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그가 그 병실에 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듯했다
‘여긴 또 어디지?’
보이지 않는 유리 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이곳을 걷고 있다.
‘걷고 있다?’
‘사막? 아니면 물 위?’
밑을 내려다본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발뿐이 아니다. 손도, 몸도 보이지 않는다.
‘몸이 없는데, 나는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혹시 눈동자 두 개만 둥둥 떠 있는 거? 아니면 뇌와 눈동자가 두 개만?’
의아하지만, 내 존재에 관한 생각은 금세 사라진다.
머리 위로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우주.
그 안에 촘촘히 박혀있는 셀 수 없는 별들.
그 반짝거리는 것들을 보고 있으니 나는 정말 하찮게 느껴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들은 사실 수십, 수백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항성이 내는 빛이에요. 빛의 속도로도 수십, 수백 년이 걸리는 그곳에서 오는 빛을 본 것뿐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들을 봤을 때,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 저쪽 먼 하늘에 있는 별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니, 빛을 잃기 시작한 거다.
‘나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은평자애병원,
커피숍.
“근데 아까 그분들 진짜 뭘까요?”
“모르지 뭐.”
“진짜 조폭들일까요? 그 얼굴 크신 분은 그런 것 같기는 하던데.”
레지던트의 질문에 정낙준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VIP 병실에 오는 사람들 일은 모르는 게 속 편해.”
“왜요?”
“대학병원도 아니고 이런 서울 변두리 병원 VIP 병실에 묶는 사람들 뻔하잖아. 어쭙잖게 돈 좀 있는 졸부거나, 어둠의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지.”
“아-. 그럼 진짜 조폭인 건가요?”
“조폭인 거까지는 모르겠는데. 딱 보니까 각이 나오더구먼.”
“뭔데요?”
“VIP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 있지? 그 환자가 상속녀야.”
“상속녀요?”
“뭐 그렇다고 진짜 부자 이런 거는 아니고. 그냥 한 50억에서 100억쯤 있는 자산가 딸. 근데 저 딸이 저렇게 되면 상속권이 꼬이게 되어버리는 거지. 그래서 아마도 그 할아버지가 집사 같은 분 같은데, 딸이 저렇게 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거고. 아까 온 그 싸가지없게 생긴 변호사 있잖아? 아마도 거기가 상속권 뺏으려는···그래, 삼촌이나 고모 쪽 변호사일 거야.”
레지던트는 눈을 반짝이며 정낙준 선생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재미있는데요.”
“진짜?”
“네.”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네에?”
“구라야. 구라. 내가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아.”
“와- 순간 믿었는데. 근데 선생님 드라마 작가 같은 하셨어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 아니면, 웹소설 작가?”
“작가는 무슨···.”
“한번 써보세요. 요새 제 동기 중에서도 웹소설 쓰는 애들 몇 있는데. 돈 꽤 번대요.”
“그래?”
“네. 한 명은 하루에 딱 두 시간 투자해서 한 편 쓰고 올리는데, 월 천만 원 정도 들어오는데요.”
“뭐? 그렇게 많이 번다고?”
“네. 제목이 뭐였더라···‘중증내상센터’였나?”
“그래? 그럼 나도 한번···?”
징징- 징징-
“여보세요?”
-선생님, 김아리 환자 맥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VIP 병실로 빨리 좀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
“Thank you for the understanding. I will be there when you are here next week. I am certain that we can work this out in a productive way. Sure. No problem. I will see you then. Bye.”
딸깍.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서지우는 넷플릭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라나 나카지마와의 긴 통화를 끝냈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알맹이는 없는 대화였지만, 그래도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통화가 끝나자, 옆자리 정도는 큰 숨을 내쉬었다.
“휴- 얘기가 잘 된 것 같네요.”
“손해 배상 청구 없이 계약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아마도 새 작품 제작으로 대체할 것 같으니까, 미리 합의서 초안을 만들어 둬.”
“네, 알겠습니다.”
서지우의 지시에 대답한 정도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우, 벌써 11시네요. 댁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 회사 잠깐 들렀다가 가려고.”
“괜찮으세요? 피곤하실 텐데···.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괜히 나 때문이면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니요. 집이 근처라서 저도 잠깐 들렀다가 퇴근하겠습니다. 체크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그래, 그럼. 좋을 대로.”
미국에서 귀국한 서지우는 곧바로 <청아>의 공국현 대표를 만났다.
그런 뒤, 정도와 함께 아프다는 막내 파트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은평구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면회를 거절당했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기막힌 타이밍에 행방불명(?)이었던 이중기 작가가 최성태 사무장과 함께 그곳에 나타났다.
“근데 작가님 아까 좀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부장님도 평소답지 않으신 것 같고. 약주 하신 것 같지는 않던데.”
이상했다.
평소에도 이상한 말을 종종 하시는 분이니, 횡설수설하신 것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데, 의아한 것은 그 시간 거기에 나타난 점이었다.
게다가 어디 계셨냐는 말에 제대로 답도 못 하시고, 질문에 계속 글을 못 쓰겠다고만 칭얼거리시기만 하고.
“최 부장님이 어디서 찾았냐는 질문에 답을 안 하셨지?”
“최 부장님이요? 아···네. 안 했어요.”
최성태 부장도 계속 말문을 돌렸다.
평소 그런 분이 아닌데 말이다.
“왜 거길 나타나신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보니, 평소 잘 하지도 않는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그러네요.”
‘혹시 이것도 부작용인가? 내가 과거를 바꿔버려서···.’
“근데 그 의사들도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요? 왜 면회를 안 시켜준 거지? 예전에 우리 큰아버지 폐결핵으로 입원했을 때 보니까, 그냥 마스크 쓰고 위에 가운이랑 장갑 끼고 들여보내 주던데.”
전염성이 심한 경우였다면, 면회를 금지하고 환자를 클린룸에 격리했을 것이다.
저렇게 VIP 병실에 뒀다는 것은 그나마 어느 정도 전염성이 진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서지우 역시 의사들의 반응이 의아했다.
사실, 아까 병원에 있을 때, 넷플릭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함께 있던 민태이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이상하다.
온 세상이 그가 그 병실에 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듯했다.
“내일 아침에 유 과장한테 병원에 전화해서 정확하게 김 변의 상태가 어떤지 문의하라고 해.”
“네.”
“그리고 김 변 여동생한테도 연락해보라고 하고. 병원에서 말하는 거랑 차이가 없는지 확인하고,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
“네.”
서지우가 정도에게 지시를 내렸고,
정도는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유이헌 과장에게 병원에 연락해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다만,
정도가 회사에 도착했을 땐, <해결>의 막내 파트너는 이미 출근한 이후였다.
---*---
“야!”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 책상에 앉아있는 후배를 본 정도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셨습니까, 선배님. 헤헤.”
“야!”
“왜요?”
“너 폐결핵이라며?”
“네? 누가요?”
“누구긴 의사가 그랬지.”
“아닌데.”
“너 폐결핵 아니야?”
“네.”
“그럼 뭔데?”
“빈혈이래요.”
“뭐? 빈혈?”
“네, 급성 빈혈.”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
그는 다시 물었다.
“빈혈이라고?”
“네. 진단서 끊어드려요.”
“빈혈로 그렇게 아팠던 거야?”
“아니요. 몸살감기가 와서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마지막에 빈혈이 와서 쓰러졌어요. 그걸 보고 놀란 동생이 절 병원으로 옮겼고요.”
얼추 그럴싸하다.
“근데, 의사는 왜 폐결핵이니, 그딴 소리를 한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의사가 그랬다고요? 뭐 착각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어제 나랑 서 변호사님이랑 병원에 갔었잖아.”
“병원에요?”
“응. 김 변이 아파서 입원까지 했다고 하길래, 어젯밤 늦게 병원에 갔었어. 은평자애병원. 거기 맞지?”
“네. 근데 서 변호사님이 언제 돌아오셨어요?”
“어제. 입국해서 <청아>에서 미팅하고, 김 변 소식 듣고 바로 병원으로 움직였지.”
“아- 진짜요?”
“진짜지 그럼. 어제 병원에 이 작가님하고 최 부장님도 오셨어.”
“다 같이 병문안 오신 거예요?”
“응?”
그렇다고 할 수도 있긴 한데···. 다 같이 간 거는 또 아니고.
아무튼 상황이 복잡하다.
“근데 왜 안 보고 가셨어요?”
“뭔 소리야? 우리가 안 보고 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안 들여보내 줬다니까, 네가 폐결핵이라고 해서.”
“제가요? 폐결핵이요? 아닌데, 빈혈인데.”
“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VIP 병실에 앞까지 갔다가 의사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못 들어간 거야.”
“VIP 병실에는 왜요?”
“응? 뭐야 이건 또? 네가 VIP 병실에 있었으니까 거기로 갔지.”
“아닌데. 제가 VIP 병실에 묶을 돈이 어디 있어요? 그냥 일반 병실에 입원했어요.”
“엥? 진짜?”
더 혼란스럽다. 이제는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바로 그때, 아리가 미끼를 던졌다.
“혹시 저랑 같은 이름 환자 잘못 찾아가신 거 아니에요?”
“같은 이름?”
“그건가 보네. VIP 병실에 동명이인 환자가 있었나 보네요. 그 환자가 폐결핵이었고.”
“아······그런가···?”
미간의 깊은 주름.
헷갈린다.
“참나- 그런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시고 병문안을 오신 거예요?”
“응? 아니, 나는 그냥 선배님 따라간 건데. 선배님은···.”
“아무튼 저는 폐결핵도 아니고, VIP 병실에 있지도 않았어요.”
“어? 아···그럼, 다행인데···.”
다행히도 그렇게 결론이 난다.
분명 속 시원히 의문점들이 해결된 거는 아니지만, 중요한 거는 막내가 무사하게 돌아왔다는 점.
이렇게 건강히 돌아온 이상, 굳이 병원에 전화해서 확인해볼 이유는 없다.
우연치고는 기막히지만, 정말 동명이인이 VIP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면, 대충 납득은 간다.
정도는 설득시켰고, 이제 서지우를 설득해야 할 차례다.
“아, 근데 서 변호사님은요? 시차 때문에 늦으시나?”
---*---
강남 도산병원.
서지우는 아침 일찍 7년 전 간 이식 수술 당시 그의 뇌를 검진한 의사를 찾아 미국 라스베가스 병원에서 촬영한 CT와 MRI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샌드뷰 메티컬 센터에서 찍은 거라고?”
“네.”
나이가 제법 있는 의사는 서지우의 뇌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영상의학과 선생하고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이게 제대로 찍은 거라면···. 작년보다 확실히 커진 거 같은데.”
서지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왼쪽 해마가 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뭔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일단 이것만 가지고 판단을 내릴 수 건 아니라서. 괜찮으면 우리 병원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보고 싶은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