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33)

VIP 환자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가 사라졌다.

MJ 엔터 OTT 플랫폼 런칭 작품도 아니게 되었고,

연말 런칭 파티에서도 빠져있었다.

보통 계약서의 문구 하나 정도 삭제하면 작성자의 오류로 과거가 교정되었다.

영상이나 음성 파일 같은 경우는 증거가 없어지는 정도로 치부됐지, 일어났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태이의 기억을 바꿔주고 싶었을 뿐인데···.

과거가 완전히 바꿔버렸다.

6년 반 전 민태이와 결혼한 사실이 사라졌고,

그에 파생되어 발생했던 일들이 모두 교정된 듯했다.

이중기 작가님이 쓴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마저도.

“그래도 넷플릭스에서 한발 물러서 주네요. 미국 애들이라서 까탈스럽게 나올 줄 알았는데.”

바뀐 지금에도 <영화사 청아>와 이중기 작가님의 계약은 그대로 유지된 상태였다. 다만, 대신하여 <넷플릭스>가 들어와 있었다.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원고가 없어지게 되면서 다른 작품이 그 자리를 메꿨고, 메꾼 작품에 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원래 계획대로 <넷플릭스>가 파트너가 되었다.

문제는 그 다른 작품을 이중기 작가님이 중간에 엎어버린 꼴로 변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좀 벌었을 뿐이야. 작가님부터 찾아야 해.”

태이가 중간에서 중재해주었다.

사실 법률적으로는 큰 문제는 아니다.

아직 제작이 시작된 작품이 아니었기에, 받은 돈들을 이자와 함께 토해내면 해결될 수 있는 분쟁.

이중기에게는 충분히 그만한 자산이 있었기에 최악의 경우 돈을 주면 그만.

그래도 잘 마무리 짓지 않으면 업계 평판이 극도로 나빠질 수도 있었다.

징징- 징징-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이동 중이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근데 한국이신가요?

“네.”

-휴가 잘 다녀오셨나요?

“네. 부장님, 급하니까 빨리 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작가님 지금 어디 계신지 좀 알아봐 주세요.”

-이 작가...님이요?

“네. 춘천에도 안 계시고 서울 집이랑 부산, 통영에도 안 계신다고 하는데, 전화기는 들고 가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찾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아, 부장님, 하나만 더.”

-예, 말씀하십시오.

“김아인 변호사 지금 집에 있나요?”

-예?

“부장님이 김 변호사 집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요. 아닌가요?”

-아니요. 제가 다녀왔습니다.

“상태가 어떻던가요?”

-음···.

“부장님?”

-많이 아파 보이셨습니다.

“그래요?”

-네.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인가요?”

-대화하기가······.

전화기를 들고 있는 서지우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평소 대답할 때 이렇게 뜸을 들이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제가 찾아뵈었을 때는 힘들었습니다.

“그게 언제죠?”

-아···그게···.

“아녜요. 제가 직접 알아보죠.”

-어떻게 하시려고···?

“김아인 변호사 집이 은평구에 있었죠? 신라아파트였던가.”

-설마 직접 가시려고요?

“네, 급하게 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아······그럼 지금 가시려고···?

“네. 정확한 주소 기억하시나요?”

-정확한 주소···가···뭐였더라···.

오늘따라 유독 말끝을 많이 흐린다.

의아했지만, 서지우는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됐습니다. 제가 사무실에 전화해서 확인하죠. 그럼 이 작가님 행방을 찾아주세요. 그럼.”

-변호사님!

서지우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이번에는 최성태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왜 그러시죠?”

-사실, 김 변호사님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

은평자애병원 VIP 병실.

“일단 혈압, 호흡, 맥박, 체온 모두 정상이고, 혈액검사에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MRI 스캔에서 뭔가가 발견되었습니다.”

“뭐가? 암?”

“확진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암은 아닌 것 같고···솔직히 저희도 열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암이 아니면 뭔데?”

“그게···사람 뇌에는 해마체라는 부위가 있는데, 김아리 씨의 해마체는···.”

띠리링- 띠리링-

담당 의사가 아리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하는 도중, 이중기의 주머니에 있는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최성태다.

“미안허이, 정 닥터. 이거는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

“네, 받으세요.”

이중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중기입니다.”

-어르신.

“응. 왜? 최 부장.”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

전화기 반대편의 최성태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서지우가 귀국했다는 사실과 김아인(김아리)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하신다면 하시는 분이기에···. 집으로 갔다가 문이 열리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확인하실 분이라서요.

이중기도 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파서 집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지 못할 정도라면 응급상황일 수밖에 없기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서지우는 분명 119를 부를 것이었다.

-이모님이 오늘 밤 계신 것도 살짝 불안하고요.

그래서 병원을 언급했다.

그나마 들키지 않을 방법은 병원에 있었으니까.

-저번에 잠깐 얘기 나눈 대로 해보는 거는 어떨까요?

“알았네. 그렇게 할게.”

-아, 그리고 변호사님이 작가님을 급하게 찾고 계십니다. 저는 일단 어디 계신지 모른다고 얘기해두었습니다.

“알았어. 그건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하고 얘기해.”

-네.

딸깍.

전화를 끊은 이중기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정 닥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협조 좀 해줘야겠어.”

옆에 서 있던 VIP 담당 의사에게 요청했다.

---*---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하물며 그들의 냄새도 느껴지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거울 속에 갇힌 기분.

발버둥 쳐보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리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 맞다. 런칭 행사가 끝나고 할아버니가 사라지셨지. 으이구, 이 말썽쟁이. 그래서 내가 춘천 암자에 찾아갔는데 안 계셔서 사무실에 연락하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아! 인천공항에서 연락이 왔고. 찾아갔더니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다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거기에 갔다고 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갑자기 택시 안에서 그게 뭐냐고 이상한 소리를 하셨어. 그때 택시가 우리 집에 도착했고. 함께 내려서 우리 집으로 같이 올라가려던 중에···.’

쓰러졌다.

다 기억이 난다.

서지우가 미국에 간 것도,

최성태 사무장님이 정인이를 만난 것도.

‘내 비밀을 알아내셨어. 그런데도 말씀을 안 하고 계셨던 거야.’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중기가 담당의랑 하는 대화도 들려왔다.

「“이 아이가 지금 사정상 신분 노출이 되면 위험한 상황이야.”

“어떤 상황이길래···.”

“양동이파라고 들어봤어?”

“아···니요.”

“정 닥터야 양지의 엘리트 삶을 살았으니 잘 모르겠지. 모르는 게 맞고.”

“···.”

“지금 여기 누워있는 이 아이가 양동이파 두목 김양동의 숨겨둔 딸이야.”」

‘풉- 내가 누구 딸? 김양동? 할아버니 지금 뭐 하시는 거지?’

「“지금 유산 문제 때문에 이 아이를 찾으려고 조직에서 혈안이야.”

“아···.”

“그때 여기 있었던 양반 봤지?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남자. 얼굴이 그렇게 큰데 주먹이 얼굴만 한 사람.”

“아, 네.”

“그 사람이 성태라고 양동이파 넘버쓰리야.”

“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할아버니의 연기가 나름 괜찮은 모양이다. 담당의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워하는 조짐은 있어도 웃음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왜 우리가 환자 성별을 숨기고 김아인이라는 가명을 써달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지?”

“아, 예. 그러셨죠.”

“지금 방금 성태한테 온 전환데. 조직의 넘버투가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그 변호사 놈이 여기로 오고 있다네.”

“변호사요? 조폭 넘버투가 변호사요?”

“내가 그렇게 말했나? 그게 아니고, 조폭 넘버투의 변호사. 아무튼 설명하려면 복잡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어찌 됐건 내가 이 아이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여기 VIP 병실로 옮긴 거는 환자 신분을 철저하게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원장한테 받고 한 거니까, 정 닥터는 그놈들이 오면 내 부탁대로 해.”

“부탁이 뭔데요?”

“이 아이 병명은 폐결핵인 거야.”

“네?”

“폐결핵이면 환자를 보자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하라고.”

“아···.”

“어허!”

“아···알겠습니다.”」

종종 그렇게들 하는 경우가 있다.

유명인사나 재벌인 경우, 미디어 등으로부터 환자의 신변이나 상태를 보호하기 위해, 신분뿐만 아니라 병명을 위장하기도 한다.

「“법무법인 해결의 서지우라는 놈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병실에 들여보내서는 안 돼. 법무법인 이름만 딱 들어도 느낌이 오지? 심부름센터 같은 게.”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내 말 명심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병실에 들여보내면 안 돼. 이 아이 생사가 달린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놈들이 눈치를 채면 이 아이 유산이 날아가고 그렇게 되면 병원비를 못 받을 수도 있어.”

“앗!”」

‘서지우? 대표님이 여길 오신다고? 지금?’

---*---

“폐결핵이라고요?”

자신을 김아인 환자의 담당의라고 소개한 의사의 설명에 서지우가 다시 묻자,

“네.”

의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

“아니요.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따라간 정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흠. 폐결핵이라. 서울에서 서른 살밖에 안 된 남자가···. 폐결핵인데 의식은 왜 없는 거죠?”

“아, 그게 뇌에도···아까 누구시라고 했죠?”

“김아인 환자가 일하는 회사의 대표입니다.”

“아, 그러셨지. 변호사라고 하셨지. 근데, 변호사라고 해도 가족이 아닌 이상 환자의 상태를 알려드리기 곤란합니다.”

“방금 폐결핵이라고 알려주시지 않았나요?”

“아, 그건 들어가시면 곤란하기에···.”

분위기가 이상하다.

김 변호사 형편에 VIP 병실에 있는 것도 그렇고,

미리 연락한 적도 없는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요양병원에 있는 어머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쌍둥이 여동생이 있을 법도 한데, 보이지 않는다.

“그럼 환자 가족이 동의하면 제가 들어가 볼 수는 있는 겁니까?”

“네?”

“폐결핵 환자라도 마스크하고 장갑 끼면 면회가 가능한 거 아닌가요?”

“그건···.”

“윤 변호사, 사무실에 연락해서 김아리 씨 연락처 좀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서지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막내 파트너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갈 생각이다.

“지금 이미 면회 시간이 지나서···.”

“VIP 환자도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당황한 의사가 변명을 대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말만 꼬인다.

연기 경험이 없는 그한테는 역부족이다.

바로 그때,

“변호사님.”

VIP 병실 앞으로 (상황을 숨어 지켜보고 있던) 최성태가 나타났다.

“부장님이 이 시간에 여기는 웬일이시죠?”

“작가님을 찾았습니다.”

“벌써요?”

“네.”

“어디 계시던가요?”

그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었다. 최성태 뒤로 이중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너는 그렇게 찾을 때는 없더니만, 다 늦게 나타나서 웬 행패야.”

“어르신? 어르신은 왜 여기에···?”

“시끄럽고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 얼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정 닥터만 남긴 채, <해결> 식구들과 이중기는 병원 식당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