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33)
  • 수완 좋은 할아머니

    “김 변, 다음 주 ‘티빅스’ 런칭 파티에 입고 갈 턱시도 준비했어? 양복 입고 가도 들여보내 주기는 하겠지만, 여 대표님께서 애프터파티에는 꼭 포말(formal: 연미복 등 격식에 맞춰)하게 입고 오라고 당부에 당부를 했대. 거기 임원들도 턱시도 구하느라 난리도 아니래. 김 변은 준비됐어?”

    아까부터 ‘티빅스’ 런칭 파티에 떠들고 있는 윤정도. 설레나 보다.

    반면 아리는 최성태 부장 때문에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상태이다. 정도가 이야기한 것의 반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김 변도 설레는구먼. 설렐 만하지 대한민국에서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다 온다는데. 듣기에는 작년 여 대표 생일 파티도 장난 아니었대.”

    ‘알아내신 걸까? 내가 김아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셨을까?’

    ‘그런데 왜 말씀을 안 하시지?’

    ‘아직 정확하게 확신할 수가 없으셔서?’

    ‘어찌 됐건 정인이를 찾아갈 정도면 조만간 알아내실 게 분명한데 ···.’

    “김 변!”

    “네?”

    “오늘 왜 그래?”

    “왜요?”

    “아까 아침에는 부장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를 않나. 지금도 정신줄을 놓고 있는 거 같아. 집에 무슨 일 있어?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셔?”

    “아니요.”

    “근데 왜 그래? 평소 같지 않게.”

    거짓말한 걸 들켰는데, 아직 선생님이 호출하지 않은 기분이라서. 그래서 불안하다.

    “저도 파티가 기다려져서요.”

    “역시.”

    “아, 그래서 턱시도는 구했어?”

    “아니요. 아직이요.”

    “살 거야? 살 거 아니면, 우리 누나가 결혼할 때 이용한 드레스샵 알려줄게. 내가 얘기하면 가봉비만 받고 대여해줄 건데.”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함부로 맡길 수 없는 몸이다.

    “아니요. 가는 데가 있어요.”

    “김 변이 늘 양복 맞추는 데?”

    “네.”

    “거기 나도 소개해주라. 김 변 옷들 보니까 괜찮던데. 어디야?”

    “네에? 에이, 변호사님은 백화점에서 맞추시잖아요. 수입 원단 사용하시고. 여기는 그런 급은 아니에요. 그냥 동네 재단하시는 분인데, 워낙 오래 알고 지낸 분이라서···.”

    “그래? 솜씨가 좋으신 분이네. 김 변 옷들 보면 되게 스타일리시해. 디자이너 옷 같고. 뭐랄까, 몸매를 딱 잡아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중에 시간 날 때 나도 알려줘. 나도 한번 가보게.”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텐데···.”

    “뭐야? 왜 이렇게 꼭꼭 숨기려고 해?”

    “아녜요! 숨기려고 하는 거!”

    제 발이 저렸다. 숨기려고 했다는 말에 아리의 목소리가 순간 이상하리만큼 올라갔다.

    “오늘 진짜 이상하네. 뭐만 하면 발끈하고.”

    “그런 거 아닌데···.”

    쥐 죽은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이상한 거 맞다.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

    “뭔지 모르겠는데, 잘 해결됐음 좋겠네. 아무튼 이따 좋은 일 있을 거니까, 기대해.”

    정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휴게실을 떠났다. 머쓱해진 아리는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같은 날,

    퇴근 시각.

    “부르셨나요?”

    서지우가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아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보통은 방으로 부르는데, 그날은 회의실로 불렀다.

    “응, 앉아.”

    아리가 앉자, 서지우는 서류철 하나를 그녀의 앞에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올해 김 변이 맞은 사건들이야.”

    서류철 안에는 아리에게 배당되었던 사건 목록들이 적혀있고, 각 사건의 매출액이 기입되어 있다.

    생각보다 많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건을 했었던가?’

    “잘해줬어. 빨리 적응해줬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아리가 잘해준 건 사실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클라이언트인 이중기를 작가를 전담했고, 파투가 날뻔한 <꿈쟁이 스튜디오> 딜(deal)도 재치 있게 해결했다.

    정도가 발을 다치는 바람에 그를 커버에서 외부에 미팅에 많이 참석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완전기억능력과 공감능력은 아주 유용했다.

    다행히 소송 건이 별로 없었던 점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애초에 소송이 많은 로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 달에 서너 건은 정도는 법원에 갈 일이 생기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뜸했다.

    그렇다고 매출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5년 전 창립 이래 죽 이어가고 있는 상승세를 그대로 이어갔다.

    게다가 ‘The Dynasty’ 프로젝트의 총괄 자문 로펌이 되면서 굵직한 레비뉴 스트림(Revenue Stream: 수익원)이 생겼다.

    “윤하고 얘기를 나눠봤는데, 김 변이 어수선한 상황에 들어와서도 막내 파트너 역할을 기대 이상 잘해줬다는 것에 동의했어.”

    사실이었다.

    어떨 때는 조금 황당하리만큼 미숙했지만, 큰 사건, 특히나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건에서는 강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해결>은 법보다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로펌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결정했는데···.”

    그제야 서류철 안에 꽂혀 있는 하얀 봉투가 아리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원래는 입사 때 대출을 사이닝보너스 형식으로 하기로 했잖아.”

    “네.”

    그래서 올해는 보너스를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까먹고 있었다. 매달 월급으로 나오는 돈 만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봉투를 열어보니 수표가 다섯 장이 들어있다.

    “일단 올해는 반만 변제하는 거로 정했어.”

    “네?”

    “내년에도 올해처럼 열심히 해.”

    수표 다섯 장과 함께 들어있는 명세표를 확인해보니, 올해 아리에게 지급된 보너스는 1억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입사 때 받은 대출금액을 갚고 올해는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것이 맞는 건데.

    두 선배가 아량을 베풀었다. 올해는 대출금액에 반만 갚는 것으로 해주면서 1억 원 보너스의 반을 지급해 준 것이었다.

    “왜? 문제 있어?”

    아리가 벙찐 표정으로 명세표만을 보고 있자, 회의실을 나가기 전 서지우가 물었다.

    “아니요.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라고 주는 거야.”

    그렇게 서지우가 먼저 회의실을 나가고 아리는 봉투 안의 수표와 명세를 계속 바라봤다.

    돈.

    애초에 이것 때문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존재했다.

    아리는 이제 그곳이 좋았다.

    그곳의 구성원인 것이 좋았다.

    ---*---

    동대문, 광장시장.

    <트랜스 양복점>

    “왔어?”

    “네.”

    “안 그래도 왜 안 오나 했다.”

    할아머니는 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요?”

    “날씨가 추워졌잖아. 뭐 입고 다녀?”

    “올 초에 맞춘 양복들 입고 다니는데요.”

    “아니, 양복 위에.”

    “양복 위에요? 이 롱패딩···.”

    “뭬야! 내가 재단한 슈트 위에 이런 후줄근한 롱패딩을 입는다고!”

    양복점 할아머니는 버럭 화를 내셨다.

    뭘 잘못하였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리는 고개를 숙였다.

    “안돼···나요?”

    “당연히 안 되지. 명품 옷으로 쫙 빼입고 싸구려 백 드는 여자 봤어?”

    “아니요.”

    “SPA 브랜드 옷을 입어도 백은 비싼 거를 입는 거야. 백만 원짜리 슈트 입고 그 위에 20만 원짜리 롱패딩을 입으면 되겠어? 안 되겠어?”

    “그럼 뭘···입나요?”

    “당연히 코트지. 이리 와, 서.”

    할아머니는 아리를 거울 앞으로 부르고는 수치를 재기 시작했다.

    “검정으로 할 거야? 아니면 카멜색으로 할 거야?”

    “카멜···.”

    “진정한 남자는 검정이지. 검정으로 해. 그게 매칭하기도 편해.”

    진정한 남자···?

    “아, 네. 그렇게 할게요.”

    “돈 있지?”

    “네?”

    “이왕 하는 거, 좋은 거로 하자고.”

    “얼마···?”

    “원단가만 팔백구십만 원인데. 내가 재단비는 받지 않을게?”

    “헉!”

    “왜 비싸?”

    비싸다. 지금 천만 원짜리 옷을 추천하셨다.

    “네···.”

    “검정은 비싼 거로 해야지 아니면 폼이 안 살아. 그리고 캐시미어로 된 걸 입어야 저딴 후줄근한 패딩에 손을 안 대.”

    “아···네.”

    “못 할 것 같으면, 다른 원단 보여주고.”

    장삿속에 무턱대고 비싼 거를 추천하는 분이 아니다. 여태껏 추천하는 대로 해서 손해 본 적 없다.

    “알겠습니다. 그걸로 할게요.”

    “잘 생각했어. 로로피아나 캐시미어 원단을 입고가면 어딜 가도 무시하지 못할 거야.”

    “네, 잘해주세요.”

    무뚝뚝한 할아머니지만, 아리가 추천대로 하자 기분이 은근 좋다.

    “뭐 더 필요한 거는 없어? 장갑이라든가, 목도리는?”

    “장갑도 만드세요?”

    “응”

    “그건 가죽세공 아닌가요?”

    “왜? 양복 하는 데서 가죽세공도 하면 안 돼?”

    “아니요. 그런 법은 없죠. 장갑할게요. 그런데요, 할아머니.”

    “혹시 팔백구십만 원짜리 코트 했다고 서비스로 해줄 거라는 기대 말아. 진짜 재단비 안 받고 해주는 거니까.”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서비스로 만들어달라고 부른 건 아니었다.

    뭐든 척척 다 만들어주고, 소개해주는 할아머니.

    아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근데 그건 아니고요.”

    “뭐?”

    “혹시 잘 아시는 병원이나 의사 선생님 계시나요?”

    “왜? 수술하게? 결정했어?”

    “네에?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근데 의사는 왜?”

    “계세요?”

    “있어.”

    “아, 그럼, 혹시 그분이 건강검진서 같은 것도 써주시고 하시나요?”

    “응.”

    “진짜요?”

    “자기 병원이 있는 의사인데 검진서 하나 못 써줄까 봐.”

    “그럼 혹시···.”

    “왜 이렇게 뜸을 들여? 후딱 말해.”

    “···여자인 거를 남자인 거로 해서 작성해주실 수도 있나요? 성별 표기를 다르게 해서.”

    아리의 질문에 할아머니는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봤다. 할아머니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아리가 포기하려는 순간,

    “역시 안 되겠···.”

    “돼.”

    할아머니는 의도를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짜요?”

    “국가기관 제출용이야?”

    “아니요. 회사요.”

    “그럼 사문서네. 보관용도 아니고.”

    “네.”

    “혹시 본인 명의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 명의야?”

    할아머니는 마치 아리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

    “···다른 사람이요.”

    “그럼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니네.”

    “네?”

    “문서를 위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할아머니의 말에 아리는 그동안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기록만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건강검진을 받은 후, 결과표에 남성이라고 표시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비록 회사제출용 서류는 상세 검진 결과를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잠깐. 혹시 건강보험공단에도 제출해야 하는 거야?”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흠-. 그럼 결국 병원이 필요하기는 하겠네.”

    “그런 데가 있을까요?”

    할아머니는 아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대답했다.

    “있지.”

    단순히 양복만 만들어주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구세주다.

    그때 헤어샵에서 일했을 때, 이분에 대해 듣게 된 것이 어쩌면 운명 있었을 수도.

    “대신 비싸.”

    “괜찮아요. 돈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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