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1)
「“내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은 줄 알아? 이렇게 지내면 내가 육십 살이 되어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그러면, 그때가 되면 내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
“······.”
“나 사실 혼인무효 신청한 적 없어. 그렇게라도 기록이 남아있으면 혹시라도 나중에 네 마음이 편해졌을 때, 나한테 돌아오지 않을까 했어. 근데 그날 깨달았어. 너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민태이······.”
“근데 그거 알아? 난 널 친구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지우? 이게 얼마 만이야? 한국에 로펌 차렸다는 소식은 들었어. 태이? 잘 모르겠는데, 나도 연락 안 하고 지낸 지가 꽤 돼서.
-(미스터 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미스 민으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맡고 있던 사건은 로펌 내 다른 변호사에게 인수인계되었습니다···.)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나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것 같았다.
찾아야 했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래야 우리 둘 다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
팡! 팡! 파바바바박!
경기도 하남,
MJ 미디어 센터, 컨벤션홀.
“이곳 MJ 미디어 센터가 앞으로 MJ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홈이 될 것이고, ‘티빅스’에서 런칭 하는 작품들의 스튜디오가 될 것입니다! 총면적 290,000 m2, 약 88,000평으로 플로리다주에 있는 디즈니 스튜디오에 맞먹는 규모를 자랑하고, 동시에 다섯 작품을 촬영할 수 있는 세트장을 갖추고 있으며···”
무대에 선 여혜린은 마치 유명 IT 회사 대표처럼 자신이 야심 차게 시작하는 OTT ‘티빅스’와 MJ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에 대해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2022년 12월의 마지막 주, 모든 방송국이 연말 결산과 시상식 등으로 바쁜 그 시점, 대한민국의 모든 연예부와 경제부 기자들은 그곳에 와 있었다.
기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소위 잘나간다는 연예인들도 모두 초대됐다.
“여 대표님 무대가 잘 어울리시네요. 연예인 같으세요.”
다른 홀에서 영상으로 여혜린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보고 있던 아리가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정도가 대꾸했다.
“예쁘시지, 형수님. 성격이 조금 그래서 그렇지.”
형수님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아리는 그냥 넘어갔다.
“성격이 왜요? 저번에 잠깐 이야기 나눴을 때는 괜찮았는데.”
“안 보여? 나는 보이는데.”
“뭐가요?”
“욕심. 야망. 지금 이 시점에 이렇게 대한민국 기자들과 연예인들 다 불러버리면 다른 방송국들은 어쩌라고.”
듣고 보니 그렇다. 물론 하루뿐인 행사이니 내일이면 또 다른 곳에 갈 수 있겠지만, 오늘 행사로 사람들은 연말까지 ‘티빅스’와 ‘MJ 스튜디오 작품’들만 이야기할 것이 뻔했다.
여혜린이 의도한 바였다.
“작가님은?”
“오셨어요.”
“안 오실 것 같더니, 결국은 오시게 했네. 수고했어. 지금 어디 계셔?”
“<영화사 청아>에서 작가님 의전 봐주기로 해서 아마 그쪽 대기실에 계실 거예요.”
“괜찮겠어? 안 가봐도? 하긴, 변호사가 매니저도 아니고 제작발표회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아까 잠깐 들렸는데, 작가님 기분은 괜찮으신 것 같아요. 지난 한 달 글이 안 써진다고 투정 부리셨는데, 꼬인 거 푸셨나 봐요. 오늘은 기분이 괜찮아 보이세요.”
“다행이네.”
“근데,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
“아, 일하시러.”
“일하시러요?”
“응. 스쿠터 그레이가 왔어. 원래는 일정에 없었는데, 갑자기 왔다고 하네.”
“그럼 혹시 OMG 계약 건?”
“응.”
“그거 다음 주에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왔으니까 하는 거지. 아무튼 일복도 많아.”
“그럼 우리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혼자 가시겠다고 우리더러는 그냥 즐기래. 우리도 게스트로 초대받은 거라고.”
“그래도 대표님은 일하시는데, 우리는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요?”
“정히 할 일 없으면 업계 사람들한테 명함이나 돌리라고 하시네. 그럼 나는 우리 수지 님이나 찾아볼까나-.”
---*---
MJ 미디어 센터 내 대표사무실.
여혜린 대표가 컨벤션홀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동안, 서지우는 유명 음반 기획자 스쿠터 그레이, 그의 변호사 그리고 의 차동균 비서실장/사내 변호사와 함께 OMG를 비롯해 산하 레이블들의 해외 진출 관련해서 법률적인 부분들에 관한 논의를 끝마쳤다.
“(추가 질문이나 요청 사항 없나요?)”
서지우의 질문에 스쿠터 그레이는 동행한 자신의 변호사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없어요. 깔끔하네요.)”
“(그렇다면 바로 서류 수정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지금?)”
“(문제 있나요?)”
“(오늘은 파티인 줄 알았는데.)”
“(나도 그랬어요.)”
서지우의 진지한 표정에 스쿠터 그레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더 논의할 게 없는 것 같으니, 다음 주까지 기다릴 필요 뭐 있나. 바로 사인하죠. 채드, 아이린의 프레젠테이션은 언제 끝나지?)”
“(십 분이면 끝나.)”
스쿠터 브라운의 질문에 차동균(채드)는 혜린의 스케줄을 확인해주었다.
“(그럼, 저는 서류 수정에서 삼십 분 뒤에 오겠습니다.)”
회의 마치고 자리를 일어나려는 서지우에게 스쿠터 그레이는
“(들은 거랑 같네요.)”
라고 건넸다.
“(무슨 말이죠?)”
“(아, 칭찬이었어요. 테이한테 들었어요, 실력이 있는 변호사라고. 한 달 걸릴 일을 삼 일 안에 해결해줄 거라고.)”
테이?
“(지금 테이라고 했나요? 테이 민?)”
“(네. <데이비스 앤 마이어>의 테이. 둘이 친구였다고 들었는데?”)
친구···.
“(혹시 언제 그녀와 대화했나요?)”
서지우의 질문이 의아한 듯 잠시 쳐다봤지만, 그는 순순히 대답해준다.
“(일주일 전쯤? 한국 스케줄 픽스되면서 통화했는데. 왜 그러죠?)”
“(그녀가 지금 안식년 중이라고 알고 있어서요.)”
“(아, 맞아요. 근데 개인적으로 연락했죠. 나를 다른 변호사한테 떠넘기려고 하길래, 그러면 다른 로펌에 간다고 했더니, 개인 연락처를 줬어요. 그녀가 아니면 <데이비스 앤 마이어>에게 내 일을 맡길 이유가 없어요.)”
사람이 운명이란 참.
“(그녀가 지금 혹시 어디 있는 알 수 있을까요?)”
“(시애틀에 있다고 내게 말했는데. 거기 언니가 산다고.)”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묘한 곳에 열쇠가 떨어져 있다.
---*---
여혜린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한 행사는 고리타분(?)한 발표회를 끝내고 어둑어둑해질 때쯤 메인 이벤트로 넘어갔다. 애프터파티는 컨벤션홀과 스튜디오 프라이빗 라운지 두 곳에서 열렸고, 컨벤션홀 입구에 깔린 레드카펫을 밟으며 입장한 유명인사들은 VIP 파티가 열리는 프라이빗 라운지로 향했다.
“작가님!”
“어, 아ㄹ...김아인 변호사!”
온종일 피곤한 일정에 시달렸던 이중기는 아리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프라이빗 라운지에 그녀를 만난 이중기는 본명을 부를 뻔했다.
그녀가 재빨리 눈짓했고, 다행히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오셨네요. 바로 내려가실 줄 알았는데.”
“김 변 때문에 왔어. 왔는데 얼굴을 봐야지.”
바로 그때, 윤정도가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르신, 수고하셨습니다.”
“말도 하지 마. 네놈 대표한테 말해, 제작발표회 같은 거 다시는 참석 안 한다고.”
“그래도 말씀 잘하시던데요.”
“봤어?”
“그럼요. 어르신 일정만 챙겼는데요.”
정도의 설명에 이중기는 기분이 좋다.
“그런데 느그 대표는 어디 있는 거야? 얼굴이나 좀 보고 내려가려고 했는데.”
“좀 전까지 저기서 여혜린 대표랑 얘기하고 계셨는데···.”
돌아보니 좀 전까지 있던 곳에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는다.
“아우- 알았어. 나는 이제 헌 클라이언트라 이거지.”
“아이 또 말씀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해결>의 제1호 클라이언트이신데요.”
“말로만? 됐고, 그놈한테 나중에 전화나 하라고 해. 내가 물을 것이 좀 있으니까.”
“뭐요?”
“됐어, 너한테 물을 거 아니야. 김 변, 나 갈게.”
“벌써 가시게요?”
“말했잖아. 김 변 얼굴 보러 굳이 온 거라고.”
“차량 준비해드릴까요?”
“아니야. 아까 공 대표가 준비해 준 차가 앞에 기다리고 있어.”
재미있는 노인. 제작발표회 때는 영국 신사처럼 근사한 체크무늬 양복을 입고 나왔는데, 정작 애프터파티에는 개량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이렇게 곧바로 춘천의 암자로 내려가려고 그랬다고 하기에는 개량 한복의 색이 너무 화려하다.
“재미있으신 분이야.”
“네.”
라운지 밖으로 향하는 이중기의 뒷모습에 대고 한 말에 아리가 맞장구를 쳐준다.
“와- 근데 진짜 업계 거물들은 다 왔네. 아까 저스틴 비버(Justin Beaver) 온 거 봤어?”
“네.”
“맨날 그룹의 사활을 걸었다고 하더니 진짜인가 보네. 런칭 파티에 이 정도 돈을 쏟아부을 정도면.”
“그래도 시장의 평가는 긍정적인 것 같던데요.”
최근 와 주가 둘 다 상승세를 타고 있다.
“뚜껑은 열어봐야지.”
콘텐츠 회사는 콘텐츠에서 승부가 난다. 결국 ‘티빅스’의 성공은 런칭 오리지널 작품들의 승패에 달렸고, 그중 간판급인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의 흥행이 정말 중요했다.
“잘 될 거예요.”
“기도하는 거야?”
“아니요. 예언하는 건데요.”
“너 작가님 진짜 좋아하는구나.”
“작가님도 좋지만, 저 ‘원라베’ 팬이에요.”
“‘원라베’는 또 뭐야?”
“‘원나잇 인 라스베가스’를 줄여서 ‘원라베.’”
“공식적으로 그렇게 줄이기로 한 거야?”
“아니요. 제가 그냥 맘대로 한 건데.”
“와- 찐팬이네. 네 말대로, 진짜 잘 됐음 좋겠다. 혹시 또 아냐 그러면 우리 어르신 작품들 옛 소설까지 다 할리우드 진출하고, 우리는 또 일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내년은 더 일이 많아지고.
“그런데 대표님은 진짜 어디 가셨어요?”
“모르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저기 계셨는데.”
정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지만, 서지우는 어디에도 없다.
“김.”
“네?”
“근데 그 턱시도는 어디서 한 거야?”
“이거요? 그때 얘기한 동네 양복점. 빌렸어요.”
“동네 양복점에서 턱시도도 있어?”
“네.”
“빌린 거 치곤 너무 몸에 딱 맞는데, 거기 진짜 한번 가보고 싶다. 거기 이름이 뭐라고?”
“아···. 트랜···스···양···. 아! 남수지 씨다!”
“어디? 어디?”
---*---
MJ 미디어 센터 낸 대표사무실.
여혜린은 서지우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다.
“OMG 건은 고마워. 도무지 다른 데 맡길 수가 없어서···.”
인연이라는 것이 참 흥미롭다.
한때는 부부였다가, 그다음엔 남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있다.
과연 이게 둘의 관계의 끝일까?
모를 일이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뭔데?”
“정말 우리 회사 자문 안 맡을 거야? 언제까지 변호사 둘 데리고 일할 건 아니잖아.”
“대형이 돼도 MJ 일을 맡을지는 모르겠는데.”
“튕기기는.”
여혜린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서지우도 안다.
“본론이나 말해.”
“훗. 온종일 정신없어서 잠시 둘이 옛이야기나 하면서 쉬다 가려고 했더니만.”
“몇천억을 투자한 사업 런칭 행사에 당신이 쉰다고? 그럴 리가.”
“하하. 알았어. 말할게.”
“···.”
“나 ‘The Dynasty’에 관심이 많아. 론 실버하고 자리를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