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꾼 우지만 (2)
“현재 촬영 스튜디오는 캐나다에 짓는 옵션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토론토가 될지, 밴쿠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론 실버 사장이 세금 혜택 부분 관련해서 캐나다 정부 관계부처 사람들하고 논의 중입니다.”
‘The Dynasty’ 프로젝트 회의를 위해 서지우는 <코즈모미디어> 사무실을 방문했다.
다행히 ‘The Dynasty’ 프로젝트는 라스베가스 삭제로 인해 없던 일이 되었거나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코즈모미디어>와 <퓨처리스틱 픽처스>가 합동 제작을 맡았고, <언리얼 VFX 팀>이 CG 담당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알겠습니다. 확정되면 알려주십시오.”
“네, 물론이죠. 아마 계약서 초안은 <해결>에서 잡아주셔야 할 듯싶습니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서지우는 여혜린이 부탁했던 요청을 임환 대표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론 실버에게 MJ 엔터 여혜린 대표를 만나볼 의향이 없냐고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MJ 엔터요?”
“네.”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아도 대충 의도가 뭔지 감이 온다. 임환 대표는 의아해하지 않고 물었다.
“혹시 투자 의향이 있는 건가요?”
“그런 듯합니다.”
“국내 플랫폼이 품기에는 프로젝트 사이즈가 조금 큰데···.”
“그 정도는 여 대표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퍼스트티어들 하고 비슷한 수준의 투자 제안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까요?”
“흠···.”
“어차피 퍼스트티어들도 섣불리 들어오기 쉽지 않은 프로젝트이지 않습니까?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은 거 보면, 아직 구체적인 제안을 한 곳이 없는 것 같고. 그렇다면 만나서 제안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은데요.”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상대가 사기꾼도 아니고, 투자 제안을 하겠다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게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 서지우는 임환 대표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러시죠?”
“아니요. 요새 소문이 좀 안 좋아서요.”
소문?
“뭐 저도 얼마나 근거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여정남 회장이 풀려날 거라는 말이 돌더라고요. 그리고 여 회장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쳐낼 사람이 여 대표라고···.”
이런 말들은 누가 퍼트리고 다니는 것일까?
근거 없는 말은 아니지만, 가끔은 섬뜩할 때가 있다.
“회사를 대리하여 내린 대표의 결정은 대표가 바뀌어도 회사에 이행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알겠습니다. 한번 주선해보죠. 솔직히 손해를 볼 것은 없으니까.”
“저한테 직접 연락하실 필요는 없고, 이 사람한테 연락하면 될 겁니다.”
서지우는 가방에서 차동균 비서실장의 명함을 꺼내 임환 대표에게 건넸다.
“알겠습니다. 그럼 론 실버랑 상의해서 만나보고, 변호사님께는 별도로 제가 업데이트해드리겠습니다.”
“네.”
“아, 변호사님.”
“네.”
“혹시 동기나 선후배 중에 형사 소송 잘하시는 변호사님을 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죠?”
“집안일이라 조금 부끄럽기는 한데, 조카 놈이 술 먹다가 옆자리 양아치들하고 시비가 붙어서 치고받고 한 모양이에요.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저쪽에서 쌍방폭행을 주장하고 나오면서 경찰도 그렇게 검찰에 올리려는 한답니다. 애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서 몸이 좋다 보니까 예전에도 가끔 그렇게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었어요. 성격이 무던해서 웬만하면 잘 참아 넘기는 애인데, 그날은 여자친구랑 있어서 보호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네요. CCTV 증거도 있고, 제가 보기에도 억울한 면이 있어서, 도와주고 싶은데. 혹시 변호사님 아시는 분 중에 괜찮은 분이 있을까요?”
있다, 적당한 사람.
“아, 물론 변호사님이 직접 해주시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있습니다.”
서지우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적당한 변호사의 이름과 연락처를 열어 보여주었다.
“도흥식 변호사 사무실···.”
“그분에게 연락하셔서 제가 소개했다고 하면 사건 수임하실 겁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늘 신세만 지고···.”
“아닙니다.”
---*---
강남, <스위트 크레딧> 사무실.
아리가 돌아가고, 우지만은 그녀가 주고 간 명함에 나온 법무법인을 검색했다.
“법무법인 해결···. 국내 최초 엔터테인먼트 부티크 로펌···. 대표 서지우 약력···.”
사이트 정보와 관련 기사들을 소리 내어 읽던 우지만의 미간에 주름이 파이자, 그의 눈치를 보며 탕수육을 집어먹고 있던 부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허어- 참, 멀쩡한 곳 같은데···.”
“네?”
“멀쩡한 곳 같다고. 개인회생이나 파산 전문으로 하는 샤바샤바한 변두리 변호사 사무실이 아니야.”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 우지만은 신입 부하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한다.
“자, 저런 멀쩡한 로펌은 우리 같은 사무실에서 건드리기가 곤란해요. 만약에 우리가 내민 채권 양도계약서나 차용증이 가라라고 소송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거든. 뭐, 고만고만한 변호사 사무실이면 대충 합의하고 퉁쳐도 되겠지만, 여기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
“아-.”
“‘아-’는 뭐가 ‘아-’야, 이 새끼야. 너 내가 한 말이 뭔 소리인 줄이나 알아?”
“아뇨.”
“자, 우리가 정윤하한테 받아낼 돈이 얼마야?”
“원금 이천에 이자 오천, 도합 칠천이요.”
“야, 너 그래서 사채업 하겠냐?”
“왜요? 제가 잘못 계산했나요? 아닌데···.”
“게가 무슨 수로 칠천을 바로 갚겠니? 가지고 있는 돈 조금하고 다시 술집에 돌아가서 마이킹 당겨도 끽해야 삼, 사천이야. 그러면 걔가 일하는 동안 이자가 또 늘겠지. 그럼 또 열심히 일해서 이자를 갚아. 그동안 또 이자가 늘어. 또 일해. 갚아. 운이 좋아서 어떤 호구라도 물지 못하는 이상, 걔는 우리 ATM이야. 너 왜 스티브 잡스가 훌륭한 사업가인 줄 아냐?”
“···왜요?”
“이 전화기를 ATM으로 만들었거든. 그냥 사고 끝나는 가전기기가 아니라, 계속 쓰게 만들고 쓰면 쓸수록 사용자한테 돈이 나오게 하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아···.”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지만, 딱 보면 안다. 이해하지 못했다.
“너 못 알아먹었지?”
“아니요. 알아먹었는데요.”
“너 스티브 잡스가 누구야?”
“아···. 잡스형···이요.”
“그니까 잡스형이 누구냐고?”
“그게···테스형 동생···은 아닐 거고···찰스···.”
“야! 너 그만 먹어! 넌 탕수육 먹을 자격이 없어. 그만 먹어, 이 새끼야!”
---*---
사채업자 우지만의 사무실에서 돌아온 아리는 곧바로 정도의 사무실을 노크했다.
똑똑똑.
“네.”
“변호사님, 이거 좀 봐주시겠어요? 법정 최고 이율이 20%인데, 지금 이 사람들을 연 400%가 넘어요.”
정도는 아리가 내민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녀가 우지만 사무실에서 찍어온 대출 서류들이다.
“그렇네.”
“그럼 채무부존재 소송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여전히 시큰둥한 정도.
“김 변.”
“왜요, 변호사님?”
“그 여자 소송할 돈은 있고?”
“네?”
“동네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써서 한다고 해도 법률비용으로 최하 오백만 원은 달라고 할 거야. 그 아가씨 오백만 원은 있어?”
아리는 대신 내줄 마음이 있다.
“있다고 치면요?”
“없을걸. 사채까지 끌어다 쓴 거 보면.”
“사채를 끌어다 쓴 게 아니잖아요.”
“마이킹이 사채지. 뭐가 달라.”
“가게 나올 때가 다 갚았다니까요. 원래는 이자도 없었고.”
“그게 그 여자 주장인 거는 아는데, 설사 갚았다고 쳐도, 애초에 그런 데서 일했으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아리는 화가 나는 것을 참았다.
아무리 술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불의를 당해야 하는 건 옳지 않다.
“변호사님이 술집 여자한테 홀려서 당한 것처럼요?”
“뭐?”
아리의 비꼼에 정도의 인상이 구겨진다.
“김 변, 너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윤하 씨가 없었으면 변호사님 어쩌면 지금도 형사 소송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아니면, 합의금으로 몇천만 원 아니 일억을 뜯겼을 수도 있고요. 그랬다면, 그것도 변호사님이 술집 여자한테 홀려서 그런 꼴을 당했다고 하는 게 맞나요?”
정도의 인상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아리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말이 맞으니까.
“내 말은 돈을 써서 채무부존재 소송을 해봤자,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연 400%씩 이자 받아먹으며 서민들 피 빨아 먹는 놈들은 콧방귀도 안 뀔 거라는 뜻이야.”
아리는 정도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서 애초에 파산신청을 하라고 했고. 그렇게 완전히 나자빠지면 그놈들도 건들지 않을 테니까. 근데,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놈들이나 그렇지. 진짜 악질들은 가족들 협박하고 심하면 장기까지 떼다 팔아.”
“장기···요?”
“왜 농담 같아? 아니, 내가 검사 사무실에서 잠깐 일했을 때 봐서 아는데, 그런 거 진짜 있어. 그게 그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데 대한 대가야. 쉽게 번 만큼 쉽게 털리는 곳. 누구는 몇 년씩 일하다가도 과거 세탁하고 잘 살 수도 있지만, 누구는 그렇게 악질한테 걸려서 인생 조질 수도 있는 곳. 그런 곳이라고.”
“······.”
아리는 순간 섬뜩했다. 불과 일 년 전 그런 곳에서 일해보려고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녀는 윤하가 소개해준 가게에서 일하는 걸 고민한 적이 있었다.
“실수일 수도 있어요.”
“?”
“사람이 살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살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하고 사방이 막혀서 숨도 못 쉴 것 같을 때.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실수를 합니다. 판단력이 흐려지니까. 아니 상실하게 되니까. 그리고 사실 불법도 아니잖아요. 물론 그런 곳에서 일하다 보면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가게가 강남의 대로변에서 버젓이 영업하고 있고, 억대 자동차들이 매일 같이 들어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그 사람들도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게 아닌가요? 돈을 쓰러 가는 거니까 괜찮고, 돈을 받는 사람들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가요?”
사뭇 진지한 막내 파트너의 항변에 정도는 화가 났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를 바라봤다.
일리 있다. 결국 정윤하가 당하는 건 그녀가 술집에서 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고, 나가면서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술집에서 일했다고 사채업자한테 그런 식으로 당할 이유는 없었다.
“김 변, 근데 정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저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잖아요.”
정도는 그녀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그녀의 의도를 무시하지 않을 생각이다.
“처음 돈을 빌려준 사람을 찾아봐.”
“돈을 빌려준 사람···.”
“마담이든 가게 부장이든 하는 사람이겠지만, 보통 그런 식으로 많이 움직이니까.”
“알겠습니다.”
“최 부장님한테 부탁해 봐. 사람 찾는 거 진짜 귀신이신 분이니까.”
맞다. 최 부장님이 경찰이셨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참나-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놈은 또 처음이다. 왜? 차라리 공익변호사를 하지 그랬어.”
“변호사법 27조에 있지 않나요.”
“뭐? 하하하. 있지, 있어.”
변호사법 제27조. 1항 변호사는 연간 일정 시간 이상 공익활동에 종사하여야 한다. 2항, 변호사는 법령에 따라 공공기관, 대한변호사협회 또는 소속 지방변호사회가 지정한 업무를 처리하여야 한다. 3항, 공익활동의 범위와 그 시행 방법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한변호사협회가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