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1)
“여혜린 대표가 MJ 엔터테인먼트 지분을 양도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흥.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는구먼. 그거 다 쇼야. 그놈이 그 회사를 얻으려고 내 옆 알랑방귀를 뀌며 6년 동안 제 발톱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포기한다고? 그럴 리 없어.”
황재수의 보고에 여정남은 콧방귀를 뀌었다.
“PSG 캐피탈이라는 미국 헤지펀드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어떤 멍청이가 가게 카운터 지키겠다고 가게 지분을 넘겨? 제 아비 등에 칼 꽂고 쟁취한 것을 남에게 그렇게 넘긴다고? 제정신이야! 다시 알아봐. 간사한 놈이기는 해도 멍청이는 아니야.”
“아무래도 구해줄 ‘백기사’를 찾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백기사. White Knight. 술자리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이 단어는 실제 투자사들 사이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지금은 거대 콘텐츠미디어 공룡인 월트 디즈니사(社) 역시 이 전법으로 적대적 인수에서 살아남은 적이 있다.
1984년, 사울 스타인버그라는 이름의 한 유대인 투자자는 디즈니사(社)의 지분 11%를 획득하고 공격적인 인수합병에 나섰다.
컴퓨터 리스 회사 리스코의 설립으로 성공을 거둔 그는 리스코보다 몸집이 열 배나 큰 보험 회사 릴라이언스를 인수하면서 부를 급속하게 늘렸고, 인수합병을 재미를 본 그는 디즈니를 눈을 돌렸던 것이었다.
당시 자본 규모에서 사울 스타인버그를 이길 수 없었던 디즈니사의 이사회는 시드 베이스와 그의 아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우호 지분을 늘릴 수 있었고, 겨우 사울 스타인버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사울 스타인버그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11% 지분을 디즈니에 양도하면서 분쟁은 종결되었다.
즉, 백기사란, 적대적 인수 위험에 처한 법인의 매니지먼트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적대적인 투자자 대신 우호적인 투자자를 찾는 전법이다.
“그게 무슨 전법이야. 세상에 누가 공짜로 도와주는 줄 알아. 그렇게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문을 열어주고 잡아 먹히는 거야!”
황재수가 구체적인 헤지펀드 이름까지 언급하자, 여정남의 심기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제 아비인 나한테 빼앗기느니, 딴 놈한테 주겠다? 애초에 내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이···. PSG 캐피탈? 그놈들은 어떤 놈들이야?”
“미국계 투자자인데, 섹터도 가리지 않고 상당히 공격적입니다. 주로 단타로 치고 빠지는 성향이지만, 경영에 직접 의사를 개진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런 놈들을 백기사라고 불러들인다고? 정보 확실한 거야?”
“여 대표와 PSG 캐피탈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 대표의 목표가 회장님으로부터 경영권을 지켜내고 PSG 캐피탈의 목표가 수익이라면 완전히 허황된 전략은 아닙니다.”
“PSG가 관심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한국 재벌가의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적대적 인수에 취약하다.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등 적대적 인수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방어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우리나라는 고작해야 자사주 취득, 우호 지분 확보 정도가 그나마 쓸모 있는 방어전략이다.
그런데, 한국 재벌가는 문어발식 가족 경영 체재라 경영 승계를 위하여 지분 구조를 변경해야 할 시 5%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투표권을 ‘볼모’로 잡고 재벌가와 거래할 수 있으며,
만약 ‘형제의 난’처럼 재벌가 사이에서 경영권을 두고 암투라도 생길 경우, 공격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여 대표가 경영을 잘하고 있는 상황이라, PSG 처지에서는 리스크가 없는 투자입니다.”
“독한 것 같으니.”
아버지의 매질을 피하고자 집안에 깡패를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다.
“내가 우호 지분을 얼마나 더 늘려야 그놈들이 관심을 끄겠어?”
“여혜린 대표가 얼마나 넘길지 모르겠지만, 5% 정도 넘긴다고 했을 때, 7%, 8% 정도는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5% 이상은 확실하게 가져와야 합니다.”
“포섭할 주주들은 더 없고?”
“여 대표가 워낙 경영을 잘하고 있어서···.”
힘들다는 말.
“비자금 꺼내.”
“네?”
“오프쇼어 계좌에 있는 돈 풀어.”
“그러기에는 항소심도 있고, 아직 소송이 끝난 게 아니라서···.”
비자금을 꺼내시라는 제안을 하려고 보고한 것은 아니었다.
여혜린 대표가 저렇게 나오니, 차라리 지금은 타협을 보는 게 어떠시냐는 조언을 드리려고 했다.
황재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어?”
“검찰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돈을 움직이면···.”
“이미 다른 계좌들로 다 옮겨놨잖아.”
“그렇기는 한데···.”
“어차피 검찰은 그걸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권력에 따라 움직이지. 구정택이는 어떻게 하고 있어?”
“구 의원이 슬슬 움직이고 있기는 합니다.”
“연락해봐.”
“네, 알겠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아버지가 싫다고 헤지펀드에 회사 지분을 넘기겠다고 하는 딸과 횡령 혐의를 완전히 벗지도 않은 상황에서 비자금을 움직여 비밀리에 지분을 사들이겠다는 아버지.
경외심이 드는 가족이다.
“그리고 그놈은 어떻게 하고 있어?”
서지우 말이다.
“독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질질 끌지 말아.”
“예.”
---*---
PSG 캐피탈 싱가포르 지사.
극비리에(?) 한국 출장을 다녀온 재무 이사 해롤드 스미스는 PSG 캐피탈 치프 인하우스 카운슬 로건 폴슨의 방을 찾았다.
“미팅은 어땠어?”
“좋았어.”
“어때 진심인 거 같아?”
“진심이야.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장부를 다 보여주지는 않지.”
“오-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네.”
서지우로부터 MJ 엔터테인먼트에 관해 전화를 받았을 때 로건 폴슨은 먼저 의심부터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그가 근 7년 만에 연락하여 좋은 딜(deal)을 제시할 이유가 없었다.
“왜 반신반의해?”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누구? 아, 그 한국 변호사랑?”
“응.”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딜이 좋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별거 아니야. 옛날 일.”
해롤드 스미스의 호기심은 그렇게 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 대표의 제안은 진심 같아. 다만, 조건이 붙었어.”
“무슨 조건?”
“경영권 유지.”
“그건 좀 곤란하지 않아?”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게, 5년 기한 한정이고. 솔직히 그 여자가 일 잘해. 우리가 만약 인수하게 된다고 해도 경영은 그 여자가 맞는 게 우리한테도 유리해.”
“응.”
“그러면 숀이 한국 미디어 회사 인수에 관심이 있느냐에 달린 문제네.”
“관심 있을 거야.”
“왜?”
“듣자 하니까, MJ 엔터테인먼트의 모회사 격인 MJ 미디어 오너랑 여 대표랑 우호 지분을 두고 경쟁 중이래. 거기 부녀지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 하면···.”
해롤드 스미스는 로건 폴슨에게 ‘MJ 미디어 집안싸움’에 관해 자신이 들은 정보를 설명했다.
“여차하면 MJ 엔터테인먼트를 타고 MJ 미디어까지 잡을 수 있겠는데.”
“그렇지.”
“문제는 그 회장이 구속될 확률이 얼마나 있느냐네.”
“그래서 네가 좀 알아봐 줘야겠어.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MJ 미디어 재무를 좀 살펴봤는데, 그렇게 좋지는 않아. MJ 엔터테인먼트 때문에 그나마 부양되고 있는 실정이야. 그래도 뭐 팔아먹을 건 많아 보여.”
“괜찮은 먹거리인데 변수가 많아서 돈이 묶일 수 있는 리스크가 있겠네.”
“빙고.”
“알았어. 내가 김앤강에 있는 아는 변호사를 통해 알아볼게.”
“오케이. 그럼 나는 일단 먼저 숀하고 이야기해보지.”
대한민국 최대 로펌.
그러다 보니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기업에 대해 알아보려 할 때, 십중팔구 제일 먼저 컨택하는 로펌이 바로 김앤강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에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들 역시 ‘한국의 그림자 정부’라고도 불리는 김앤강을 선호하기에 (같은 사건이 아니면) 한 로펌에 근무하는 다른 변호사들이 경쟁사들을 대리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MJ 미디어가 주로 쓰는 변호사가 황재수였고, 로건 폴슨의 지인은 김앤강 투자팀의 다른 변호사였다.
원칙적으로 서로 정보 교환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같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으며, 알았다 한들 어떻게 증명하랴.
그래서 황재수는 PSG 캐피탈과 여혜린의 비밀 미팅에 대해 알게 되었다.
---*---
법무법인 해결, 대표변호사 사무실.
“김앤강에 있는 김 변 동기가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김진수가 관련된 성추행 사건을 가지고 왔다고?”
“아직 피해자를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 같습니다.”
당연히 서지우는 김진수를 기억한다.
라일락 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이 송하 엔터테인먼트인 것도 알고, 그가 여정남의 포주인 것도 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여정남이 풀려나고 이제 자신을 코너에 몰았던 사람들에게 복수의 행보를 취하려는 지금, 이제 입사한 지 1년 남짓한 막내 변호사에게 하필이면 김앤강에 다니는 동기가 나타나 관련 사건 증인을 소개해주었다.
냄새가 난다.
“그 동기하곤 친한가?”
“아니요.”
친하지도 않다.
“좀 더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테야?”
평소 같았으면 대표의 그 같은 질문이 부담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리도 이상함을 감지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온 것이고, 정윤하 사건 이후로 무엇이든 서지우에게 보고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학습된 상황이었다.
“사실 며칠 전에 우연이 다른 동기를 법원에서 만나고 나서···.”
아리는 상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전부 들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 가짜 증인을 저희한테 보내려고 하는 걸까요?”
뻔하지만 성공하면 치명적이다.
비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지우가 웃은 이유는 상대의 작전을 눈치채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가짜 증인을 보내 덥석 물어버리면, 해결이 현재 대리하고 있는 피해자 박은영 증언의 신뢰도가 같이 쓰레기 취급된다.
만약 대리를 거절한다고 해도, 막내 변호사를 통해 사건을 그런 식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에서 짐작건대, 아마 막내가 혼자 따로 만났다면 증언을 강요했다든지, 더 심하면 성추행을 했다는 둥 하는 더 치졸한 방법을 썼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연예인들이나 연예인 지망생들을 늙은 재벌 회장에 상납하는 쓰레기.
황재수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아니, 직접 지시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래야 걸려도 꼬리 자르기가 쉬울 테니.
“만나봐.”
“네? 만나보라고요.”
“응. 만나봐. 만나보고 사정이 어떤 건지 알아 가지고 와.”
“정말요?”
“내가 이 시간에 김 변 잡고 농담할까 봐?”
“아니요.···그건 아닌데···.”
“대신 녹음해 와.”
“아! 알겠습니다!”
“혹시 구현탁도 그 자리에 나오게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만약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자리 안 나오면···.”
그럼 함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고,
“그 가짜 피해자 만나고 난 후에 따로 만나봐. 만나서······.”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