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33)

No More One Night in Las Vegas

“정말 이렇게 갈 거야?”

“응.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의사 말이 안정을 취한 다음에 비행기를 타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네 남자친구가 괜찮다고 하잖아.”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싫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영화사 청아> 건은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올라나와 좀 더 이야기해 볼 테니까.”

삭제 능력이 생긴 이후, 단순히 문서의 내용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억이 지워지고, 사람들의 기억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있다.

‘나와 관련된 것은 삭제하지 않으리라.’

일말의 양심 같은 것이기도 했고 내 인생에 대한 기억이 바뀌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인증명서를 지운 건 그 원칙을 깨고 한 첫 번째 행위였다.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래도 그 원칙을 깨고 한 행위가 목적을 이뤘기에 후회는 없었다. 설령 내가 한 행동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을망정 적어도 그녀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면···.

다만, 이제부터 내 행동의 결과로 바뀐 것들을 해결해야 할 뿐.

“돌아가서 바로 확인하고 연락할게.”

“돌아가서 바로 병원에 가.”

“잘 있어, 민태이.”

“잘 가, 서지우.”

영원히 다시 보지 않을 것도 아닌데,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른다.

“아, 나 좀 봐. 왜 울지. 하하.”

그러자, 이제 그녀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준다.

‘이젠 행복해야 해.’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는 그렇게 끝이 났다.

---*---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변호사님, <청아> 공 대표님이요.

“아, 미치겠네. 이래서 회사에는 잉여인력이 어느 정도 필요한 거야. 서 변호사님한테서 아직 연락 없지?”

-네.

“전화 다시 해보고, 받지 않으면 문자 하고 이메일 다시 보내봐. 진짜 급하다고 제목에 느낌표 세 개 아니 열 개 박아서.”

-네. 그럼 전화 연결할게요.

“응.”

띠.

“여보세요.”

-윤 변호사님, 넷플릭스(Net-flicks) 올라나 나카지마한테서 이메일이 또 왔습니다. 다음 주에 한국 들어온다고, 그때까지 이중기 작가님 스크립트 없으면 소송한대요. 상황이 심각합니다. 이런데, 작가님도 연락 안 돼, 서 변호사님도 연락 안 돼. 변호사님도 아시잖아요. 나 집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한 거 문제 생기면 나 진짜 한강 가야 해요.

“작가님하고 연락이 되었고요.”

-됐어요? 어디 계세요? 글을? 대본은 나온 거죠?

대본은 없다. 어디 있는지만 파악되었을 뿐.

“그건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다음 주 미팅인데, 그걸 이제 알아보면 어떡합니까?

“일단 무슨 일이 있든 다음 주 넷플릭스와 미팅에 참석해서 상황을 좀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듯싶습니다.”

-하— 그때는 너무 늦지 않겠어요?

공국현의 합리적인 질문에 정도는 할 말이 없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올라나 나카지마한테 들어온 이메일을 저희한테 좀 보내주시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바로 보낼 테니까, 보고 전화 주세요.

“네, 그럴게요. 들어가십시오, 대표님.”

딸깍.

“아, 미치겠네. 왜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둔 거지?”

답답한 나머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바로 그때,

징징- 징징-

서지우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

인천국제공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서지우는 정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선배님!

“어디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건데요.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공항. 이제 막 내렸어.”

-공항? 어디 공항이요? 제발 인천공항이라고 말해주세요.

“회사야?”

-네.

“혹시 공 대표님한테서 연락 없었어?”

-없었긴요. 며칠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연락하시는데. 조금 전에도 통화했어요. 근데 진짜 어느 공항이세요?

“공 대표님한테 전화해서 지금 그쪽으로 간다고 전해.”

-지금요? 그럼, 진짜 인천공항이세요? 앗싸!”

윤정수의 환호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서지우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상황이다.

“전화하고 너도 그리로 와.”

-네, 알겠습니다.

“김도 데리고.”

-아, 막내 지금 병가 중입니다.

병가?

“꽤 심하게 아픈 모양이에요. 내일이면 일주일째 결근입니다.”

일주일째?

“알았어. <영화사 청아> 파일들 외부에서 접속할 수 있도록 서버 열어놓고, 두 시간 뒤에 <청아> 건물 앞에서 봐.”

-옙,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지우는 막내가 일주일째 아프다는 정도의 보고를 잠시 곱씹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기막히다.

세상의 기억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하다.

서지우는 회사 서버에 접속했다.

---*---

은평자애병원.

아리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가 치료받고 있는 VIP 병실 안으로 최성태가 들어오자, 이중기가 인사를 건넨다.

“다녀왔어.”

“네.”

“여사님은 보내드렸고?”

“오늘은 거기서 주무실 거라고 하시네요.”

“왜? 뭔 일 있어?”

“그런 거는 아니고. 그래야 누워있는 김 변호사님의 마음도 편할 거라고 하시면서···.”

“참- 마음씨 좋은 분이야. 그걸 얘가 알고 얼른 깨어나야 할 텐데.”

이중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아리를 바라봤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안 하던가요?”

“똑같은 소리.”

‘딱히 이상한 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원인을 찾는 중이다,’

“오늘은 PET 스캔인가 뭔가 해보겠다고 데려갔다 왔어.”

“네···.”

엿새 전, 이중기와 함께 공항에서 돌아온 아리는 아파트 입구 앞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중기는 곧바로 119를 불러 가까운 병원으로 아리를 옮겼다.

응급 처치가 끝나고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병원 측은 입원을 권했고, 아리의 사정을 잘 아는 이중기는 그녀를 위해 VIP 병실을 요구했다.

사흘이 지나도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이중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최성태가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순간 당황했던 이중기는 그 역시 아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난 후 오히려 안도할 수 있었다.

최성태는 아리의 신상 관련하여 병원 측에 최고 수준의 보안 유지를 요구했고, 아리의 집을 찾아가 정은주 이모님을 안심시켰다.

회사에는 (본인 말고) 누가 찾아오지 않도록, 그렇다고 왜 출근하지 않냐고 불평하지도 않도록 적당히 둘러대어 놓았다.

전직 경찰이자 신임받는 로펌 사무장으로서의 경험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렇게 ‘응급 처치’를 잘해놓았지만, 문제는 계속 이렇게 둘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놈이 이거 빨리 일어나야 할 텐데···. 계속 이러고 있으면 더 이상 감추는 게 능사가 아니잖아.”

“예.”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서 대표한테 알리는 게···.”

최성태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그 결정을 아리 대신 내리는 것이 망설여질 뿐이었다.

이중기 역시 막상 말을 꺼내기는 했어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하긴 그놈 성격에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지. 쯧, 어쩌나···. 내일이라도 이놈이 당장 일어나주면 좋을 텐데···.”

“조금만 더 지켜보죠, 어르신.”

“그래야겠지. 아, 근데 최 부장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놈이 최 부장한테 이야기했어?”

대답하기 전, 최성태는 아리의 얼굴을 한 번 본다. 그가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아리는 몰랐다.

“아니요.”

“그럼? 나처럼 진작에 눈치를 챈 거야? 그런데, 최 부장은 왜 이놈을 지켜주는 건데?”

“···빚진 게 있습니다.”

“빚?”

“네.”

더 물으려던 이중기는 그만두었다. 세상에는 아무리 물어도 자신의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최성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털어놓게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따로 있다. 자신은 아니라는 걸 이중기는 안다.

“이놈은 알아?”

“모를 겁니다.”

“후훗, 아주 좋은 지원군을 얻었네.”

“어르신만큼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까요?”

그 말도 사실이었다. 이중기가 아니었다면, 아리는 <해결>에 입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당장, VIP 병실에서 이렇게 보호받으며 지낼 수도 없었다.

“모르겠어. 보면 볼수록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아이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최성태는 이중기의 말에 공감했다.

응원하고 싶은 사람.

그냥 잘 되었으면 하고 빌어주고 싶은 사람.

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원에 계속 계실 건가요, 어르신?”

“응. 있으려고.”

“괜찮으실까요? 하실 일이 있는 게 아니셨나요?”

“그깟 글. 영감이 떠오르기만 하면 하룻밤에도 써 내려갈 수 있는 거. 그리고 안 떠오르면 말면 돼. 지금은 이놈이 중요하지.”

이중기는 다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리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회사에 잠시 들어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뭘 와.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퇴근해.”

“아닙니다. 오늘 밤은 제가 있겠습니다.”

“아니야. 가족도 있는 사람이.”

“다 큰 딸 하나입니다.”

“괜찮아. 어차피 나갈 때도 없어.”

“그래도, 김 변호사님 쓰러지고 계속 병원에 계셨지 않습니까. 오늘은 제가 서겠습니다. 잠시 호텔에 가셔서라도 쉬고 오시죠, 어르신.”

“하- 그래? 그럼 그럴까?”

“네.”

---*---

<영화사 청아>의 사무실.

회의를 마친 공국현 대표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내일 넷플릭스 측하고는 제가 직접 통화를 해서 일단 진정시켜놓을 테니까, 너무 염려치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중기 작가님은 제가 내일 직접 찾아뵙고 작품 진행 상황에서 관해 정확히 알아보겠습니다. 만약 정말 진척이 없으면, 새 작품이든, 아니면 계약해지든 <청아> 측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다른 방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변호사님이 중간에서 고생이시네요.”

“아닙니다.”

“그럼 내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밤늦은 시각, <청아>의 사무실은 나온 서지우는 정도에게 곧바로 이중기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니까 춘천 암자에도 안 계신다고?”

“네.”

“서울 집에도 없고, 부산이나 통영 별장에도 안 계시고?”

“네.”

“흠. 그럼 마지막으로 연락된 게 김 변이 인천공항에서 모시고 간다는 거였다고?”

“네.”

“출국 안 한 거는 확실하고?”

“네. 출입국에 일하는 동창한테 사적으로 부탁해서 알아봤는데, 밀항하신 게 아니면 한국에 계신 거 같습니다. 아, 근데 진짜 어디 계시는 거지? 불법으로 위치추적이라도 해볼까요?”

“그런데, 김 변이 아프다고 맨 처음 연락한 건 또 어르신이라고?”

“네.”

뭔가 이상하다.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

띠리링- 띠리링-

“전화 어디에 거세요?”

“최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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