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33)

뻔뻔한 동기 (2)

서울 근교의 한 별장.

근처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곳, 세련되게 지어놓은 한옥식 건물 앞에 검은색 세단들이 주차되어있고, 귀에 리시버를 낀 남자들이 어둠 속을 주시하고 있다.

누가 그 건물 안에 있는 모양이다.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황재수가 여정남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가 수고했어.”

“아닙니다. 한 번 더 신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정남은 술병을 받아 그가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양주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챙-

무거운 크리스털 잔을 부딪치고는 쓴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황재수는 곧바로 여정남의 빈 잔을 채운 뒤 보고를 시작했다.

“차병호 대표는 회장님 말을 들을 겁니다. 차 대표 동생이 이번에 중원시 시의원에 출마하는데 위장전입이 하고 증여세 탈루 등 구린 곳이 많습니다.”

“털어서 먼지 없는 놈이 없지.”

“여혜성 사장이···.”

“그놈은 걱정할 것 없어. 내가 기침만 해도 벌벌 떨 놈이야. 사내새끼가 담이 없어서···.”

그것이 늘 불만이었으나, 이번에 그가 복귀할 수 있는 것이 그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여 대표입니다.”

MJ 엔터테인먼트 여혜린 대표.

여정남은 막내딸을 좋아했다. 배포도 있고, 성깔도 있었으며, 욕심도 있다. 자리를 물려줄 만한 재목이다. 여자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다 마음에 들었으니까.

게다가, 미국에서 이혼하고 돌아와서는 말을 잘 들어왔다.

정신 차리고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배신할 줄이야.

“다른 주주들을 찾아다니면서 포섭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흥. 그깟 몇 프로 되지도 않는 지분으로 제깟 게 날뛰어봤자지.”

“그래도 MJ 엔터테인먼트 운영을 잘하고 있어서 영향력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기존 주주 중에서도 여혜성 사장보다 여 대표를 더 신임하는 인물들도 있고요.”

“걔는 걱정할 것 없어. 다 해결되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가 그놈이 제일 서운해할 것이 뭔지 잘 알지. 그보다 누가 내 오프쇼어 어카운트들 유출했는지 알아냈어?”

“네.”

“누구야?”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 대표인 것 같습니다.”

“흥! 내가 그놈일 것 같았어! 근데 그놈이 도대체 그 자료를 어디서 얻어낸 거야? 누구를 매수한 거야?”

“그게···.”

회장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인 황재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 대표가······.”

“뭐라고? 혜린이가?”

안 그래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인데 딸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사실을 들은 여정남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증거는 없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이 아무래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건네준 것이 아닌 이상, 이렇게 흔적이 없기 쉽지 않다는 의미였다.

“서지우 그놈인 것은 어떻게 알았고?”

“유성재라고 서울지검 검사와 서지우가 막역한 사이라고 하는데, 맨 처음 리스트가 검찰에 전해진 경로가 그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말로는 지금 워싱턴 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JCBC 조동하 기자로부터 팁을 받아 수사했다고 하는데, 알아본 바로는 조동하 기자는 그런 리스트를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여정남은 서지우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에서 딸이 그놈과 몰래 결혼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서지우가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 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딸의 협박과도 같은 간곡한 요청에 가만히 놔두었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6년 만에 앞에 나타났다. 자신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여성의 변호인으로.

낌새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설마 두 놈이 그런 식으로 결탁을 했을 줄이야.

“두 놈이 붙어먹은 거야?”

“그런 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딱히 둘 사이의 교류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흥. 남녀 사이는 모르는 거지. 제 아비 등에 칼을 꽂을 정도면···.”

‘아니지. 제 아비 등에 칼을 꽂으려고 제 전남편을 이용했구나!’ 여정남은 한발 더 나아가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둘 사이의 감정이 남아있어서 그랬다는 것보다 기분이 좋다.

“허허허. 하하하. 교활한 것! 알았어. 딸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지우 그놈 어떻게 처리할 거야?”

“그게···.”

여정남의 질문에 황재수는 다시 한번 뜸을 들인다. 아까는 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보고해야 해서 곤란했다면, 이번은 딱히 좋은 방법이 없어서 곤란한 것이었다.

“뭐가 문제야?”

“생각보다 빈틈이 없는 자라서요.”

“세상에 그런 놈이 어딨어?”

“······.”

그런 놈이다. 정의롭고 깨끗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흔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모든 걸 지워버리니···.

“진짜 못 찾은 거야?”

“여성 편력이 있는 거 말고는 딱히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성 편력? 여자 후리고 다닌다는 말이야? 그러면 그걸로 잡으면 되겠네.”

“근데···.”

그것도 곤란하다. 서지우와 하룻밤을 보낸 97%의 여성은 그를 좋게 기억했으며, 나머지 3% 정도는 그에게 약점을 잡혔기에 어떻게 하지 못한다.

“황 변.”

“네, 회장님.”

“나를 또 실망시킬 거야?”

“아닙니다.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황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 변.”

“예, 회장님.”

“황 변 문어가 어떻게 딱딱한 껍데기로 무장하고 있는 게를 잡아먹는 줄 알아?”

“예?”

“게를 등 쪽으로 감싸 안은 다음에 말이야. 눈깔이 튀어나오는 부분같이 가장 약한 부분에 독침을 쏴. 그렇게 게가 독에 취해 제정신 못 차리게 되면 부리로 딱딱한 껍데기를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침을 뱉어. 그러면 껍데기 안의 살과 내장이 다 녹아버리지. 그다음엔 주둥이를 집어넣고 주스처럼 쪽쪽 빨아먹는 거야.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독 한방이면 끝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비유는 알겠지만, 여 회장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독’을 쓰라는 건지 모르겠다.

“회장님, 라일락 엔터 김 사장 왔습니다.”

다행히,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파티가 도착했다. 여정남이 들여보내라는 손가락질을 하자, 보안팀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소매에 숨긴 마이크에 대고 지시를 전달했고,

잠시 후, 전 송하 엔터테인먼트 대표, 현 라일락 엔터테인먼트 이사 김진수가 젊은 여성들과 함께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자리가 익숙해 보이는 여자들. 김진수의 눈짓에 여자들은 여 회장과 황재수 옆자리에 조용히 앉는다.

그들이 앉기가 무섭게 여정남은 흐물거리는 손을 파트너의 치마 안으로 집어넣으며 황재수에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황 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고? 껍데기를 깨기가 어려우면 촉수를 집어넣으란 말이야, 촉수를.”

만지작만지작.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

서초동 골목 어딘가에 숨어있는 장인의 중식당.

서지우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렇게 같이 식사한 지가 얼마 만이지?”

“1년쯤 됐나?”

“그런 거 같네. 연말에는 잠깐 만나서 커피만 마셨으니까. 요새도 바빠?”

“바빠.”

“원했던 거 아니야?”

“원한 거기는 한데, 정권 바뀌어도 검찰 내 분위기 뒤숭숭한 거는 여전해. 여기도 완전히 편이 갈린 거 같아. 저쪽하고 이쪽하고.”

“저쪽은 어디고 이쪽은 어디인데?”

“그게 뭔 상관이 있겠냐, 나같이 중간에 있는 놈한테는.”

“이렇게 서면 저쪽이 이쪽이고, 돌아서면 이쪽이 저쪽인데.”

“시 쓰냐.”

“너도 들어와 봐라. 여기도 정치판이다.”

유성재.

서지우가 미국에서 여혜린과 결혼할 때 부른 세 친구 중 한 명이다. 대학 때 만난 친구이지만 그만큼 마음이 맞는 친구도 없다.

다만, 검찰에 있다 보니, 사회 나온 후에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뿐.

“왜 보자고 한 거야?”

중요한 게 아니었으면 전화로 했을 것이다.

“여정남 회장 풀려났어.”

“봤어.”

“항소할 거야.”

“그렇겠지.”

유성재 담당 사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비공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성추행 사건은 포기할 것 같아.”

“뭐?!”

박선후 변호사의 사촌 동생 박은영이 고소한 성추행 사건.

예전 식구였던 박선후 변호사의 부탁으로 서지우가 도와주었던 사건.

애초에 이 사건이 이렇게 커질 수 있었던 이유.

검찰이 지금 그 사건 항소를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비리에 집중하는 게 전략적으로 좋다는 내부 의견이야.”

“여정남 회장 도장이 찍힌 합의서가 있어.”

“여 회장이 직접 찍은 게 아니라는 게 1심에서 저쪽 주장이었고, 법원이 받아들였어.”

“다른 증인들도 있어.”

“증거력이 약해. 중간에 합의한 증인도 나왔고.”

이래서 형사 사건을 서지우가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걸 검찰에게 맡겨야 하는데, 늘 이런 식이다.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밀려나는 것이 있다.

“증거력이 약한 게 아니라 성추행 사건 따위에 인력 쏟을 마음이 없는 거지.”

서지우의 일침에 유성재는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이 없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에.

“그것도 맞아. 성추행 혐의 인정받아봤자, 실형 나오기 힘들어. 비리 혐의가 인정돼야, 같이 묶어서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버겁다. 그러니 성추행 사건은 포기하고 비리 혐의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이다.

“막아.”

“···.”

“항소하는 거 어렵지도 않잖아. 그냥 소송만 살려놔 둬. 내가 어떻게든 증거 찾아볼 테니까.”

“나한테 결정권 없는 거 알잖아.”

“무조건 항소에 성추행 혐의 포함시켜, 나중에 쪽팔리는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명령조로 이야기했지만, 부탁이었다.

친한 친구였기에 할 수 있는 말투.

그리고 진정한 충고이기도 했다.

---*---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아리가 들어오자, 커피를 타서 나가던 정도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김 변, 어제 동창회는 어땠어?”

별로였다. 그러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그 정도 하고 나왔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지.

“뭐 그냥저냥···재미없었어요.”

“왜? 오랜만 아니었어?”

“오랜만이었는데, 다들 좀 변해있더라고요.”

“왜?”

“속물들이 되어 있는 것도 같고···.”

“그렇지,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지. 그래서 어렸을 때 친한 친구가 좋다고들 하지. 허물없을 때 만난 사이가. 그래서 별로였구나?”

“네.”

“그럼 오늘 나랑 한잔하는 거는 어때?”

“오늘이요?”

정도는 정윤하 일로 다툰 일을 아직도 마음에 살짝 담아둔 것 같았다.

“왜? 다른 일 있어?”

“아니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찝찝하게 마셔서 목이 말랐는데.”

“오케이, 콜! 아, 오랜만에 선배님도 같이 마시자고 할까?”

“서 변호사님이요?”

“왜 싫어? 불편해? 불편하면···.”

“아니요. 좋아요!”

“오케이. 그럼 내가 물어볼게.”

“네, 그럼 나중에 정해지면 장소하고 시간 알려 주세요.”

“응.”

그렇게 약속이 정해지고 정도가 나간 뒤,

징징- 징징-

울린 아리의 휴대폰.

찌그러지는 아리의 표정.

구현탁이다.

[어제는 미안했다. 요새 좀 힘들어서 술 한잔에 취했나 보다. 기분 나빴으면 사과할게. 그래도 변호사 일 계속하며 서로 계속 얼굴 볼 텐데, 이렇게 끝내기 그렇지 않냐? 동기끼리인데. 얼굴 보고 풀자.]

뭐지, 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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