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33)
  • 블랙아웃 (3)

    누가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도시가 아니랄까, 모래와 같은 색으로 지어진 거대한 군청 콤플렉스는 날씨만큼이나 건조해 보인다. 고작 230만 명밖에 안 되는 카운티 주제에 이만한 크기의 정부청사가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도 매년 4,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를 품고 있는 군의 청사라 생각하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 거대한 갈색 건물로 들어간 서지우는 기록보관소를 찾았다.

    “(6년 전, 혼인증명서 원본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증명서 번호 가지고 있어? 저기 있는 컴퓨터에 가서 검색하면 나올 거야.)”

    “(디지털 카피 본이 아니라, 원본 페이퍼가 보고 싶어서 말이지.)”

    동양 남자의 똑 부러진 요청에 기록보관소 직원은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묻는다.

    “(법원 명령이 없으면 곤란한데.)”

    없었다. 법원 명령을 구할 근거도 없었지만,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할 이유도 없었다.

    서지우는 삼등분으로 접은 백 불짜리 지폐를 자신의 명함 뒤에 숨겨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당사자인 혼인증명서야. 잠깐만 볼 수 없을까? 가지고 나갈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할 거야.)”

    직원은 재빨리 지폐를 자신의 주머니에 챙기고는 명함을 유심히 보는 척을 했다.

    “(변호사?)”

    괜히 한번 물어본다. 사실 돈을 챙긴 이상, 그가 변호사든 아니든 원본을 보여줄 생각이다. 그저, 허접한 구실이라도 만들 의도일 뿐.

    “(원본은 왜 보고 싶은 건데?)”

    “(원본에 내 영문명 스펠링 잘못 표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그건 디지털 사본에서 확인할 수도 있잖아?)”

    “(방금 확인했는데, 내가 가진 거랑 다르더라고.)”

    “(진짜?)”

    “(응.)”

    “(보여줄 수 있어?)”

    “(집에 있어.)”

    군청 직원은 서지우의 뻔한 거짓말에 피식 웃고는 그를 원본 서류들이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그러면 원본을 확인해봐야겠네.)”

    ---*---

    “작가님!”

    아리가 인천공항 내 치안센터에 도착했을 때 이중기 작가는 초췌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 김 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여기서 왜···?”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이중기는 피곤해 보였고, 무엇보다도 그를 보고 있는 눈들이 많은 곳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듯한 눈치였다.

    “며칠 전부터 공항에서 숙식하신 거 같더라고요. 저희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도 안 하시고.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작가님인 걸 알아봐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일이 더 복잡해질 뻔했습니다.”

    치안센터 경찰은 친절하게 이중기를 어떻게, 어디서 발견했는지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이중기가 왜 그곳에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제가 모시고 가도 될까요?”

    “네. 신분 확인되었으니까, 모시고 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리는 식사를 마친 이중기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다.

    ---*---

    클라크 카운티(Clarke County),

    기록보관실 창고.

    셀 수 없을 만큼 늘어져 있는 철제 책장에는 파일들이 담겨있는 수많은 상자가 보관되어 있다. 비록 수십 년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결혼 관련 서류들만 모아놓은 것이 이 정도이니, 한 달에 평균 만 쌍의 커플이 라스베가스에서 혼인을 올린다는 말이 실감 난다.

    “(‘S’번 복도, I789 상자를 체크해 봐.)”

    서지우를 안내한 직원은 그가 I789 상자를 체크하는 동안, ‘S’번 복도 입구에서 서 있었다. 현금 100불에 열람을 허락했지만, 괜한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 중이다.

    서지우는 십여 미터쯤 떨어져 서 있는 직원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상자 안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1분쯤 넘겼을 때, 파일 상자 중간에서 찾고 있던 혼인증명서 원본을 발견했다.

    「Marriage Certificate

    Clarke County, Nevada No. D28845

    This is to certify that the undersigned did on the 11th of May, 2016 at Wonderland Chapel, Las Vegas, Nevada, join in lawful wedlock Jiwoo Seo of Seoul, Korea and Tei Min of South Los Angeles with their mutual consent, in the presence of Elvis Presley.」

    단순한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 같다. 결심을 내리고 찾아온 건데도 막상 하려니 망설여진다.

    “(저기, 찾았어? 못 찾았으면 내가 찾아주고.)”

    뇌물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 서지우는 혼인증명서 원본 서류에 적힌 자신과 태이의 이름을 삭제했다.

    “(여기 없는데?)”

    “(뭐라고? 그럴 리가.)”

    ---*---

    아리는 초췌한 이중기를 데리고 택시에 올랐다. 이미 어두워진 밤, 춘천까지 내려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중기는 아리네 아파트에서 하룻밤 묵는 데 동의했다.

    “할아버지,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 궁금한 아리는 질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글이···써지질 않아.”

    잠시 머뭇거린 이중기는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힘없이 대답했다.

    “아이참- 그렇다고 거기 그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노숙하신 거예요.”

    “복잡하게 얽혀버린 기분이야. 도저히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글 쓰는 데 집중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잠시 쉬면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겠죠.”

    “그럴 것 같지 않아. 처음에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렇게 이어질 인연이 아니었어. 영우와 민이는 그렇게 다시 이어질 인연이···.”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에 관한 고민.

    이중기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을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이야기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할아버지. 생각하다 보면 또···.”

    “그렇게 다시 이어질 인연이 아니었는데.”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그의 상태가 이젠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정말 쓰기 힘들면 시간을 좀 두고 다시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근 1년간 작품 쓰느라 너무 고생하셨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작가님! 제 말 듣고 계세요?”

    아리가 격려의 말을 하고 있는 도중, 이중기 작가의 눈빛이 멍해졌다.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사람처럼 초점이 그의 동공에서 사라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왜? 왜? 무슨 일이야?”

    다행히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온 초점.

    신기하게도 몇 초 전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그의 낯빛이 그 짧은 사이 다시 밝아진 것 같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그럼.”

    “방금 쓰러지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왜?”

    “왜라뇨? 방금 다시 이어질 인연이 아니라는 말만 백번도 더 하시면서 눈알이 이렇게 뒤로 넘어가셨단 말이에요.”

    “내가? 언제?”

    “방금요.”

    “무슨 소리야. 그냥 재미있는 소재가 없나 생각 중이었는데.”

    “네에?”

    “갑자기 배가 고프네.”

    “네에? 좀 전에 공항 지구대에서 국밥 드셨잖아요.”

    “내가?”

    “작가님!”

    “아, 맞다. 먹었다. 그런데도 배가 고파. 내가 공항에서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남들이 남긴 빵 같은 거 먹고 지냈어.”

    “공항에서 지낸 것은 기억하세요.”

    “그럼 기억하지. 뭐야, 그 눈빛은? 지금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알았던 거야?”

    그랬다. 기억을 못 하는 줄 알고, 아리는 그가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해서 순간 겁이 났다. 그녀의 엄마도 그런 식으로 시작했으니까.

    “그럼 공항은 왜 가셨어요? 그건 기억나세요?”

    “이놈이 갑자기 왜 그래?”

    게다가 갑자기 변한 분위기도 그녀를 걱정케 했다. 분명 조금 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죽을상을 지었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생기가 돈다.

    “애초에 공항에 왜 갔는지는 기억이 나시냐고요?”

    “글이 안 써져서 갔지, 이놈아.”

    하- 다행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서지우 그놈 미국에서 돌아오면 나 좀 보자고 해.”

    “서 변호사님 미국 출장 가신 거는 기억나세요?”

    “이 새끼가 왜 이래? 야, 나 치매 아니야.”

    “겁을 주셨으니까 그렇죠.”

    “아무튼 출장 갔다 오면 나한테 좀 오라고 해.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못 쓸 것 같아. 완전히 막혔어.”

    휴우- 진짜 다행이다. 글을 안 쓴다고 하는 엄포를 놓는 게, 치매인 것보다는 훨씬 다행이다.

    “조금만 더 붙잡고 고민해보세요. 그러면 답이 보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은 돌아가신 내 옛날 글 선생님이 그러셨지. 글이 막히면 공항에 가보라고. 언제 떨어져도 그만인 저 무식한 고철덩이에 올라타서 몇 시간씩 누군가에게 날아갔다 온 사람들을 보고 있어도 글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할 이야기가 없는 거라고. 내가 지난 며칠간 공항에 있으면서 거기 나오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

    “그러면 우리 영우와 민이는 어떻게 해요?”

    “응? 영우와 민이가 누구야?”

    “네? 영우와 민이요.”

    “그러니까 영우와 민이가 누구냐고?”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요.”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는 또 무슨 소리야? 왜 자다가 봉창을 뚜드리고 그래. 너야말로 치매 아니야?”

    이게 무슨 말씀이지?

    “장난치시지 말고요. 할아버지가 쓰신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 OTT ‘티빅스’ 첫 오리지널 작품. 주인공 영우와 민. 기억 안 나세요?”

    “이 새끼가···너 갑자기 소설 쓰냐? 소설을 쓰면 썼지. 왜 소리를 질러.”

    아리는 이중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난이 아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은평구 신라아파트라고 하셨죠?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집에 도착한 택시.

    아리는 택시비를 결제한 뒤 이중기 작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집에 들어가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순간!

    “여기가 김 변네 집이야? 생각보다 후진 데···. 김 변, 왜 그래? 김 변!”

    그녀가 쓰러진다. 그리고···

    ---*---

    라스베가스의 호텔.

    사막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말이지 그날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럼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6년 반 전 태이와 올렸던 혼인을 증명하는 기록을 삭제했다.

    자신의 행위가 세상의 기억을 어떻게 바꿀지 서지우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실망한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죄라 여겼다.

    “미안하다, 민태이.”

    서지우는 야경을 바라보며 사각 잔에 가득 따른 위스키를 마셨다.

    띠리링- 띠리링-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민태이’, 발신자의 이름이 디스플레이에 표시된다.

    반쯤 마신 위스키 잔을 책상에 내려놓고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전화기를 집으러 일어선 순간,

    쿵!

    의식을 잃은 서지우는 목석처럼 카펫 바닥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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