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3)

바뀌어버린 세상의 기억

「7년 전,

서울의 한 병원.

“고작 이 꼴로 나타나시려고 처자식까지 버리고 그렇게 가신 겁니까.

이럴 거면 뭐하러 연락하셨어요? 입이 있으면 말을 좀 해보세요? 술 때문에 간이 썩은 거지, 말 못 하는 병에 걸리신 건 아니잖아요.

정말 최악이네요. 비단 남편이나 아버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최악입니다.”

아버지는 끝내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빚쟁이들로부터 보호하려고 그랬다고, 자신이 연락한 게 아니라 병원에서 연락한 거라고, 그래도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없다고,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나를 말리기 전까지 변명 하나 없이 내가 뱉는 배설물들을 모두 받아내셨다.

배는 복수가 차서 올챙이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으면서 황달로 누렇게 뜬 얼굴이 부끄러운지 창문 밖 먼 산을 바라보며 호흡마저 조심스럽게 하셨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

옆에 있던 의사가 내가 기증자로 적합하다는 설명을 하자, 아버지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뭐가요?”

“네 간 안 받아.”

“흥. 왜요? 이제 와서 염치라도 차리려고요?”

“뭐라고 해도 상관없는데, 네 놈 간은 안 받는다고.”

“아니요. 드릴 겁니다. 이걸로 퉁칠 거예요. 낳아주신 거, 제가 한번 살려드리는 걸로 퉁치자고요.”

말이 왜 그렇게 나왔을까?

아버지를 잊고 살았었다. 어렸을 때는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내 나이 서른, 부모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없었던 세월이 훨씬 길었기에, 그리움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니, 나도 모르는 가슴 속 깊은 곳 어딘 가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안 받는다고! 죽을 때가 돼서 죽는 거야. 진작에 실패한 인생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정말 최악이네. 차라리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요. 살고 싶으니까 간 좀 떼어 달라고. 가진 거 하나 없는 주제에 있는 버린 자식 앞에서 있는 척하지 말고.”

버린 자식 앞에서 있는 척하지 말라고···그게 아버지한테 내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아버지는 끝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내일 하던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은 내 말에 따라 이식수술을 진행했다.

그리고 석 달 뒤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으셨고, 수술 후 내게 고맙다는 말 한번 한 적 없었다.

나는 기대했었던가?

모르겠다.

그래도 무언가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왜 그런 선택을 하고 살아오셨는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듣고 싶었다.

아닌 척하고 살아왔지만, 버려진 자식은 자기를 버린 아비의 심정이 궁금했다.

이제는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서지우 씨, 간 기능 수치나 사이즈 모두 이식수술 이전 상태로 거의 돌아왔습니다. 그 외 신장이며 다른 장기들도 문제없어 보이고요. 다만, 뇌에···.”

간 이식수술 후 받은 전반적인 검진에서 무언가 발견되었다.

“해마에 뭐가 있다고요?”

“좀 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새끼손톱 크기만 한 무언가가 발견되었습니다.”

“암인가요?”

“아직 뭐라고 확정하기에는 어렵습니다. 다만, 혈액검사 결과 등으로 비춰봤을 때는 악성 암세포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거···.”

해마체(海馬體).

이름 그대로 꼬부라진 해마를 닮은 부위로 뇌에서 기억 기능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술을 마시면 손상당하는 부위로 치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서지우 씨는 좌측 해마가 우측 해마보다 비정상적으로 큽니다.”

“수술 때문에 그래진 건가요?”

“이전 기록이 없어 100%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간 이식 때문에 해마에 문제가 생긴 거는 아닐 겁니다.”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나요?”

“혹시 최근 기억력이나 떨어진다거나 그런 적은 없으신가요?”

“딱히 그런 점은 못 느꼈습니다.”

“집안에 알츠하이머병을 앓으셨던 분은 없으셨나요?”

고아였기에 알 방법이 없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흠. 그러면 몇 가지 검사만 더 받아보고 악성이 아니면 그냥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보시는 걸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MRI와 PET 스캔 모두 받아왔지만,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

왜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라스베가스의 호텔 방에서 쓰러진 후,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처음 생각난 것은 아버지를 만나러 간 7년 전 병원에서의 일이었다.

---*---

라스베가스,

샌드뷰 메디컬 센터.

삐- 삐- 삐-

“(의사 선생님! 서지우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클라크 카운티 기록보관소에서 돌아온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들어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는데···.

“정신 좀 들어? 여기가 어딘 줄은 알겠고?”

나는 낯선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눈앞에는 민태이가 앉아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라스베가스, 샌드뷰 메디컬 센터. 도대체 뭘 먹은 거야? 의사 말이 술도 얼마 마시지 않다고 하던데. 과로라도 한 거야?”

그녀는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얼마나 됐어?”

“뭐? 네가 의식 잃은 지? 삼일.”

삼일···.

사흘씩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의사가 뭐래?”

“자기도 원인을 모르겠다. 그냥 히포캠퍼스(hippocampus:해마체)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세포가 보이고, 좌측 히포캠퍼스가 비정상적으로 부어있는 것 같다고만 했어. 오늘까지 깨어나지 않으면 두개골을 열어볼 뻔했어.”

그건 그전에도 그랬다.

“도대체 뭘 하고 이렇게 된 거야?”

“너한테 들어오는 전화를 받으려다가 쓰러졌어.”

“설마 빈혈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빈혈이야.”

“빈혈로 쓰러진 사람이 삼일씩이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혹시 알고 있었어? 니 뇌에 뭐가 있는 줄.”

“응.”

“심각한 거는 아니야?”

“응. 심각한 거 아니야.”

민태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지만, 동시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의사 말이 좀 더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한대.”

“한국 가서 할래. 봐주던 의사도 있고.”

한국 가서 한다는 말에는 그녀도 딱히 반박할 수 없다. 보험도 없는 그곳에서 사흘 동안 검진받고 누워있었을 뿐인데 비용이 이미 20,000달러 가까이 나왔다.

“그래, 그게 낫겠지. 그나저나 라스베가스에는 왜 온 거야?”

“응?”

“그리고 여기 왔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뭔가 이상하다···.

“그럼 이제 우리 괜찮아진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한동안 연락하지 않아서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러지 마. 무섭잖아.”

“내가 쓰러진 거는 어떻게 알았어?”

“네 전화를 보고 호텔에서 연락이 왔어. 가장 최근에 들어온 번호가 내 번호여서 걸었대. 얼마나 다행이야.”

“너는 왜 전화를 건 건데?”

“응? 아, 잘 아는 사람이 넷플릭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야. 같이 점심 먹다가 한국 제작사하고 생긴 트러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네 이야기가 나왔지 뭐야.”

그녀가 내게 설명해주는 사이, 병실 안으로 청바지에 카키색 재킷을 남자가 들어왔다. 테이를 ‘T’라고 부른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어깨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T, I just talked to the internal medicine doctor. His vitals are normal and the blood work result came out fine.”

(테이, 의사하고 방금 이야기하고 왔는데, 바이털 사인하고 혈액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래.)

그녀가 소개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 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왔어. 의사야, LA에 있는 시다스 사이나이 메이컬 센터의.”

“앤니용하세요. 저는 그녀 냄자친구 브라이언 캉입니다. 만나쏘 반가워요.”

···

“왜 그렇게 빤히 봐? 둘이 알아?”

“응? 아니야. 그냥···. 만나서 반가워요. 서지우라고 합니다.”

우려했던 것보다···

세상의 기억이 훨씬 많이 바뀐 거 같다.

“태이야, 혹시 내 전화기 어디 있는지 알아?”

---*---

3일 전, 서울.

은평자애병원.

“환자 바이털은?”

“120에 70. 37.1도. 호흡, 맥박 모두 정상입니다.”

“나이?”

“만 30세입니다.”

“음주나 다른 약물은?”

“혈액검사 나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보호자 말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대?”

“그냥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던 중에 갑자기 쓰러졌답니다.”

“빈혈?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외상은 없습니다. 쓰러질 때 머리 쪽으로 넘어지는 걸 보호자가 잡았다고 합니다.”

“보호자가 누구야?”

“할아버지라고 하는데요.”

“할아버지?”

“네.”

의식이 없는 것을 제외하곤 딱히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 일은 없어 보인다. 응급실 치프는 환자의 얼굴과 복장을 다시 한번 훑었다.

“여자지?”

“네.”

“근데 왜 이렇게 입고 있어?”

“그건 저희도···.”

“가슴을 저렇게 빡빡하게 묶고 있어서 순간 호흡곤란이 왔던 거 아니야? 쓰러질 때 정말 머리가 어디 안 부딪쳤대?”

“네. 그리고 부딪혔으면 뭐라도 흔적이 남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알았어. 혈액검사 결과 나오면 보고하고, 일단 보호자한테 동의서 받아서 MRI 한번 찍어보자.”

“네, 알겠습니다.”

---*---

<법무법인 해결>

“유 과장, 서 변호사님한테서 연락 없었지?”

“네.”

“아- 진짜 어디 가신 거지? 연락이 안 되네.”

“정말 제대로 쉬시려고 전화기 꺼 놓으신 거 아닐까요?”

“그럴 양반이 아니야. 그리고 지금 이중기 작가님 문제도 있는데, 이렇게 전화기를 꺼 놓으실 리가 없지. 아, 근데 진짜 이상하네. 이런 시기에 휴가를 쓸 사람이 아닌데···.”

정도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연락이 안 되는 또 다른 파트너에 관해 물었다.

“김아인 변호사는? 아직도 아픈 거야?”

“네.”

“심하게 아픈가 보네. 사흘씩이나 결근한 거 보면. 전화 걸어봤어?”

“네. 안 그래도 연락해봤는데, 아무도 안 받아요.”

“아무도?”

“네.”

“김 변한테 쌍둥이 여동생이 있잖아. 거기 연락해봤어?”

“네.”

“안 받아?”

“네.”

“흠. 맨 처음에 아프다고 이 작가님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했지? 같이 있다가 열이 나고 아파서 집에 데려다주셨다고.”

“네.”

“혹시 정말 많이 아픈 거 아니야? 집에는 아무도 없고. 걱정되네. 흠···. 안 되겠다. 오늘 퇴근하고 내가 한번 가봐야겠다. 유 과장, 김 변 주소가 어떻게 되지?”

“김아인 변호사님 주소가요. 은평구···.”

유이헌 과장이 기록에서 아리의 집 주소를 찾아 말해주려는 순간,

“변호사님!”

최성태 사무장이 그를 다급하게 부른다.

“네, 부장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부장님이요?”

“예, 제가 저번에 김 변호사님 댁에 뭘 좀 가져다드린 적도 있고 하니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그러실래요?”

“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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