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아버린 최성태
“부장님, 안녕하세요. 한우 세트는 잘 받았어요. 그냥 저 주셨어도 됐는데, 굳이 집에 배달까지 해주시고···. 덕분에 오늘 아침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 동생도 맛있게 먹었어요. 진짜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왜 몰랐을까? 저렇게 뻔히 보이는 것을 왜 몰랐을까?
김아인, 아니 김아리를 보고 있는 최성태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아···네.”
“그리고 예나 씨 유튜브 10만 구독자 달성 축하드려요.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는 것 같아요. 콘텐츠도 다양해지고. 응원한다고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고 하는 하지만 고등학교 중퇴인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서······.
그것보다도 저렇게 착한 사람이 왜 이런 게 위험한 짓을 하는 거지?
진실을 알아버렸지만, 여전히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까톡. 까톡. 까톡.
[예나: 아빠, 아리 언니가 또 슈퍼챗 보내줬어.]
[예나: 나 이거 받아도 되는 거지?]
[예나: 근데 언니 진짜 실력 좋은가 봐. DM으로 셀프 염색 팁 몇 개 알려 주셨는데, 완전 꿀팁이야.]
차라리 몰랐을 때가 나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과감한 건지, 순진한 건지. 이렇게 얽히기 시작하면 들킬 확률이 더 높아질 텐데···.
하나는 분명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딸을 도와줬다는 사실.
최성태는 이제 불안하기 시작했다. 이 시한폭탄 같은 비밀이 언제 터질지가.
하나 확실한 건 절대로 그가 터트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부장님.”
“···.”
“최 부장님!”
“응?”
“아침부터 뭘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아, 아니야. 왜?”
“저번에 건강검진 받은 기록 가져다주신다고 하고는 안 가져다주신 것 같아서요.”
“내가 아직 안 가져다줬나?”
“네, 파일에 없습니다.”
“미안. 내가 내일은 꼭 가지고 올게.”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드라인이 있는 거는 아닌데, 그래도 요새 좀 바쁘신 거 같아서···.”
“알았어. 내가 내일 꼭 가지고 올게.”
“네.”
그때 갑자기 문뜩 떠오르는 질문.
“유 과장.”
“네?”
“혹시 김아인 변호사님 건강검진 기록 제출했어?”
“아니요. 아직이요.”
하— 정말이지 어쩌시려고···.
“왜 그러시는데요?”
“응. 아니야. 아무것도.”
---*---
“완전기억능력을 가져도 잊어버리는 게 있나? 아니면 긴장을 안 한 건가.”
부산 야유회 때 정도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대표와의 출장은 전부 막내의 몫이 되었다. 가까이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직접 보고 배울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장의 연속이라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외부 회의에서 돌아오는 차 안, 서지우는 아까 회의 때 그녀가 저지른 실수를 언급했다.
“죄송합니다.”
완전기억능력이라고 해도 인간이 AI는 될 수는 없다.
핸들해야 하는 사건이 많아졌고 갑자기 투입되는 미팅도 많아져서 챙겨 나와야 할 계약서를 깜빡하고 말았다.
“MRI 스캔은 받았어?”
왜 갑자기 주제가 거기로···.
“예? MRI 스캔이요?”
“받아봐. 건강검진도 아직 제출하지 않았다며?”
“아···네.”
그는 별다른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받으라고만 명령했다. 그것도,
“꼭.”
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알겠습니다.”
‘어쩌지?’
사무실로 돌아온 아리는 실수에 대해 고민할 겨를이 없다.
며칠 전, 문자를 보낸 동창 도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정인아, 나야 아리.”
-응, 아리야! 어떻게 지내? 문자만 보내놓고 말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혹시 이번 주말에 좀 볼 수 있을까?”
-주말에? 아···그래. 보자.
---*---
일요일 오후,
강남역의 한 커피숍에서 아리는 정인을 만났다.
“머리···염색했네?”
고민을 많이 했다. ‘어떤 모습으로 나가야 할까? 짧게 친 본 머리 그대로 나갈까?’
아리는 나중혁 형사를 만났을 때처럼 금색 가발을 쓰고 나갔다. 아무리 교차지점이 없는 중학교 동창이라도 조심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았는데도 아리의 모습에 정인은 놀란 눈치였다.
“응. 잘 지냈어?”
“응, 나야 뭐···.”
“병원은?”
“그럭저럭. 이제 개업한 지 1년 반 된 거치고는 괜찮아.”
“다행이네.”
오랜만에 만난 동창.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원래도 1년에 한 번 만날까 하는 사이였으나, 그래도 그때는 이런 어색함은 없었다. 오히려 만나면 즐거웠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좋았다.
이렇게 된 건 1년 반 전쯤 아리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땐 미안했어.”
“아니야. 내가 미안해.”
정말 찾아가고 싶지 않은 친구였다. 힘들 때 만나면 힘이 생기는 친구였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중학교 시절 만났던 친구였기에,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더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가니 그것마저도 사치였다. 당장 사채 말고는 답이 없는 순간이 왔고, 정인 이외에 이제 아리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를 찾았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했어.”
“아니라니까. 조금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정인은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아리 쪽으로 내밀었다. 돈이었다.
그때는 병원을 개업하느라 경황이 없었기에 빌려줄 수 없었던 돈.
그녀는 오랜 친구의 부탁을 그렇게 거절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얼마 안 돼. 그때 네가 빌려달라고 했을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니야, 정인아. 나 이제 사정이 괜찮아졌어.”
“진짜?”
“응.”
“아인이 깨어났어?”
“···응.”
“다행이다.”
“응.”
아리는 정인이 고마웠다.
솔직히 한때 친했다는 이유로 염치없게 돈을 빌리러 간 것이었는데, 이렇게 1년 반이 지나서라도 주려 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아리가 그녀와의 연락을 끊은 건 화가 나서도 아니고 배신감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준다.
“고마워.”
“뭐가.”
“그냥 이렇게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야, 친구끼리 만나주는 게 뭐냐.”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해졌다.
사실 그녀가 정인에게 연락한 이유는 혹시라도 가짜 건강검진 기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해서였다.
그녀에게 부탁하려 했다기보다는 병원 기록이나 관리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랐기에, 그녀에게 물어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막상 정인을 만나고 나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겨우 되살린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
“야, 너 기억나냐? 중2 때 5반 시환이? 걔가 너 좋아했었잖아?”
“걔 나 안 좋아했어. 너 좋아했지.”
“얘가 또 이러네. 걔가 나한테 그랬다니까, 아리 네가 좋다고.”
“아니야. 걔 나만 보면 너 찾았어.”
“아무튼, 아무튼. 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갔었잖아? 걔 진짜 부자 됐대. 무슨 IT 회사 창업해서, 재산이 5,000억 원이란다.”
“진짜?”
그냥 오늘만큼은 다 잊고 친구와 옛날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
“너는? 진세 오빠랑 결혼 안 해?”
“헤어졌어.”
“뭐?! 7년 아니 8년 사귀었잖아?”
“작년에 헤어졌어.”
“왜? 둘이 사이좋았잖아.”
“그래서 헤어졌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너무 사이가 좋았어. 남매 같았지.”
“세상에 그런 남매 사이가 어디 있냐?”
“그렇다고. 그냥 언제부턴가 동성 친구 같아졌어. 오빠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어느 날은 나한테 그러더라 ‘우리 그냥 결혼할래? 너랑 살면 평생 문제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그게 청혼이었어.”
“그건 좀···.”
“그렇지? 근데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거든. 이 남자랑 살면 평생 큰 문제 없이 잘 살 수 있겠다 하는···. 그래서 헤어졌어.”
이해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사귀어 이제는 가족만큼 편해진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런 자신이 어디 있어. 늘 비교하겠지. 8년이야. 내 이십 대를 전부 오빠랑 보냈어. 그런데 그렇다고 편안함 하나만 믿고 그 사람이랑 결혼하기에는 아직···내가 철이 덜 들었나 봐. 어딘 가에 있을 거 같네, 평생 설렐 수 있는 사람이. 내 운명이···.”
설명하는 정인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진다. 아직 옛 연인을 다 잊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오빠의 모습을 흔들어 떨쳐버리고, 그녀는 주제를 바꾼다.
“그래서 머리 염색은 왜 한 거야?”
“응? 아, 이거. 그냥.”
“너 연애하지?”
“뭐? 연애는 무슨. 아니야.”
“아닌데. 분명 누구 있는데. 너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 우리 병원에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네. 그러지 말고 너 우리 병원 모델 할래? 기집애 진짜 피부 좋네.”
“아, 왜 그래-.”
“솔직히 말해봐? 너 누구 있지?”
“있기는 누가 있어?”
“썸타는 사람 있잖아. 딱 얼굴에서 나오는 데 뭐. 옛날에 우리 교수님이 그러셨어. 피부에 가장 좋은 건 사랑이라고. 너 예뻐졌어. 아! 혹시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떨던 와중, 정인은 ‘그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기는 했는데···.”
“누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고. 가고 알아보니까 신분도 확실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누가?”
“최성태.”
사무장님?
“누군지 몰라?”
“알아.”
“아, 그렇지? 아는 거지? 처음에는 조금 의심이 들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더라고.”
“그분이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너를 찾고 있는 은인이 있다고 하시면서 너에 관해 이것저것 묻더라고.”
“뭘?”
순간 긴장한 아리의 얼굴이 경직되자, 정인은 혹시 자기가 실수한 것일까 봐 걱정된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야. 그냥···그분이 널 찾을 줄은 예상 못 해서.”
“안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시더라. 네가 예상하지 못할 거니까, 자기가 직접 연락하겠다고. 연락 아직 안 하셨나 보네. 네가 놀라는 거 보니까. 내가 실수한 거는 아니지?”
“응. 아니야. 근데 그분이 나에 대해 뭘 물었어?”
“이것저것 학창 시절 이야기 조금. 많이 묻지는 않았어. 이미 양윤주 선생님께 다녀와서 많이 알고 있으셨어.”
“사무장님이 양 선생님께 다녀왔다고?”
이제 아리의 얼굴을 사색으로 변했다.
---*---
다음 날 오전,
<법무법인 해결>의 카페 같은 휴게실.
“김 변, 얼굴이 왜 그래? 잠 못 잤어?”
어젯밤 정인을 만나고 돌아온 아리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잘 수 없었다.
최성태 사무장이 거기까지 찾아갔다는 건 뭔가 눈치를 챘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까지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최성태 사무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오늘 아침에도 선식 드시게요, 부장님.”
“악!”
최성태 사무장을 생각하던 중, 그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아리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왜 그래, 김 변! 왜? 뭐야? 벌레야? 신성한 로펌에 감히 벌레 새끼가···.”
“아니요! 갑자기 서 변호사님이 시키신 일이 떠올라서요! 저는 이만···.”
아리는 서둘러 방으로 도망쳤다.
“왜 갑자기 저래? 부장님, 김 변이 왜 저러는지 아세요?”
최성태는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리의 표정을 봤다.
알 것 같다, 왜 저러는지.