트머리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신뢰감이 느껴지는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김진수를 믿고 진행하는 일은 아니니까. 설사 일이 틀어져도 크게 문제 될 일 없다는 판단하에 하는 것일 뿐.

“그럼 나중에 통화합시다.”

---*---

딸깍.

“성격이 딱 제 이름 같아.”

“누구 말입니까?”

“있어. 야, 가서, 서윤한테 전화해서 오늘 사무실 좀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황재수에 대한 김진수의 감정도 딱히 호감인 건 아니었다.

정중한 척해도 하대하는 눈빛과 말투를 감출 순 없다.

통화를 마친 김진수는 가짜 증인으로 내세울 오서윤을 호출했다.

“부르셨어요?”

“알지, 어떻게 할지.”

“그냥 저번에 하라는 대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눈치 못 하게 하고. 만나고 와서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얘기하고.”

“알았어요.”

---*---

법무법인 해결, 대표변호사 사무실.

똑똑똑.

최성태 사무장이 서지우를 찾았다. 보고할 내용이 있다.

“알아보셨어요?”

“네.”

“오서윤. 1994년 6월생. 강원 원주 출생. 학교는 중학교까지 원주에서 다녔고,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대학은 미성전문대학교 중퇴입니다. 김진수하고의 인연은 9년 전 김진수가 버클리 레코드 부사장으로 있을 때 길거리에서 오서윤을 캐스팅하면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김진수가 그렇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한 어린 여성들이 수백 명이다.

그 여성들의 운명은 갈린다.

그중에는 진짜 연예인으로 데뷔한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고.

당연히 후자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연예인이 되지 못한 여성의 운명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하나는 연예인의 꿈을 포기하고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진수가 연결해주는 사람들의 스폰을 받고 살아가는 것.

뭐가 되었든 간에 김진수한테 당한 일들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연예인이 된 여성들은 커리어를 망칠까 봐,

일반인으로 돌아간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이 알까 봐,

나머지는 밥줄이 끊길까 봐.

승자는 김진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키우고 있는 2살짜리 애가 있는데, 오서윤의 딸로 의심됩니다.”

오서윤은 연예인이 되지도, 일반인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부류이다.

“당시 진송가구 둘째와 그런 관계였는데, 동시에 만나고 있던 호스트바 출신 남성이 있었던 점으로 미뤄봤을 때···.”

스폰서의 아이인 줄 알고 낳았는데 호스트바 남성의 아이로 밝혀진 케이스이거나, 아니면 스폰서의 아이로 사기 치려다가 실패한 케이스일 것이다.

“그쪽으로 더 조사해볼까요?”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렇게나 김진수에게 목줄이 제대로 잡힌 사람이라면 회유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두 살배기 딸을 빌미로 협박해보는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그녀가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구현탁은요? 구현탁에 대해서도 알아보셨나요?”

“네, 알아봤습니다.”

최성태 사무장으로부터 구현탁에 관한 보고를 들은 서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느낌이 맞았다. 지능에 비해 욕심이 과한. 말로 쓰기 딱 좋은 인간이다.

---*---

“미안하다. 내가 급한 일이 좀 생겨서 자리에 못 나갈 것 같아. 서윤이한테 잘 말해뒀으니까, 나 없어도 괜찮을 거야. 괜히 나 때문에 또 시간 변경하지 말고, 그냥 만나봐. 그래도 되잖아?”

예상대로 구현탁은 아리가 오서윤을 만나는 자리를 회피했다. 하나는 분명해진다. 이게 함정이라는 것.

“김아인 변호사님?”

“오서윤 씨?”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참하게 생긴 여성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곱고 예쁜 여자.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개인적인 관심은 접었다.

“혹시 대화 내용을 녹음해도 될까요?”

“네에?”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상담 내용을 녹음하나요?”

“일반적으로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사건이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부탁드려봤습니다.”

“···음···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하지 않겠습니다.”

아리는 전화기를 끄는 모습을 보여주면 오서윤을 안심시켰다. 오서윤이 눈치채지 못한 건, 아리의 들고 있는 볼펜에 녹음기능이 있다는 사실. 오서윤의 경계심이 누그러트리기 위한 트릭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편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라일락 엔터테인먼트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는지부터 설명해주시겠어요?”

“아, 네. 라일락 엔터테인먼트는······.”

오서윤은 열심히 준비해온 대본을 연기했고, 아리는 열심히 노트를 적는 연기를 했다.

불꽃 튀는 연기 대전.

어차피 승자는 정해져 있다.

---*---

오서윤을 만난 다음 날, 아리는 구현탁을 만났다.

그녀가 먼저 연락했다.

“어, 그래, 만나봤어?”

“서윤 씨한테 전화 안 했어?”

“응? 아, 했지. 그냥 너는 어땠냐고 묻는 거였어.”

아리는 구현탁을 슬쩍 건드려본다. 혹시라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건가 해서 한번 찔러본 것뿐이다. 당황하는 걸 보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허심탄회하게 다 말해줘서 상담은 수월했어.”

“그랬구나. 네가 편하게 해주었나 보네. 다행이다. 고맙다.”

“그래서 우리 펌에서 사건 수임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사건 관련해서 너랑 나랑 했던 얘기는 없는 거다.”

그가 원하는 바. 아리의 말에 구현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몰라? 오서윤 씨가 사건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얼핏 듣기만 했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말했잖아. 내 맘대로 맡을 수 있는 건이 아니라서 수임 거절한 건이라고.”

“그랬구나. 넌 몰랐구나···.”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아무런 문제 없어···.”

아리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구현탁은 아리의 태도를 제멋대로 추측한다.

“잠시만.”

아리가 마치 전화가 들어온 것처럼 안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자, 구현탁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네, 김아인입니다. 네. 네. 네, 변호사님. PSG 파일이요? 그거 제가 지금···.”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하던 아리는 잠시 통화하고 오겠다는 의미의 손짓을 구현탁에게 하고는 다른 소지품들을 놔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 구현탁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내려다봤다. 코너 쪽으로 삐죽 나와 있는 서류의 탭에 적힌 문구.

「PSG 캐피탈 인수합병건」

아리가 사라진 곳을 다시 한번 체크한 구현탁은 집게손가락으로 삐죽 나온 서류를 끝을 살짝 빼본다.

「Non Disclosure Agreement:

Acquisition of MJ Entertainment Inc. by PSG Capital Inc.」

(기밀유지협약: PSG 캐피탈의 MJ 엔터테인먼트 인수)

두 눈이 동그래진 구현탁은 다시 한번 아리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0.1초간 망설인 구현탁은 서류철에서 계약서를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미안. 나 들어가 봐야겠다.”

자리로 돌아온 아리가 말하자, 구현탁은 아쉬운 듯 연기를 했다.

“바쁘구나. 그래, 들어가.”

“그럼 오서윤 씨 사건 관련해서 너는 모르는 일이다. 오서윤 씨가 직접 나를 찾아온 거고.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정리하자고.”

“오케이. 그렇게 하자.”

테이블 위에 서류철은 아까보다 더 똑바른 형태로 놓여있다.

아리는 모른 척하고 서류철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근데, 오서윤 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응?”

“오서윤 씨가 김앤강에 가지는 않았을 테고.”

“아, 그게···아는 누나한테 소개받았어.”

“소개?”

“자세하게 말하기는 뭐하고. 남녀 사이 뭐 그런 거.”

“아- 알았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이 대화는 없던 거니까.”

“응. 상관없어. 그래,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래, 가.”

아리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구현탁은 그가 멀리 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휴대폰을 꺼내 찍은 사진들을 확인해 본다.

금덩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녀석의 입이 양쪽으로 찢어진다.

계약서 내용을 다 훑어본 그는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아닌 경복궁역에 있는 구(舊)건물로 향했다.

*

멀리서 구현탁이 커피숍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리.

동기가 택시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간다.

“뭐 드릴까요?”

“혹시 매니저님 계신가요?”

“왜 그러시죠?”

“요청드릴 것이 있어서요.”

“잠시만요.”

카운터를 보고 있던 직원은 뒤편에 있던 매니저를 불러왔고, 아리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넨 뒤 정중히 부탁했다.

“아까 저기 앉았던 사람인데요, 가게 내부 CCTV 영상 좀 복사할 수 있을까요? 같이 있던 동행이 제 물건 중에 뭘 훔친 거 같아서요.”

명함을 확인한 매니저는 저장 하드가 있는 가게 뒤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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